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이런 예수를 만났다 ... 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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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이런 예수를 만났다 ... 교회는?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11.04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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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됨의 여정-1 /예수-1

사람이신 하느님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내려와 머물며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그리하면 그들은 야훼가 저희의 하느님임을 알리라“(탈출 29,45-46).

머문다는 것”, 어떤 특별한 장소에서의 하느님 현존은 곧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특별한 관계 양식을 암시한다.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요한 1,14)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살을 취하신 하느님은 사람들 가운데 계신다. 하느님의 이러한 현존 양식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지 규정한다.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며, 그의 속성들은 무엇이며 등등의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교리를 전하지 않는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요한 14,8-10).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아는데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통해 계시된 것이었다.

 

사진출처=영화 [Last Days in the Desert](2015)
사진출처=영화 [Last Days in the Desert](2015)

예수의 삶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요한 3,3).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의 행위는 추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규정된 행위나 공식적인 신앙고백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생명-삶은 언제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생명에로 일깨워지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궁극적으로 믿음이란 앎이다. 복음서는 이러한 “앎”에 대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품안에 계시는 외아들, 하느님이신 그분이 알려 주셨다.”(1,18)

예수를 안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를 안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

예수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랑의 움직임, 그 과정을 아는 것이다. 예수가 바로 그 과정의 핵심이며,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예수는 자유롭게 사셨다.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관습과 법으로부터의 예수의 자유로움은 거짓과 위선,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느님의 백성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는 억압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 예수 삶의 전부였다.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요한 4,34)

예수가 행한 <일>의 목적은 생명을 주는 것, 곧 사람들을 일으키고 살리는데 있다. 예수의 <일>은 부활의 행위이며, 사람들을 약함과 악으로부터 힘과 선에로 해방시키는 생명의 행위들이다.

예수는 종교적 경신행위를 하지 않았다. 예수는 종교적 의식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었고, 자신을 향한 어떠한 숭배의 말이나 경신행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가 원한 것은 종교적 경신행위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그의 길을 뒤따르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자신의 사명을 이어받아 계속 수행하며, 그의 삶을 본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종종 “아빠”라고 불렀다.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전례적이거나 제사적인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바치는 유일한 제사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특별한 사명의 실천이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실천, 완수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께 순종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그의 순종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침으로써가 아니라, 갈릴래아의 길가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기적을 행하고, 아버지를 증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파견되었다. 그 영광은 곧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요한 20,31)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인간생명, 삶의 충만함에 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요약이며 핵심이다. 예수는 생명을 가르쳤다. 그 생명은 이웃사랑과 진리에로 다가가는 길을 막고 있는 모든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사람되심은 ‘하느님의 일’의 절정이며, 그분의 영광은 거기서 드러났다. 그러나 그 영광은 오직 비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천대받고 억눌린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아채고 누릴 수 있는 십자가의 영광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누려야 할 영광 역시 스승의 그것과 같아야 했다. 가난과 고난과 십자가의 영광. 역사 속에서 오늘날까지 누려온 교회의 영광은 예수의 그것인가? 

 

예수의 교회

“만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당신이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예수는 끝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예수는 권력과 손잡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예수는 길고도 험난한 길을 택했다. 그 길은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야훼의 종이 걸어야 할 수난의 길이었다. 

예수가 겪어야했던 악마의 유혹은 바로 오늘날 교회가 늘 겪고 있는 유혹이다. 예수가 권력의 유혹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했으니, 예수의 교회 역시 권력의 유혹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해야만 한다. 예수가 야훼의 종이였듯이 교회도 역시 하느님의 종이어야만 한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날 교회 현실을 둘러보면, 교회는 하느님의 일을 제쳐 놓은채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 자신들의 “작은 왕국”을 세우기 위해 분주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교회 스스로가 예수의 교회라고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처럼 종으로서의 교회가 되어 그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교회가 야훼의 종의 길을 뒤따르지 않고 세상의 권력과 손잡고 권력행사에 맛들인다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반석”(주춧돌)이 아니라 “걸림돌”(스캔들)이 되고 말 것이다.

교회는 종인 그리스도를 따라 종으로서의 교회, 섬기는 자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종으로서의 교회 안에서 권위의 행사란 보다 철저한 섬김과 봉사를 의미한다. 교회 안에도 권위와 위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권위나 위계는 제도나 오로지 사람들, 특히 작은 사람들을 위한 섬김과 봉사의 정도에 따라 그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을 뿐이다. 교회가 사람들-특히 작은 사람들-보다는 교회의 권위나 제도들을 우선적으로 옹호해야 할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면, 교회는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

세상 모든이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나되기 위한 사랑, 특히 예수 스스로가 자신과 동일시했던 “작은 자”를 향한 넘치는 사랑의 힘만이 교회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여받은 유일한 권위요 능력이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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