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비폭력'을 멍청한 짓이라고 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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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비폭력'을 멍청한 짓이라고 말한다면
  • 쟝 고스‧힐데가르트 마이어 부부
  • 승인 2019.12.17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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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을 살아가며- 쟝 고스‧힐데가르트 마이어 부부와의 대화-3

♤ 제라르 :우리는 직접적으로 부닥친 일들만 실제로 파악하지요. 우리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불의만 느낍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순간에만, 방어-자기방어에 대해 얘기합니다. 우리 자신의 폭력에 대항하여 일어난 타인들의 방어에 대하여는 훨씬 덜 파악합니다. 우리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기 보다는 분노하는 희생자의 역할을 기꺼이 합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취약한 자기 방어 구조를 흔들어 놓으면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쟝 : “비폭력”이라는 말만 발음하면 견제가 들어옵니다. ‘멍청한 짓이다. 자신의 생명을 방어해야만 한다. 강도당하고 살해될 때에 가만히 당하고 있을 것이냐?’ 내게 있어서 합법적 방어는 의무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을 죽이도록 놔둘 권리가 사람에겐 없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예를 들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러 온 자를 죽이지 않고, 당신의 생명을 그에게 줍니다. 예수님이 가장 약한 자라서 어찌 해볼 도리가 없기 때문에, 겁이 나서 그냥 거저 준 것이 아닙니다. 아니죠, 생명을 진리와 교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앞에 선 사람을 진리로 공격하십니다. 상대편은 선택하여야만 합니다. 진리를 받아 들이거나 아니면 살해하거나. 그외에는 끼어 들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에 비폭력의 공격성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장 심오하고 강력한 부분을 공격합니다. 양심, 마음, 이성,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이 총을 소지하는 날, 모두가 실제로 안전해질까요? 우리는 합법적 자기 방어와 합법적 폭력을 혼동합니다. 폭력은, 무엇이든지, 비록 법으로 합법화되었더라도 오직 하나의 반응을 일으킵니다. 폭력입니다. 합법적 폭력은 공포로 인한 정신이상을 일으키며, 오로지 집단적인 정신이상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폭력을 줄인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우리의 공포와 폭력을 가지고 폭력을 배양합니다. 언론에서 얼마나 자주 봅니까? 도둑으로 오인하고 아들을 살해한 아버지, 빈집털이로 오인하여 옆집 사람을 총으로 살해한 얘기등‧‧‧?

필라델피아의 어느 동네 예를 들지요.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그 동네에도 밤에 강도가 많았습니다. 퀘이커 교도들(비폭력을 지향하는 개신교도들)이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였습니다. 해가 지면 두 사람이 거리를 순회합니다. 위험을 목격하면 경고 신호로 경적을 울립니다. 신호를 들은 부근의 주민들은 즉각 거리로 나옵니다. 강도들은 자기들을 패는 대신에 인간적인 태도로 질문을 해대는 주민들에 둘러 싸입니다. ‘왜 이런 짓을 하는가? 정말로 살기 위해서 이런 종류의 행동을 해야하는가?’ 이렇게 팔개월 동안 한후에 사람들의 공포심이 사라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강도 행위가 상대방 여행자의 공포심이나 겁 때문에 지하철이나 열차에서 일어납니까?

자기방어를 위해 살해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 위해 모든 교회가 자연법을 둘러대는 것을 난 알고 있습니다. 마치 복음이 자연법의 법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 힐데가르트 :1945년 오월에 붉은 군대가 비엔나를 침공했습니다. 나의 가족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점에 달했었는데 곧 닥칠 앞날이 끔찍스러웠습니다. 끔찍한 소문이 군대보다 먼저 들어왔습니다. 우리 부친은 유럽에서 제일 먼저 비폭력을 행사한 사람들 중 한 분입니다. 소련 군대가 우리 구역에 도착하자 부친은 우리 문을 잠그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군인들은 힘들이지 않고 들어와서 무장하지 않고 있는 부친을 보았습니다. 부친은 지하실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데려왔는데 여인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일도 없었습니다. 소위 합법적 방어를 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합법적 방어를 거론할 때 우리는 적어도 힘의 균형이 공격자와 대등하거나 혹은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상정합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상황이 돌아가는 경우는 매우 드믑니다. 공격을 당한 사람은 힘을 쓸 수 없게 되어 있거나, 갑자기 습격을 받는데, 이는 폭력의 논리가 의도한 대로입니다. 어쨌든 경계를 하고 있거나, 나보다 강한 사람은 공격하지 않게되죠. 그러면 약자는 어떻습니까? 합법적 자기방어 상황에서 어떻게 합니까?

