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트가 쓴 수도자 회칙에 보면 우리에게 아주 유익한 구절이 나온다. 거기서 그는 수도자는 거룩해지기도 전에 성인으로 불리우길 바래서는 안되며, 거룩하다는 명성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우선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영적 완전함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완전함의 커다란 차이를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 거룩함과 나르시시즘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성인, 아주 완벽하고 비현실적인
“성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당연히, 교회가 우리에게 보낸 존경 받아 마땅한 영웅적인 남녀의 거룩함을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다. 성인들은 일반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생각 속에서 금새 정형화되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들은 그 고정관념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인전들은 대체로 그러한 비현실성을 두드러지게 했고 성화들 역시 그 점에 있어 톡톡히 한 몫을 했다.
그래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 안에 정형화된 이미지를 심어놓게 된다. 아니면, 목표 달성의 어려움 때문에 그는 일정한 양식을 따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는데, 마치 교회가 그것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정도(正道)로 제시했다고 생각할 뿐, 다만 그것이 성인들의 그리스도성이라는 신비로운 실체를 이용해 만든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모방에 불과하다고는 생각지 못한다.
그런 이미지를 여기서 그려보기란 어렵지 않다: 그는 실오라기 만큼의 도덕적인 결함도 없다. 성인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완전한 회심에 의해 결국 완벽해진다. 완전함도 모자라, 그는 가장 사소한 유혹도 느끼지 않은 채 성장한다. 물론 유혹을 받기도 하겠지만, 유혹이 그를 힘들게 하지는 못한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한 확실하고 영웅적인 해답을 알고 있다. 그는 죄를 짓기 보다는 차라리 불 속이나 얼음 물, 가시덤불로 뛰어든다.
성인의 의도는 언제나 가장 거룩하다. 그의 말은 언제나 교훈적인 격언으로 가득하며, 모든 상황에 놀랄 만큼 적절하여 다른 이들의 생각까지 잠재울 수 있다. 이처럼 두렵기까지 한 “완전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인간적인 대화를 할 필요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놀라움을 느끼지 못하듯 유머도 할 줄 모르고, 감정도 없고 인류 공통의 관심사에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각각의 상황에 맞는 덕을 발휘하기 위해 달려가기도 한다. 그들은 왕과 그를 수행하는 고관대작들이 모퉁이를 도는 순간 문둥병자의 상처에 입을 맞춰 모든 사람들이 존경심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이같은 이미지를 품고 아무 의심 없이 새 삶을 시작하려는 순진한 신참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깨달아 갈 때, 우리는 속으로, 그가 결국은 옳았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거룩함은 확실히 절대적인 것에 대한 예찬이다. 양보란 없으며 타협도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진심으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거룩함의 기적이 초자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나? 우리는 초자연성을 인간적인 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나? 본성과 은총은 완전히 대립되는 것은 아닌가? 거룩함은 본성과 관련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배격하고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이미지를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실현해야 할 모델로 여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권리로 사람들이 그 모델을 좇으려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사실상 인간적인 성인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룩함의 개념이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아마 은총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혼란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은총은 “본성 위에 쌓인다”는 금언은 영성 생활에 있어 미봉책을 허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엄연한 진리로서, 성인이 되기 이전에 먼저 사람이 실제로 당면한 인간적이고 약한 조건들 속에서 인간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인”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성인들은 모두 지극히 인간적이었는데, 그 인간성은 거룩함으로 인해 더욱 풍부하고 깊어졌으며, 누구보다 성인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신 분, 육화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인간적인 분이셨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그분 안에서 완전히 구현되었으며,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함과 고통을 느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육화된 말씀 안에서 또 그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보다 더 “초자연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완전해지려면, 우리는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철저히 인간적이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의 거룩한 현존과 일치하고 천상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녀로서의 특권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거룩함은 인간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인간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더 많이 걱정하고, 고통 받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한편 유머를 즐기고, 세상의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만 인간적이라는 이유로 인간적인 가치를 파괴하고 좌절시키며, 자신을 남들과 다른 경이의 대상으로 분리시키는 가식적인 “완전함의 길”은 서투른 모방에 지나지 않다. 그런 모방은 육화 신앙에 대한 명백한 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지키고자 하신 인간성을 경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적인 가치를 무질서한 사회에서나 통하는 오히려 덜 인간적인 가치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대한 동물적 본능이라기 보다 우리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인간적인 경향들을 왜곡하고 개발하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격정을 다스리기 위해 고안된 가혹한 고행은 감정이 제대로 성숙하지 않고 천성이 허약하고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현대의 기술 지향적인 삶이 사람의 감성과 본능을 계발하는데 끼치는 영향에 대해 보다 더 깊게 성찰해야 한다. 기계를 다루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 사이에서 생활이 양분된 사람은 조만간 그의 본성과 인간성이 심하게 훼손되어 고통받게 된다.
은총은 본성을 치유한다
거룩함은 그리스도교적 교육으로 형성된 정상적인 지성, 보통의 인간적인 의지, 자신을 헌신하고 봉헌할 수 있는 훈련된 자유를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건전하고 질서 정연한 인간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은총은 본능을 억압이 아니라 치유, 그리고 그것을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인간의 본성 위에 건설된다.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 건강하고 본능적인 자발성은 항상 존재해야 한다. 사람의 감성과 본능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간성 안에서도 활동했다: 그분은 모든 일에 섬세하고 따뜻하고 응답적인 인간됨됨이를 보여주었다. 주님을 본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조정하려고 해서는 안되며(많은 경우 그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오히려 은총이 자애로운 활동 안에서 그의 정서 생활을 형성하고 계발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는 바리사이들에게 물었다: “서로 영광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다른 사람들의 눈에 영웅적으로 보이는 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자신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성인은 자신이 거룩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 한 분만이, 거룩하다는 사실에 압도되고 승복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느님의 거룩함의 실체에 두려움을 느껴 모든 것 안에서 그것을 보게 된다. 그는 그 거룩함을 자신 안에서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안에서 거룩함을 확실히 가장 마지막에 보게 될 것이니, 그 이유는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무(無), 자기중심적인 성향과 죄라는 거짓된 실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어둠에까지도 거룩한 구세주의 현존과 자비의 빛은 비춘다. 성인은,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듯이, 다른 이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한다. 그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하느님 연민의 대상임을 볼 수 있다.
성인은 또한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의 도구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는 다만 자신이 하느님의 자비를 세상에 통과시키는 창이 되기를 원할 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그는 거룩해지려고 한다. 그는 덕스럽고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하느님의 선함이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의 도우심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마태오 5,48) 사랑 안에서 완전해지는 것이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