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목숨들로 부산하던 벌판이 점점 그 생기를 접고 겨울채비에 들어가고 있다. 이곳 무주땅이 고도가 높은지 농부들은 대부분 올벼를 심은 까닭에 추수가 끝나가고 베어낸 벼의 밑동에선 아직도 남은 온기가 아깝다는 듯이 파란 싹이 다시 돋고 있다. 겨울바람이 닥치면 그 상태로 얼어붙고 말 것이다.
자연은 한 계절을 버리고 다른 계절을 맞이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 사위어 가는 목숨들의 한끝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다. 텃밭에선 배추가 자라고 있다. 날마다 해가 서쪽 산머리를 넘어가면 물을 주었다. 작년에 모아서 삭혀두었던 오줌을 물에 타서 액비로 주고 하루의 노동을 마감하면, 이미 어둠이 길어지고 밤새 싸늘한 냉기가 집 주변을 맴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외롭다. 산골에 들어온 첫해는 계절이 바뀌는 것이 모두 경탄할 만했다. 정월 내내 산골에선 눈이 그칠 날 없고, 산길을 따라 재 너머까지 흰눈을 밟으며 내가 이렇게 생애를 누려도 좋은가, 세상에 미안했다. 도시에 남아서 생존경쟁이란 말이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도록 살고 있는 동료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짙푸른 하늘, 쏟아져 내리는 별빛, 달무리, 계절마다 돌아가며 피는 들꽃들이 한낮의 노고를 보상해 주었다. 집을 고치고 마루를 놓고 돌담을 매만지고 논밭에 작물을 심고 마당에 꽃밭과 텃밭을 일구는 것은 새로운 만큼 노동 자체가 축복처럼 여겨졌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겠지만, 정작 나에겐 모두 새것이었다.
그런데 산골생활이 만 2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다른 생각이 많아진다. 농사가 1년을 주기로 마감된다면, 두번째 주기가 마무리되는 셈인데, 올해는 자식농사에 마음을 썼다면, 내년엔 좀더 규모있게 농사지을 수 있으리란 예감을 한다. 좀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 사실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나의 내면의 풍경을 살펴보자는 것일 텐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밖의 사람과 사물을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었는지 반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연과 일에 푹 빠져 있으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없어도 외롭지 않다. 사람을 대신할 만한 풀과 나무들, 새와 벌레들, 산과 계곡이 있으니까. 이들은 사람처럼 조바심을 치거나 억지로 요구하거나 사심을 갖고 나를 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성대로 제자리에서 살고 있으며, 나는 여기에 내 방식대로 응답하면 된다. 아마도 그래서 사람이 자연 속에 있으면 스스로도 자연이 된다고 하는 모양이다. 비바람이 변덕스럽다고는 하나, 사람의 마음만큼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속셈 때문에 태도를 바꾸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사람은 산중으로 들어가 치유 받아야 한다는 말도 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젠 사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과 자연 앞에 사람 관계는 항상 뒷전이었다. 일과 자연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니까. 그러나 다시 사람에게 가서 상처받을 준비를 하지 않으면, 그리고 사람에게서 치유하고 치유받지 않는다면, 나는 하느님의 창조를 충만히 살지 못하고, 결국 예전에 느끼던 행복이란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사람이라는 것, 사람은 혼자 살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 사람은 사람 안에서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마땅히 사람 사는 세상을 살 만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창조의 본뜻임을 되새기고 있다. 이런 생각은 아무래도 외로움 탓일 것이다. 자연 안에서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 가슴 때문에 드는 생각일 것이다.
의식의 성장은 건너뛰는 법이 없고, 하나의 단계를 밟으면 다른 단계가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내가 다시 도시로 갈 필요는 없다.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성껏 작물을 키우듯이 사람에게도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마음이 고여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흐르지 않으면 제 가슴을 파먹고 산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몹시 외로움을 타는 것은 삶의 초점을 옮기라고 몸이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섬세하고 고른 숨결로 다시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가 쓴 <조화로운 삶>이란 책은 좀더 대안적 삶을 원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언어였다. 그 책의 시작엔 <좋은 농부가 되는 5백 가지 방법>이란 책에서 갈무리한 토머스 투서의 글이 적혀 있다.
"친구여, 뚜렷한 근거가 떠오르거든 어리석음이 더 커져서 행동을 방해하기 전에, 그대를 묶어놓고 있는 것들에서 멀어지라. 시골이라면 그대와 잘 어울릴 것이다. 나무와 물에게 그대가 필요하게 하라. 곡식이 영그는 땅에 그대의 보금자리를 만들면, 땅과 풀이 그대를 먹여 살리리. 벌판의 바람이 그대를 둘러싸리. 그대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질투에 마음을 두지 말고 흘러가게 하라. 신에게 감사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가질 것. 그리고 자네, 이제 앉아서 쉬게나."
언젠가 서울 명동거리를 지나는데, 시골에서 나들이 온 한 할아버지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요 앞에 보이는 젊은이들만 잡아다가 시골로 데려가면 좋겠구먼.” 도시의 거리엔 사람들로 가득찼고, 시골엔 노인들만이 적적하게 일하며 남은 날을 헤아리고 있다. 이들이 다 죽으면 산허리의 논밭은 묵정밭이 될 것이다. 이처럼 도시에 사람들이 몰려 살다보니 사람이 천(賤)하게 취급받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상품이거나 소비자 또는 일꾼 이상이 아니다. 물론 그 안에서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안간힘으로 살아가는 선남선녀들이 있다. 나는 그들처럼 나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고, 그래서 만사 제쳐두고 서울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삶에 축복을 주는 환경 속에서 쉬고 싶었던 것이다.
이젠 섬세하고 고른 숨결로 다시 사람에게 가야 한다. 농사보다 이웃을 더 먼저 헤아리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편지를 써야 한다. 어려운 생애에 삶을 거들어 주었던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배추 한 포기라도 건네야 한다. 고난에 찬 삶을 위로하고, 또한 그들에게서 사람 사이의 아픈 틈새를 헤아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아침에 비닐하우스에 가니 고추가 바삭바삭 마르고 있다. 너무 오래 내버려두면 고추가 시커멓게 타기도 하고 물기가 아예 없어서 부서지기도 한다. 적절한 때 고추를 거두어들여야 한다. 자주 하우스에 찾아가 고추를 뒤집어 주면서, 섬세한 눈길을 거두지 말 일이다. 때를 놓치지 말고 사람에게로 가자. 그러나 서두르지 말고, 자연에서 배운 대로 사뭇 조심스런 걸음으로 천천히 끝내 가서 만나자.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