♤ 제라르 : 잠깐만요! 부전론자(평화주의자)들은 분명한 약자이죠.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전쟁 도발자들입니다. 그들은 일치에 대해 감상적인 연설을 하다가, 실제로 나라를 방어해야 할 때, 지구에서 히틀러 같은 미치광이를 제거해야 할 혹은 살해 당하게 될때는 재빨리 도망쳐 다른 사람들이 그 상황을 직면하게 하죠. 이런 사람들도 폭력을 거부합니다. 실제로 이 사람들의 글은 군인들에 대한 욕설로 가득차 있습니다. 별로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들이 평화로이 살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손을 기꺼이 더럽히려는 사람들이 없다면, 부전론자(평화주의자)들도 존재하지 못합니다.

♡ 쟝 : 나는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적을 잘 죽여서 훈장을 받았습니다. 히틀러는 죽어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나는 1939년 전쟁에 나갔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나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외의 사람들은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에서 돌아다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도 역시 살해되었습니다. 자신의 손에 의해서지만. 히틀러가 억지로 목숨을 끊게 되기까지 사천만 명이 죽어야했습니다. 그 다음에야 우리가 자유로워졌지요.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하는 폭력을 거부하는 것은 비폭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마치 예민한 청각을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폭풍이 오기도 전에 숨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몸을 다치지 않고 싶기 때문에 전쟁이 두렵습니다. 폭력에 대해 “안돼” 하고 반대를 할 때는 공개적으로, 크게 소리치고 다음에 따라올 반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독재자들은 진리를 말하기 전에는 죽이지 않습니다. 말한 다음에 죽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있었던 사실이 본 회퍼 목사에게도 사실이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평화주의자들은 사실은 갈등이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이상 서로 반목하지 않는 상황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화가 아니라 조용함을, 혁명이 아니라 복종을 제창하고 있습니다. 체념에서 체념으로, 결국에는 전쟁이 최소의 죄악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어떻게 더이상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말해, 모든 교회의 태도입니다. 평화, 비무장, 일치 등등을 설교하지만, 전쟁이 터지면 승리를 위해 무기를 축복합니다. 비폭력은 이러한 행위와는 완벽히 이질적인 것입니다.

♤ 제라르 : 제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폭력을 용납했었지요. 그리고 전쟁에도 참여했지요. 어떻게 된 것입니까?

♡ 쟝 : 가난 때문에 어려서부터 일했습니다. 쓸만한 직업이 없는 젊은이는 쉽게 착취당하지요. 필요에 의해서 노조운동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나에겐, 노조가 내가 만난 최초의 비폭력 단체였습니다. 노조는 무장하지 않고 불의에 대항해서 싸우고, 사람을 존중했었습니다.

스물일곱에 전쟁에 나갔습니다. 훈장을 받고 영웅이 됐지만 곧 상처뿐인 영웅이 되었죠. 별안간 깨달았어요. 즉 내가 사람을 존중하는 노조의 이상을 매장시켰을뿐 아니라, 그 이상을 배반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내 연대는 희생되었습니다(우리는 던커크로의 퇴각을 방어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죽일 수 있는 한, 쏘고 죽이다가 포로가 되었지요.

♤ 제라르 : 저는 로레인 출신으로, 지난 대전중에 볼모로 이용된 지방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삼촌들은 독일 군복을 입고 불란서를 ‘방어하기 위해’ 러시아 전선에서 싸웠고, 전쟁에서 진 쪽이 되었죠. 형제 중 막내인 우리 부친은 이긴 쪽으로, 라인 지방을 점령한 불란서 군대에 속했습니다. 두번 전쟁에서 우리 마을 청년 80명이 독일 군복을 입고 러시아에서 죽었습니다. 누가 이사람들 보고 용감하게 히틀러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있습니까? 전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방어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방어하는 사람들을 죽인 자들은 또 무엇을 하였습니까? 저의 지방은 마지막 방어선상에 있었고 아직도 이 방어선은 팽팽한 긴장의 상태입니다.

