서울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말>이란 잡지를 집어 들고 의자에 깊숙이 앉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요즘, 이 잡지는 구태의연한 듯 보이기도 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 있던 잡지, 그래서 2000년대에 서서 보면 본문을 읽기도 전에 격정노도의 젊은 한때를 거슬러 생각하게 만드는 잡지다.
예전에 편집디자인의 모범이라고 칭송받으며 지식인들 사이에 읽히던 <샘이 깊은 물>이나 소박한 편집에 소박한 내용이 담겨 있어 서민들의 잡지처럼 여겨졌던 <샘터>도 현대적 감각으로 편집과 내용이 옷을 갈아입은 느낌을 주지만, ‘말’은 아직도 남루한 옷을 입고 서울역 근방을 배회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나 사실 세상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고, 정치권력에 의한 노골적 폭력 대신 지금은 신자유주의 자본권력에 의한 부드러우나 무자비한 횡포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 같은데, 사람의 취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본문보다 디자인이, 가치있는 글보다 효과적인 광고가 책을 팔리게 하는 세상이고 보니 잡지를 보아도 텔레비전을 보는 것 같다.
내 취향이 고루한 것일까, 오히려 <말>처럼 ‘그래도 할말은 해야겠다’는 태도가 귀해 보인다. 예전에 아님 지금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쓸쓸하고 억울하고 시린 하늘을 이고 사는 뒷골목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이런 사람들이 살판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열망, 향수 같은 최루탄 냄새와 오염되지 않은 사회적 투신, 뭐 이런 것들이 나의 변심을 꾸짖는 것 같다. 세상 문제에서 좀 떨어져 살고 싶고, 제발 마음이라도 편하게 먹고살았음 좋겠다라든지, 자기 자신의 삶에 더 천착해 들어가고 싶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던가, 농부들은 본래 혁명적일 수 없다고 말이다. 시골에 살다 보니, 마음공부가 되기는커녕 더 옹졸해지고 보수적인 사람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 말이 그리 틀린 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뭐든지 집안에 들이고, 땅 한뼘이라도 내 것으로 삼고 싶고, 산과 마을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며, 가족이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마음 한번 크게 내더라도 이웃을 돕기가 쉽지 않다.
사회문제에서 관심이 멀어지고 농사에만 목숨을 걸 듯이 살게 되는 게 시골살이다. 그래서 제 한 몸 건사할 수는 있겠지만 영적으로 승화되고 사회적으로 투신할 수 있는 자질을 키우긴 힘들겠다. 도시와 시골의 긴장감, ‘세상’과 ‘나’의 긴장감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경에 사로잡힌다. 아직 참사람이 덜된 탓이다. 안개가 희부옇게 피어오르는 숲의 명징한 새소리처럼 살지 못하는 탓이다.
<말> 2001년 10월호를 대충 눈으로 훑어 내리는데, 임순례 영화감독에 대한 기사에 눈길이 모아졌다. 단편영화로 제작된 <우중산책>과 <세 친구>를 본 적이 있는데 마치 후미진 골목길을 걷다가 전봇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부 구함’이란 광고지에 눈이 마주칠 때 느끼던 그런 심경의 영화였다. 삶의 버거움, 바닥을 쓸며 날리는 먼지바람을 바라보는 막막함, 미묘한 일상의 씨줄과 날줄,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고 곰살거리며 살아가는 이웃들, 차마 놓치고 싶지 않은 희망들이 들여다보였다. 잘난 데 없지만 그래도 손 한번 잡아주고픈 애달픈 인생들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임순례 감독의 <우중산책>은 삼류극장 매표원의 일상을 담은 영화인데, 당시 조감독을 맡았던 박경미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비좁은 판잣집 동네로 함께 헌팅을 갔죠. 한여름 땡볕이 내리쏟아지고 있었는데, 물이 담긴 고무대야에 어린 남자 아이 둘이 발가벗고 놀고 있었어요. 이룰 수 없는 꿈에 젖어 빗속을 달려온 여주인공이 진록의 큰 나무 아래에서 다시 현실을 인식하고, 매표원으로 일하는 극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순간에 그 뒤편으로 아이들이 한여름 소나기를 즐기며 발가벗고 놀고 있는 장면을 삽입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임 감독님은 흔쾌히 동의했어요.
며칠 후 촬영 당일이 되었습니다. 소나기가 필요했던 저희는 살수차를 동원해 비를 쏟았지요. 다른 컷들을 다찍고, 큰 나무 아래 장면을 찍게 되었지요. 시간은 이미 늦은 오후였고, 한여름이었는데도 날이 서늘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무 뒤 배경으로 아이들을 준비시키려는데 임 감독님이 갑자기 그 설정을 취소했어요. 결국 여주인공이 발길을 돌리는 나무 뒤편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편집하면서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저는 그 이미지가 아까워서 몇 번이나 아쉬워했어요.
임 감독님 역시 아이들 설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사실이지만 ‘빗속에 어린아이들의 옷을 벗기고 떨게 하면서까지 촬영을 할 정도로 내 영화가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에 취소했다’는 것이 그의 답변이었어요.”
임순례 감독은 그 영화로 1994년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아마 아이들이 발가벗고 노는 장면을 덧붙였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더욱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람 하고 웃어넘길 줄 아는 사람이 임순례 감독일 것 같다. 아직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 사람의 작품에는 정말 ‘사람 냄새’가 난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성공’이다. 일류가 되기 위해 모든 공력을 기울이며 한 달치를 하루에 해치우려고 하듯이 빡빡하게 산다.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노력이 미흡한 것이고, 나는 좀더 내 일에 몰두해야 한다. 어쩌면 미친 사람처럼 일해야 성에 찰지 모른다. 성공을 위해선 세상에 좀더 멋지게 기여하려면 조금은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큰일을 하기 위해선 접어두어야 할 것이 많다고 여길 것이다. 예수도 자기 제자가 되려면 부모 처자식이며 배도 그물도 쟁기도 다 버리고 당신 뒤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고 위로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세상을 세우겠다고 일하면서 곁을 주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을 밝은 천지에 우뚝 세우게 될지는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을 여전히 응달에 남겨놓는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가 가진 미덕이라면 이름없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묵밭의 풀포기 하나에도 나름대로 내력이 있듯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삶에 애환이 있고, 그들 역시 절망과 희망이 꿈틀거리는 살아 있는 실체다. 삼류극장 매표원 처녀도 의미있는 제 삶의 주인공이다. 우리가 참된 성공을 이야기한다면, 타인을 의미있게 만들어 주는 일에 시선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하는 일이 성공하면 할수록 내 주변이 행복해진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얼마 전에 받아본 <둘이나 셋>이란 소식지에 귀한 글이 실려 있었다. <둘이나 셋>은 한 달에 두 차례 토요일에 대전역 광장 귀퉁이에서 노숙자들에게 김밥과 차를 대접하는 자매 형제들이 만드는 소식지다.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이끌었던 ‘가톨릭일꾼운동’에서 추구하는 환대의 정신을 실천해 보자는 것일 텐데, 제도적 안전장치 없이 사람들의 선의에 기대어 춥거나 더워도 상관없이 노숙자들을 만나는 그들에게서 잠시라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이엠에프 이후 나라의 지원을 받아가며 이런 게 유행한 적이 있었지만, 이들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다만 복음의 말씀이 힘을 북돋아 줄 뿐. 그들이 소식지를 통해 전해준 에머슨의 성공은 이러한 것이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