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때마침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서울을 탈출하였다. 서울에서 경북 예천으로, 예천에서 전북 무주로, 무주에서 경북 경주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가 고양시 일산으로, 조만간 일산에서 파주로 이사할 예정이다. 사는 곳이 바뀌면 생활양식도 달라지고, 생활양식이 바뀌면 만나는 사람도 바뀌고, 만나는 사람이 바뀌면 세계관과 인생관도 조금씩 다른 색채를 띠고 반짝거린다.
서울에서 노동운동과 천주교 사회운동에 참여할 때는 ‘사회적 실천’이 중요했는데, 무주와 경주에서 보낸 십 년 동안에는 ‘마음공부’에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시늉만 할뿐 닦인 마음 구석이 별로 없는 게 서운하지만 말이다. 산촌에 살면 참 묘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내가 살던 무주군 안성면 광대정은 귀농자들이 모여 사는 이른바 ‘생태마을’이었다. 우리같은 소농들이 유기농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개 ‘마음공부’를 한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서 자잘한 행복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동네엔 으레 ‘도사연’(道士然) 하는 분들이 이따금 찾아온다. 집터도 봐주고, 생약도 가르쳐주고, 좌선도 한다. 이러한 기운에 따라 살다보니, 자연스레 ‘표현예술심리치료’ 공부도 하게 되었다. 마음자리를 제대로 살펴 인생을 구하고 세상도 바꾸자는 거다. 본래 그림이나 사진 등 시각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선뜻 공부에 나설 수 있었다. 십년 만에 다시 서울에 와서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을 거쳐 지금은 <가톨릭일꾼>에서 일하고 있는데, 최근에 텃밭이지만 버릇처럼 다시 농사일을 조금 하고 있다. 마침 도시농부에서 허락된 텃밭이 파주에 있어서, 아예 집도 근처로 옮길 예정이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 살면서, 앞으로 내게 무슨 일이 전개될지 궁금하다.
<피터 래빗>(The tale of Peter Rabbit)이라는 동화책을 쓰고 그린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 1866-1943)의 인생역정이 그러했다. 균류 학자에서 화가이며 동화작가로, 다시 농부로 환경론자로 변신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전이(轉移)였다. 인생이라는 놀이터에서 베아트릭스는 때로는 토끼 래빗이 되고, 때로는 꼬마돼지 로빈슨이 되기도 한다. 엄마의 주의를 귓전으로 듣고 발랄하게 뛰어노는 래빗이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쾌한 토끼였듯이, 세상은 사실상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자연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경탄하는 마음으로, 나는 베아트릭스를 부러워한다.
숲에는 신비롭고 선한 종족이 산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1866년 런던에서 태어나, 사우스 켄싱턴의 볼턴가든스에서 부모와 47년을 살다가 잉글랜드 북부 레이크 디스트릭스 삶의 자리를 옮겼다. 친가와 외가 모두 직물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아 집은 부유했다. 아버지 루퍼트 포터(Rupert William Potter)는 변호사였는데, 실제 변론을 맡는 것보다 당대의 저명한 정치인, 작가, 예술가들과 교제하는 생활을 즐겼다. 베아트릭스는 어려서부터 집안 세간이나 시골풍경을 관찰하는 데 탁월했다. 가족들은 봄에는 두 주 정도, 여름이면 석 달씩 집을 비우고 외가와 친가로 휴가를 떠났다. 베아트릭스는 시골의 친척집을 찾을 때마다 제 느낌을 기록하고, 집안의 공간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스케치하고, 동식물과 화석의 세밀화를 그렸다.
베아트릭스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곳은 조부모가 살던 캠필드 플레이스였다. 그 집은 “적당한 크기에 작은 방들로 나뉘져 있고 장식이 요란하지 않은 낡은 집이었으며, 바깥에는 붉은 벽돌에 회반죽을 발랐다.” 300에이커의 터에 “산울타리마다 줄지어 선 나무들, 멀리 농가 마당에서 들려오는 소리, 여름이면 갓 베어낸 풀 냄새가 진동했다.”고 말한다. 이 집에 올 때마다 베아트릭스는 늘 네 번째 방에서 잠을 자고 놀이방을 들락거렸는데, 그녀에게 오래된 공간과 잘 가꾼 마당은 충만함과 만족감을 주었다.