♡ 쟝 : 우리의 수동적 태도, 비겁함, 우리의 돈으로 우리는 전쟁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것밖에 없는 사람들을 도왔으며 전쟁에서 자기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낸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현실에는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았었죠. 오늘날 우리가 핵 현실에 대해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규탄하는 살생이 일어난 다음에야 사람들이 와서 불만을 얘기하도록 놔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통치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말을 해서 감옥에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만 있으면서 무기제조업자들을 지지하면, 우리는 감옥에 가지않지만, 우리 아이들이 전쟁에서 죽습니다. 다카우 박물관에는 <나는 히틀러에게 댓가를 지불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프리츠 본 디쎈이 썼는데, 많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비폭력 사람들이 받는 질문에는 언제나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리석은 짓하는 아이를 때릴 것이냐 아니냐 하는 깡패부류에 속하는 개인의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가하는 폭력인 전쟁으로, 우리는 개념적으로는 모두 국가에 속하며, 국가는 자신을 방어하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 속에 들어있는 폭력은 거의 상기되는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서방 세계에서는 폭력 경제, 폭력 권위, 폭력 정치, 폭력 구조에 대해 거론하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이런 폭력이 인간적 차원의 부분을 파괴하는데 상호 작용을 합니다.

폭력은 사람 몸을 공격하여 불구를 만들고, 고문하고, 신체를 파괴합니다. 1981년에 80개국의 독재정부가 통치 수단으로 고문을 이용하였습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아돌포 페레즈는 나의 친구인데 “국가 안보” 라는 이름으로 아르헨티나 감옥에서 고문당했습니다. 나 역시 나치에 의해 “안보” 라는 이름으로 고문받았습니다.

폭력은 사람 마음을 공격하여, 영혼을 파괴하고, 자유와 책임을 수행할 능력을 분쇄합니다. 군사 기술은 뇌를 마비시켜 한 도시 전체를 천치로 만들 수 있는 ‘초음파 폭탄’을 개발하였습니다. 폭력은 기근으로 굶어 죽게하여 삶을 공격합니다. ‘매 시간 1만 명이 아사합니다.’ 그들은 우리 서방국가가 그들을 구제하고 싶지않기 때문에 죽어 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폭력은 개인이나 집단적으로 사람을 공격합니다. 폭력은 지역 혹은 국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폭력은 사랑의 정신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 제라르 : 당신은 비폭력이 아니예요. 전쟁에도 나갔고, 살생도 했어요! 폭력자들에게서 훈장도 받았고 명예도 얻었고요.

♡ 쟝 : 백정짓이 나를 절망케 했어요. 모든 것이 내겐 실패였습니다. 내가 쓴 편지를 읽어 보십시오.

 

 

에드먼드에게

1980년 2월 6일

너의 작은 천국에서 머무는 기회에 네게서 받은 그 많은 도움, 사랑, 존경에 대한 보답으로 네게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최선, 하느님이 내 영혼에 넣어주신 보석, 아무도 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무한한 가치의 보물로 그 누구에게나 감추어져 있으며, 그 누구나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보물을 무어라 정의할지,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 어떤 면에선 너는 내안에 있는 이것을 놀라게 하고, 훔쳐가야만 한다. 많이 훔쳐 갈수록 나는 더 만족한다. 그리고 이 보물을 주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커져서 그것을 내게서 훔쳐가도록 나는 사람들을 자극한다.

너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너는 내게 준 것이 너무 많으므로, 이 무한한 보물을 말로 옮겨 보도록 하겠다.

___________________

1940년,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어느날, 내가 포로가 되기 얼마 전에, 나는 마치 내가 나 밖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잠에서 깼다. 나는 너무나 행복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너무나 확신이 서고, 확실하였고, 완벽한 평화였다. 전쟁통에 있었으므로 너무나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마치 내 동료들 위로 떠다니는 것 같았는데, 동료들은 무언가를 뒤쫓아 가면서 손에 닿는 대로 탐욕스럽게 나꿔채고 있었다.

동시에 막강한 사랑이 내 영혼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나에게 스며 들어온 이 무한한 행복을 그들에게 주고 싶은 욕망이 거대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 행복을 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 자신으로부터, 그들을 노예로 만들고, 비참하게 만드는 탐욕으로부터 그들을 구할 수 있을까? 그렇다, 어떻게?

해답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내게 주어졌다! 그것은 나의 모든 한계를 넘어 나를 열어주는 부드럽고 강력한 힘과 같았다. 만지거나, 듣거나, 뭘 하나 보거나 하지 않았는데 이 힘은 나에게 이런 깨달음을 주었다 :

‘나는 그들의 아버지이며, 이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다! 나는 그들의 창조주이다! 나는 그들이 가능한 그것 전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하여 오로지 무한한 사랑으로 그들을 창조하였다. 나는 네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들을 영원하게 창조하였다.

