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밤중에 손님이 방문했다. 서울 살 때 상계동에서 만났던 성당 후배 부부인데, 온다던 시간이 훨씬 넘어도 도무지 기척이 없었다.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안성면에 도착했다는 전화 연락을 받고서 한 시간이 족히 넘었는데도 후배 부부가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엔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구시렁거리다가 나중엔 걱정으로 변했다.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에 산길을 오르는 게, 물론 자동차를 타고 온다고 해도 그리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초행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중 나가지 않은 걸 후회했다. 결국 화물차를 몰고 면까지 나가보았는데, 면에서 집에 전화를 해보니 방금 전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산에서 길을 잃다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산길을 잘못 들어섰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에 그들이 찾아왔을 때는 대부분 흙길이었는데, 얼마 전에 광대정 입구까지 도로포장이 되어서 헷갈린 모양이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왼편으로 꺾어서 들어와야 하는데, 예전에 흙길을 한참 달렸던 것만 기억하고 임도(林道)를 따라서 계속 앞으로만 갔던 것이다. 결국 가파른 임도에서 자동차도 더이상 산을 오르지 못하자 길에 차를 세워두고 애를 안고 짐을 들고 임도 끝까지, 그러니까 산꼭대기까지 걸어올라갔다가 영 아니다 싶어 다시 되짚어 내려오는데, 마침 옆길에서 빠져 나오는 내 화물차 불빛을 보고야 다른 길이 있음을 알아챘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자동차가 나온 길을 따라 올라가 천신만고 끝에 우리집을 찾았다.
임도를 따라서 걸어올라갈 때 별빛이 아무리 밝아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그 길이 맞는다는 확신도 없어서 내내 불안하고 무서웠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전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별을 보았다는 것이다. 은하수도 보았고 반딧불이까지 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사실 이런 밤에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칠흑 같은 밤에는 발끝마저 보이지 않는다. 막연한 육감만으로 길을 걸어야 하는데, 물론 걷다 보면 눈이 좀 밝아지는 것도 사실이고 감각도 살아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한 점 불빛도 없는 밤이란 낯선 시간, 불안한 공간이다. 거창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1주일에 한 번씩 푸른꿈고등학교에 강사로 오는 어느 선생님 말씀이 가끔 관계 맺는 소비자들이 집에 와 머물다 가곤 하는데, 하나같이 밤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려면 아이들은 물론이고 여자들은 꼭 남편을 깨워서 같이 다녀온다는 것이다. 도시생활에서 밤이 익숙해질 기회가 없었던 까닭이다. 캄캄하다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미래가 분명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래를 점칠 수 없을 때는 함부로 발을 내딛지 않는 걸 우린 지혜라고 배웠다.
그러나 후배 부부는 알면 가지 않았을 길을 몰라서 가는 바람에 밤의 속내를 그나마 엿볼 수 있었다. 머리 위가 온통 뿌려놓은 듯한 별뿐일 때도 있음을 보았고, 빛을 발산하는 반딧불이도 보았고, 촉촉한 밤이슬과 쿰쿰한 흙냄새, 그리고 밤에도 잠들지 않고 울어대는 생명들이 있다는 것을 듣고 보고 알았을 것이다. 낯선 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것들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보통 집에 손님이 오면 밤에는 마루나 방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모닥불을 피워놓고 앞마당에서 놀곤 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집에 와서도 문밖 길가에 깔개를 내어놓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면서 별을 구경했다. 사실 그날 밤은 보기 드물 정도로 별이 많이 떴다. 그동안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서 하늘이 그만큼 더 말끔해졌고 달빛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 부부는 나중에라도 우리집을 생각하면 먼저 별밭을 떠올릴 것이다.
어둠이 그저 캄캄한 먹빛만이 아니라
밤을 두려워하지 않고 밤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밤이 하나의 먹빛이 아님을 알아 가는 과정일 것이다. 밤이 가진 여러 가지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다. 막연하게 캄캄하다든지, 아무것도 없는, 무엇도 아닌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는 라디오만으로 우리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키울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어린이 드라마 <마루치 아라치>를 라디오로 들었지만, 마치 영화를 본 것처럼 삼삼하게 기억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존재가 아님을 말해준다. 우린 상상력을 통해 얼마든지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참된 것은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혹시 신앙도 그런 것이 아닐까?
사실 우리의 일상이란 낯익은 사람이나 사물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런 일상과 관습을 벗어나는 것이 때로는 우리 영혼에게 유익하다. 여행을 가더라도 고향이 아니라, 낯선 객지에 머물면서 낯선 타인을 만나는 낯선 자기 얼굴을 확인해 보면 어떨까?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산문을 보고,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려운 철학책 한 권 구해서 머리를 끙끙거리며 읽어볼 필요가 있다. 장사하는 사람은 도 닦는 스님이나 수도자들의 영적 일기 같은 걸 훔쳐보고, 영적 온실 속에서 살고 있는 수도자들은 권력과 무력한 자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재판정에 가서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어둠이 그저 캄캄한 먹빛만이 아니듯 세상엔 어쩔 수 없이 죄짓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 어떤 도덕적 명제도 인간의 생존권 앞에서는 그 빛을 잃기 십상이라는 것, 입장을 바꾸어 놓고 남의 처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것, 내가 웃고 있는 동안에 더 많은 이들이 울고 있다는 것, 내가 오늘 하루 속편히 먹고 자고 입는 동안에도 지구 어느 한쪽에선 굶고 헐벗으며 번민으로 꼬박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어쩌면 지금 나의 생각들조차도 대부분 선입관일지도 모른다는 것, 영혼 밑바닥에서 갈망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이 정해놓은 관습에 따라 허깨비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