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용기있는 사랑을 말하기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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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용기있는 사랑을 말하기 시작하며
  • 베르나르트 해링 교구 신부
  • 승인 2019.12.0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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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을 살아가며- 쟝 고스‧힐데가르트 마이어 부부와의 대화-1

힐데가르트와 쟝 고스와의 만남 그리고 그들의 우정은 나와 내가 하는 모든 일을 풍요롭게 변화시켰습니다. 이 글은 비폭력적 사랑을 수행하는 두 사람의 사도들을 알기 위하여 여러분을 초대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는 경고의 계기가 됩니다. 세밀하게 그리고 공감적인 입장에서 이 글을 읽게 되는 사람은 위기의 상황에 도달할 것이고 자신의 모든 관계와 지금까지의 삶 전체를 전도시킬 근본적인 결정을 내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나는 힐데가르트 마이어를 거의 삼십년동안 알고 있습니다. 그가 나의 책, <그리스도의 법>을 읽은 후 미래에 비폭력의 사도가 되려는 뜻을 품고 나를 만나러 왔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해서 그때 나는 완전한 비폭력에는 어떤 광신적인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개인의 차원이나 사회의 차원에서 비폭력이 최대한으로 실천된다 해도 폭력이 최소한으로 감소되는 것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관점을 매우 분명하고도 직설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절대적인 비폭력에 관해서는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지만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참으로 비폭력적인 모습을 느끼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힐데가르트는 말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카리스마로서, 소명으로서 비폭력의 영성을 선포하였습니다. 나로 하여금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그의 솔직한 신앙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힐데가르트가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나는 남편 쟝을 알게 되었고, 폭력, 증오, 앙갚음을 다스릴 줄 아는 복음의 사랑에 그토록 무조건으로 헌신하는 그를 보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쟝의 성격은 힐데가르트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해 줍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서로 보완적인 품성들의 원형임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쟝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혁명가가 충분히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쟝은 소위 “심리적인 공격성”이 결코 모자라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쟝은 폭력을 택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자연적으로 타고난 이 공격성을 포기하거나 말살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착하고도 적극적인 사랑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쟝과 힐데가르트는 인간적인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와 모든 열정, 지적인 능력, 행동과 주도력을 ‘진리의 힘’을 육화시키는 생활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비폭력의 길과 용기있는 사랑만이 폭력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 세대의 종말을 예고하는 폭력에 대해 유일한 해결책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힐데가르트와 쟝은 의심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예언자들이지만, 편안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전적인 충실성과 신앙의 단순함을 통하여 복음은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요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용돌이의 근원이 됩니다.

지난 삼십여년동안 힐데가르트와 쟝은 거의 “불가능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탈진될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위험, 열정 그리고 심지어 고문에서도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르기도 했습니다. 복음화 해야 한다는 긴급한 소명을 느끼는 그들은 마치 바오로사도의 열정을 연상케 합니다. 바오로처럼 그들도 복음, 그것도 단순히 비폭력에 관한 몇가지 전술이나 전략이 아니라 전적인 복음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비폭력의 영성, 심오한 비젼의 핵심이며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들도 ‘시간이 짧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느낌을 새로운 방식으로서 느끼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이념이나 폭력의 굴레, 군비무장과 전쟁의 족쇄를 떨쳐버려야 하는 것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만큼 절실한 것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참된 대안(복음에의 회심, 비폭려과 창조적인 자유에의 회심 그래서 사람들을 비폭력의 방법으로 옹호하고 실천하는 회심)이 있다고 깨닫는 사람들은 누누나 사도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쟝과 힐데가르트는 우리가 우리 존재의 뿌리로부터 변화될 수 있으며 일단 변형이 되면(‘깨달으면’), 핵경쟁이 인류를 말살시키기 전에 역사를 근본적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힐데가르트와 쟝에게 가장 감탄하는 것은 두 사람이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심지어 같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실망이 크다 하여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언적 사명에 대한 이같은 충실성, 이 청명함은 오로지 은총과 그 힘에 대한 믿음에 의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된 인간의 내적인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들이 갖고 있는 신뢰에 의하여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즉각적인 성공에 연연해 하지 않으며 온갖 힘을 다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바로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비폭력 전략의 영적 성공인 셈입니다.

그들과 같은 사람들은 상호견제하는 비무장, 재앙에 가까운 위협들의 증가 등에 관한 이 훌륭한 대화가 실제로 실천되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는 시간이 낭비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오로지 한가지 해결책만 남아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비폭력입니다. 우리는 비폭력을 긴급하게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핵무기 확산과 그 관련된 전략들이 이 지구라는 위성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다 말살시킬 수도 있는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구세주가 우리에게 제안하시는 인간과 세계의 새로운 창조의 상황을 이루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힐데가르트와 쟝의 대화를 접하게 해준 제라르 후버, ‘불타는 화살’인 그는 창조적이며 지적인 증인으로서 쟝이 변화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이 만남이 자신과 가족의 삶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쟝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어떤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 글을 읽기 시작했던 사람이 끝마침 할 때쯤에는 수천 개의 질문 앞에 놓인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메시지가 얼마나 순수하고 바른가, 그리고 그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들인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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