나는 그들이 나같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나와 함께 하느님이 되기 위하여 그들을 창조하였다. 즉 내가 그들 각자를 위하여 나의 생명을 바칠정도까지 그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그들이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다시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천년전에 그들을 사랑했듯이 오늘도 그들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나는 변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대신에 서로 죽이고 있다. 하지만 오직 사랑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쳐라. 빨리 가르쳐라! 오직 사랑만이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내가 그들 각자를 위해 피를 흘려 구원하려고 했으며 그들을 창조했던 목적인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강렬했고, 나를 압도했다.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능력이 모자라 나는 몇년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정의하고 표현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그것을 얘기하려는 욕구가 일어 날 때마다, 말을 시작하면 모두들 웃고 나를 놀려대었다. 가끔가다가 내가 해야만 했던 얘기에 마음이 압도된 몇 사람이 있었다.

내 목숨을 두번 구해주었던 독일 장교,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나의 솔직한 발언에 의해 야기된 소란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는 모스크바 대주교이며, 종교장관인 쥬브스키 위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 파블로 에바리스토 아른스 추기경, 알로이시오 로르챠이더 추기경등‧‧‧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간단하다. 그들의 창조주, 영원하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가없는 부드러움으로 그들을 열렬히 사랑하고 계신다. 그들 각자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정도로 사랑하신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분이 그렇게 만들어졌듯이. 그분은 오로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행복과 기쁨으로 ‘잔이 흘러 넘칠 때까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사신다.

그것은 즉 그분의 모든 것, 그분의 모든 사랑이다(우리가 사랑하는 사랑,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랑, 보고싶고, 찾고 발견하는 사랑, 산 파울로의 파블로 아른스 추기경에게서 느끼는 사랑과 같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시다. 그분은 사랑이시다! 즉 생명, 진리, 정의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사실이다.

그것이 내 진실과 헌신의 모든 것이다. 그외엔 아무것도 없다 :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것이 내 생활의 전부이며 끊임없는 기쁨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존재를 그분처럼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 한다. 그분이 내게 주신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의 모든 사랑으로 채우려고 한다. 그러나 나의 가련한 사랑으로는 채울 수가 없고, 모든 다른 사람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마음, 영혼, 존재는 너무나 크다. 우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광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어떤 창조물도 인간을 만족시킬 수 없는 이유이다. 사람은 사람을 충족케 할 수 있는 오로지 한분이신 하느님에게로 이끄는 길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분을 발견하는 순간 사람은 충족케 되고 기쁨에 차 열광케 된다! 그리고 모든 존재를 사랑하게 되고 자신은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모든 것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자기가 사랑하는 분에게 완벽한 사랑을 받고 있는데 더 이상 원할게 무엇이 있을까? 이 세상에 더 큰 행복이 있을까? 자기가 사랑하는 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성적이며, 가장 부유하고, 최고임에랴! 자기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위해 죽을 정도로,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줄 정도로 사랑함에랴! 더 나아가 ‧‧‧ 그 분이 바로 하느님, 사랑 그 자체, 지혜와 지식, 진리와 생명이시며, 그분의 무한한 권능으로, 우리를 그분과 똑같은 존재로 만들어서, 모든 사람에게,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실 수 있는 분임에랴!‧‧‧

그렇다. 그런 행복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실제로 있는 것의 진리와 실재를 상상하지 못한다. 그렇게 위대하고, 선하고, 권능있는 하느님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진리와 하느님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행복감과 기쁨으로 열광하게 된다!

그렇다. 불멸의 지혜요, 지고의 존재, 모든 권능, 정의, 자비, 선함이신 그분이 우리가 이 지상 생활을 끝낼 때에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의 존재와 자유를 존중하셔서 그분의 모든 존재와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며 당신께서 내게로 보내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주라고 하셨으며, 그리하여 이 지상에서 이미 그들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나처럼 자신들도 행복해지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그러나 내 마음을 다하여 너에게 그것을 주고 싶은 것이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나, 어떻게 그것을 말해줄지 몰랐던 형,

쟝 고스로부터

♡ 힐데가르트 : 루가복음 (1:39~45)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며칠 뒤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가서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 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렸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그분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지상에서 사랑의 생명을 시작하는 순간이, 네가 나를 만나는 순간이 네가 내 안에 있는 때이다. 네게는 언제나 시간이지만, 가난하고 마음이 흩으러진 내게는, 내 안에서 너의 출생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어둠, 내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을 씻어 버리는 사랑의 순간, 기쁨의 섬광이 있다. 너는 거기 있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며 우리가 너이다.’ 주님, 나를 가난하게 만드십시요, 그리하여 당신의 사랑과 정의의 왕국이 이 세상에 들어 올 수 있도록, 내가 당신과 당신 복음의 증거자가 되도록 하십시요. 그 옆에서는 모든 부와 권세가 힘을 잃을 것입니다.’