아홉 살 때 ‘배추벌레 열두 마리’를 그리면서, 다음 장에 꼼꼼하게 기록해 놓은 배추벌레의 습성은 이러했다. “배추벌레는 짙은 갈색에 오렌지색 점이 찍혀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꽃이 핀 쐐기풀을 먹는 것 같다. 5월과 6월에 울타리 부근에서 많이 보인다. 누에나방의 애벌레같이 생겼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경이로웠다. 문으로 스며드는 빛줄기와 활활 타오르는 난롯불의 따사로운 광채에 매료되었으며, 그것들로 스케치북을 가득 채웠다. 가족여행은 이처럼 평생토록 이어질 베아트릭스의 시골생활에 대한 애정과 이해와 토대가 되었다. 주로 스코틀랜드를 많이 찾았는데, 던켈드의 달가이즈에 갔을 때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숲에는 신비롭고 선한 종족이 산다. ... 이 지역의 미신을 은근히 받아들이면서 내 속의 환상을 직시하면 그 존재는 실재가 된다. 나는 그런 별천지에서 살았다. ... 정령들이 잔디밭으로 나와 춤을 추고, 으스스 소름이 돋는 쏙독새 울음소리, 부엉 소리, 박쥐가 날갯짓하는 소리 너머, 저 멀리서 희미하게, 서서히 다가오는 여름밤의 산들바람 소리는 별세계의 음악이었다.”(<베아트릭스 포터의 집>, 수전 데니어, 갈라파고스, 2010, 22-23쪽)
그녀가 가본 곳 가운데 최고는 크고 작은 호수와 산으로 둘러싸인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였다. 여기서 베아트릭스는 스케치를 하고 화석이나 버섯을 찾아 다녔다. ‘노부인’이라고 불렀던 말이 끄는 이륜마차를 몰고 근사하게 모퉁이를 돌며 좁은 길을 달리기도 했다. “나는 구불구불한 집이 좋다.” 하는 말 속에 그녀의 인생관이 엿보인다. 직선적인 도시와 고속도로의 상징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녀는 레이 캐슬에서 일하는 사람은 물론, 레이 톡 하우 농장에 사는 포시트 가족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들에 대한 관찰기록도 남겼다. 혹스헤드 인근의 낡은 집에 사는 노부인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할머니였다. 둥글게 만 머리에 큼직하니 검은 두건과 안경을 쓰고 앞치마를 둘렀으며, 당신의 몸보다도 긴 갈퀴를 들고 있는 모습이 다리는 아예 없는 것 같았다. 동화 속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 같았다.”고 했다.
피터 래빗이 사는 집
글재주에 그림 솜씨까지 겸비한 베아트릭스는 1890년에 친척인 헨리 로스코의 격려에 힘입어, 애완 토끼인 벤저민 바운서를 모델로 삼아 사람처럼 옷을 입힌 토끼 그림 여섯 점을 당시 대표적인 카드회사였던 힐데샤이머 앤 포크너(hildesheimer & Faulkner)에 보냈다. 그림은 크리스마스 카드로 제작되어 6파운드에 팔렸다. 이즈음 의인화한 동물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그녀는 <토끼들의 크리스마스> 연작을 그리고, <물레 앞의 생쥐 세 마리>같은 동요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베아트릭스가 본격적인 그림 작가로 나서는 데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1897년 베아트릭스는 야생 버섯에 대한 관찰과 연구를 통해, 버섯 같은 균류 중 특정한 종류는 발아하기 위해 다른 생물과 공생관계를 이룬다는 이론을 밝힌 논문 <On the Germination of the Spores of the Agaricineae>를 완성해 린네 학회에 제출했다. 린네 학회는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의 이름을 따 1788년 설립된 권위 있는 분류학 전문 학회였다. 그런데 베아트릭스의 논문은 여성이 썼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 베아트릭스는 논문을 작성하면서, 다양한 버섯 샘플은 물론, 방대한 양의 버섯 세밀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들을 아까워한 동료들의 권유로 베아트릭스는 이 버섯 삽화들을 아르티트 박물관(Armitt Museum)에 모두 기증했다. 이 그림들은 1967년 균류학자 핀들레이(W.P.K. Findlay)가 <도로변과 숲 속의 버섯>(Wayside & Woodland Fungi)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여기에 실리게 되었다. 정작 베아트릭스의 논문은 푸대접을 받다가, 100년이 지난 1997년에야 린네 학회가 “성차별적인 시선으로 말미암아 논문과 연구를 평가절하 했음”을 인정했다.