내 일생동안,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세력에 대항해 왔습니다. 내 출생지 비엔나에 히틀러가 왔을 때 나는 열살이었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나와 반 아이들을 강제로 중심가로 데려 갔습니다. 많은 군중들 속에서 나는 그 사람의 악마적 힘을 느꼈습니다. 내 속에서 외침이 있었습니다. “아니, 나는 저 사람에게 환호하지 않겠어, 이 자리에서 죽인다해도 환영하지 않겠어.” 그것은 독재자 - 이 세상의 악마의 세력과의 첫번째 조우였습니다. 그 만남은 내 일생 내내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나라, 오스트리아에게 세계 일차대전은 제국의 종말이었습니다. 제 이차대전은 문명의 종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계속적인 패배로 인해 우리들 가슴에 심한 상처가 남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유럽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오스트리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불신을 남겼습니다. 나는 요즈음의 일부 젊은이처럼 삶의 무의미를 고발하였습니다. 요즈음의 일부 젊은이들에게 물질주의는 공허의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나에겐 그것이 전쟁의 파괴적이고 모순된 폭력, 강제수용소, 거리에 쌓인 시체였습니다. 이 공허가 난 두렵습니다. 죽음은 무섭지 않습니다. 죽음을 사랑합니다. 죽음은 내게 진짜 생명을 줄 것입니다. 나는 쟝처럼 생을 사랑해본 적이 없습니다. 생을 받아들이고, 삶을 받아들여 살고 있었고 여기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때문에 삶은 의미를 갖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죽음보다 강하십니다.

내 아버님 덕분에, 무의미와 재앙을 넘어서, 나의 삶이 증오와 분열의 세상에 사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바리안 혈통의 나의 아버지는 히틀러에게 반대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화해를 위한 국제 동지회 설립을 도우셨습니다. 우리는 다카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우리 가족이 처한 위험 때문에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습니다. 어린아이 때 였을지라도 나는 삶의 무의미와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였습니다. 그것은 둘 다 내 안에 있었고 둘 다 사랑했습니다. 물론 그 둘을 분석하지 않은 채 였지요. 조금이라도 살기 위해서는 신앙을 통하여 살아야만 합니다.

♡ 쟝 : 3년전에야 아내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을 피정 중에 처음으로 들었지요. 내 귀를 믿을 수가 없더라구요. 삶에 관해서는 우리는 똑같은 눈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내게 삶은 사랑으로 씌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의 의미는 삶입니다. 우리를 살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생애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고 우리 내부에서 타고 있는 원초적인 불꽃입니다.

♡ 힐데가르트 : 삼십대 후반에 와서야 나의 알려지지 않은 얼굴들에 대해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눈에서 절망을 볼 수 있었던 나이입니다. 사람들의 자유에 의하여 배반당한 사랑의 절망, 폭력에 의해 파괴된 사랑의 절망입니다. 나는 사랑을 위해, 사랑을 통해서만 살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신앙을 하느님께서 가져가신다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나 자신을 죽이는 것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삶의 힘을 발견하고 느끼게 된 것은 쟝과 함께 입니다. 쟝을 알게 된 처음부터 나는 그에게서 오순절 성령강림 후 초대교회의 신앙을 느꼈습니다. 그의 신앙은 죽음으로부터 일어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쟝과 함께 내게 오셨습니다. 그는 삶의 힘, 기쁨, 확신을 내게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을 때 하느님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은 야훼이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엠마우스로 가는 밤에 우리와 함께 걸으십니다. 비폭력은 이 “누군가”와 함께 걷는 사랑의 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하나의 철학적 혹은 정치적 이론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출발입니다. 매출발은 골고타를 통과하는 길이지만 부활절 일요일로 우리를 이끕니다.