학자로서 좌절된 꿈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결실을 맺었다. 동화 <피터 래빗>의 성공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베아트릭스는 1893년 스코틀랜드에 머물 때 예전에 가정교사였던 애니 무어(Annie Carter Moore)의 병약한 아들 노엘(Noel Moore)에게 그림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노엘에게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네 마리 토끼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단다. 그 토끼 이름은 플롭시(Flopsy), 몹시(Mopsy), 코튼테일(Cottontail), 그리고 피터(Peter)야.” 이 편지는 계속 이어졌고, 이 그림 편지를 실마리로 장난꾸러기 토끼 네 마리 이야기를 지어냈다. 당시 하드윅 론슬리(Canon Hardwicke Drummond Rawnsley) 목사의 도움으로 여러 출판사에 의사를 타진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결국 1901년에 자비로 만든 250권을 만들었는데, 이게 2주 만에 동이 나면서 1902년 정식으로 출판을 하게 되었다.
고급판형으로 컬러판 책을 인쇄했는데, 이미 소문이 나서 선주문이 8000권에 달했다. 날개돋힌 듯이 팔려나간 <피터 래빗>은 그해에만 5만부나 나갔다. 원 판본은 소책자 크기였는데, 이것은 작가가 책값을 내려서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이것은 베아트릭스가 동화 작가이자 화가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1905년 <피터 래빗 이야기>(1902), <다람쥐 넛킨 이야기>(The Tale of Squirrel Nutkin, 1903), <글로스터의 재봉사>(The Tale of Gloucester, 1903), <벤저민 버니 이야기>(The Tale of Benjamin Bunny, 1904), <말썽꾸러기 쥐 두 마리 이야기>(The Tale of Two Bad Mice, 1904), <파이와 파이틀 이야기>(The Tale of the Pie and the Patty-Pan, 1905) 등 여섯 권이나 그렸다.
이 동화에서 어린 시절에 베아트릭스가 좋아했던 공간은 동물들이 사는 환상적인 배경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녀의 그림에서 공간의 중심이 되는 벽난로, 쾌종시계, 참나무 가구, 좁다란 복도 등이 그것이다. 어린 베아트릭스를 포근하게 안아주고 보호해 주었던 집에서 이제 그녀가 창조한 캐릭터들이 살았다.
“피터 래빗의 굴에서는 난롯불이 따듯하게 타오르고, 생쥐들은 곡식창고로 이어지는 캠필드 플레이스의 복도를 들락거리거나 곡목의자에 앉아 실을 잣기도 하며, 아늑한 할머니 침대에 늘어진 커튼 뒤로 몸을 숨긴다.”(수전 데니어, 같은 책 36쪽)
레이크 디스트릭트 대자연에 정착하다
작은 그림책들이 잘 팔리면서, 인세와 유산 일부를 더해서 베아트릭스는 1905년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작은 농가를 구입했다. 힐 탑 농장을 구입하고, 4년 후에 캐슬 농장도 구입했다. 처음엔 런던의 집과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휴양지를 왕복하며 지냈다. 하지만 1913년 자신의 부동산 거래를 도와주던 변호사 윌리엄 힐리스(William Heelis)와 결혼하면서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아예 정착했다. 그녀는 먼저 동화 속에서 공간을 꾸미던 섬세한 감각과 손길로 힐 탑의 농가를 꾸미기 시작했다. 책속에서 동물들에게 안락함과 영안함을 주던 인테리어는 이제 현실 속에서 그 멋진 공간을 만들어갔다. 베아트릭스는 어딜 가든 그 집에서 영감을 얻고, 기억에 남아 있는 풍경을 스케치 하였고, 그걸 다시 힐 탑에 구현하였다.
그후 나이가 들면서 베아트릭스는 시력이 나빠져 예전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었지만,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시골에 살면서 농부가 되기를 꿈꾸고, 이윽고 자신이 사랑하던 땅이 개발 앞에서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행동하게 되었다. 1912년 윈더미어 동쪽 연안에 비행정(飛行艇) 공장이 들어선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그렇게 허술한 그림 같은 배에 기우뚱 거리는 수레와 요란한 모터를 묵직하게 싣고, 심지어 참나무 껍질을 위태롭게 쌓아올린 데다 돼지 사료, 양과 소 떼까지 태우고서 호수를 건널 경우에, 가축에게 위험과 불안을 초래할뿐더러 금전적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녀는 수상 비행기의 소음을 “수백만 마리의 금파리에 증기 탈곡기를 더한 것”에 비유한 항의서한을 <컨트리 라이프>(Country Life)에 기고했다. 베아트릭스는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을 아는 편집자들에게 ‘베아트릭스 포터’라고 서명하고, 현지인이나 농업계통의 사람들에게는 ‘H.B. 포터, 농부’라고 서명한 편지를 띄웠다. 결국 이런 노력으로 공장 폐쇄가 결정되었다.