♤ 제라르 : 두분께는 비폭력이 사랑을 말하는 또 다른 길일 뿐이군요. 하지만 그것은 복음 안에서의 사랑이지요. 힐데가르트에게 ‘계시’는 잔잔한 것이었던 반면에 쟝은 하느님 사랑의 번개같은 빛줄기를 경험하셨습니다. 강이든 시내든 물은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다른 분이, 완전히 다른 분으로 두 분을 압도하신 분이 계시지 않고, 오로지 사람뿐입니다. 쟈크 모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오래 묵은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완전한 고독, 근본적인 생소함을 발견해야만 할 것이다. 사람은 이제 자신이 살아야만 하는 이 우주에서 집시처럼 가까스로 생존해 나가야만 한다.’ 비폭력은 무신론자,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불교도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 쟝 : 방금 인용하신 모노는 무신론자였지만 그는 사람의 “근본적인 생소함”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죠? ‘사람은 이 세상, 우주에서 유일한 가치를 가지며 사람보다 나은 가치는 없다’는 말입니다. 모노는 이제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그 과학자는 인간 존재의 모순에 대해 얘기하고자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난 그의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눈에 그는 사람의 존재가 우주의 다른 존재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모순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점에서 나는 그와 의견을 같이 합니다.

사람의 위치는 다른 모든 것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주셨지 벼룩이나 코끼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가치는 사람에게서 나오고, 사람에게서만 나옵니다. 고독도 마찬가집니다. 인간은 절대입니다. 사람만이 절대적임을 우리는 막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유일하고 절대적임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태아가 사람이라는 걸 잊으며, 광인도 사람, 불구자도, 원수도 사람이라는 것을 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실현하려면 자신을 주어야만 합니다. 상사, 순경, 은행가에게 자신을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당신을 착취하는 상사가 사람입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굶어 죽는 흑인이 사람입니까? 당신과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 당신과 같은 기준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사람입니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친구‧원수 등으로 세상을 둘로 가르지 않고 오로지 사람을 볼 수 있고, 존경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사람이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힐데가르트 : 우리는 동유럽 나라들과 접촉을 가졌는데, 이는 우리가 비폭력의 사람들로서 세상을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조각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유럽 나라들의 주민들과 처음 접촉할 때부터 우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44)는 예수님의 명령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961년 우리는 유고슬라비아에 있는 희랍정교와 가톨릭 사이의 모임을 조직하려고 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공동체들간에 깊은 증오의 상처가 파였습니다. 화해는 불가능하였습니다. 각 그룹이 서로 앞에 서서 각자가 얼마나 복음에 부합되지 못하는가를 인정한 후에야 가능하였습니다.

1959년 비엔나에서 공산주의 청년 페스티발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는, 다른 유럽인이나, 가톨릭 신자들처럼 공산주의자는 원수입니다. 누군가 이에 대항하는 축제를 열자고 제의 했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을 우리 가정에 초대하였습니다. 우리의 문을 열었지요. 결과로 우리는 모스크바에 초대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기독교도는 배반자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종교는 인간을 배반하고, 진보를 배반합니다. 나는 작가 클럽에서 주최하는 청년과 종교라는 저녁 모임에 초대되었습니다. 방에는 적대감이 가득했습니다. 주최측에서 방금 종교를 비하하는 말도 안되는 어리석은 영화를 상영하고 나서 소련에서 국가가 공인하는 종교의 관리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 5분간 연설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나는 거기에서 연설을 해야 했으며 그 임무가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공산주의자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우리시대의 인류를 위해 정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 철학에 삶을 헌신하고 있으며, 이곳에 장난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이름으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진실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제리 전쟁을 종식시키길 원하고 있으며 살인 이외의 방법으로 전쟁을 해결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역시 여러분을 움직이는 같은 힘입니다. 그것은 우리로하여금 인류라는 이름 값에 어울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나는 또한 우리가 복음에 진실되지 못할 때가 많다고 덧붙였으며, 그들도 자신들의 성실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는가고 물었습니다. 그 5분은 20분으로 연장되었습니다.

몇년 후에 그날밤 참석했던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씨앗은 훌륭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 씨앗이 순교자도 몇명을 배출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 내부에 폭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 내부에는 어떤 신앙이든간에 진리를 위해 정의감으로 사랑을 통하여 행동할 능력이 있습니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이 모든 사람의 심장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기꺼이 자신의 심장의 일부를 파괴하고자 하겠습니까?

[출처] <참사람되어> 199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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