그녀는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나 존 러스킨(John Ruskin) 같은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사는 유명인사들과 더불어 자신이 ‘제2의 고향’으로 선택한 땅을 ‘도시에서 온 뜨내기’들이 파괴하지 못하게 막는데 헌신했다. 19세기 말에 이르자 봇물 터지듯 몰려오는 관광객들의 수요에 따라 개발업자들이 이 지역에 밀려 들어왔다. 이 때문에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호텔과 빌라, 비행기 공장과 수많은 신축공사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개발을 저지하고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베아트릭스의 노력은 1895년에 설립된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의 활동과 연결되었다.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이나 기부, 증여를 통해 보존 가치가 높은 자연자원과 문화자산을 확보하여 시민의 소유로 영구히 보전하고 관리하려는 환경운동이다. 산업혁명으로 급격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서 유적 파괴와 자연훼손이 뒤따랐다. 그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의 변호사 로버트 헌터(Sir Robert Hunter), 여류 사회활동가 옥타비아 힐(Octavia Hill), 그리고 베아트릭스가 <피터 래빗>을 출판하도록 도왔던 캐넌 하드윅 론슬리 목사가 앞장섰던 운동이다. 내셔널 트러스트가 확보한 시민유산은 양도불능의 원칙에 따라 영구 보전이 가능하다.
1923년에 17세기의 멋진 농가 주택과 헛간이 부속건물로 달려 있으며 주변풍광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1,500에이커에 달하는 트라우트벡 파크 농장이 매물로 나왔을 때, 개발업자가 나서기 전에 베아트릭스가 스물다섯 권의 그림책 인세수입으로 그 자리에서 구입해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한다는 유서를 작성했다. 1927년에는 콕숏 포인트가 개발 위기에 처하자 보스턴에 있는 친구들에게 피터 래빗 원화를 다시 그려 선물로 보내면서 기부금을 요청했다.
대대손손 이어질 아름다운 세계를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1939년 일흔셋이 된 베아트릭스는 노익장을 드러내며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늙었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느려지기는 했어도 경험과 무게를 선물 받았다. ...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볼 수 있는 눈을 지녔으니 감사할 일’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고원과 황무지를 한 발 한 발 디디며, 내 늙은 다리로는 두 번 다시 거닐지 못할 그곳의 돌과 꽃, 습지와 황새풀을 하나도 빠짐없이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무수한 젊은 백치들보다 훨씬 현명하다는 건 기꺼운 일 아닌가.”(수전 데니어, 같은 책 203쪽)
아직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3년 12월 22일 캐슬 코티지에서 이승을 떠난 베아트릭스 포터는 블랙풀에서 화장해, 유해는 니어 소리 위쪽의 고원에 뿌려졌다. 그녀는 죽기 얼마 전에 앤 캐롤 무어에게 “전세(戰勢)의 방향이 바뀌고 있는 게 분명해. 우리는 맑고 화창한 날을 즐기고 있어. 언덕에는 눈이 쌓였어. 여기서는 다행히 건초를 일찍 만들고, 귀리 농사도 나쁘지 않아. 밖에 오래 나가 있었지만 아주 유익했어.”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가 이미 뼛속까지 농부의 마음을 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베아트릭스는 열네 곳의 농장과 스무 채의 집을 포함해서 4,049에이커의 땅을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다만 동화책의 배경이 되었던 힐 탑 농가는 세를 주지 말고, 모든 방을 그녀가 정리해 놓은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한편 남편인 윌리엄 힐리스는 베아트릭스 사후 2년 후인 1945년 8월 4일에 이승을 떠났다. 윌리엄 역시 유서를 통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하였고, 혹스 헤드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은 현재 베아트릭스 포터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다.
[주 참고 서적] <피터 래빗의 어머니 베아트릭스 포터의 집>, 수전 데니어, 갈라파고스, 2010
[출처] <가톨릭평론> 2019년 9-10월호 원고 수정보완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