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병약했던 나는 집안 형편상 병원엔 자주 들르지 못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6년 동안 단 한 번도 주일학교를 빼먹지 않았고, 마침내 학교에서도 받지 못한 6년 개근상을 성당에서 받았다. 그 당시 내 꿈은 당연히 선생님이거나 신부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 성당에서나 학교에서나 모범생 딱지를 붙이고 싶어했다. 적어도 말썽꾼 소리는 듣지 않아야 했다.
무사히 그리고 당연하게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하자 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무리 없이 대학에도 들어가고,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병역의무도 마치고 무사히 대학 졸업장도 받을 수 있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런 방식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면 취직해서 돈을 벌고, 돈을 벌어 결혼하고, 결혼해서 자식 낳고, 자식 낳아서 키워놓으면 험하게 말해서 인생 종치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차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이런 삶도 한 번쯤 겪어볼 가치가 있겠다. 어차피 세상이란 선남선녀들의 삶으로 지탱되고 있으니 말이다. 초록빛 행성인 지구는 사소한 욕심을 부리면서도 작은 행복을 찾는 이런 사람들로 채워져 있으며 간혹 험상궂은 사내들의 주먹다짐과 폭력이 ‘사회정의’ 또는 ‘국가’나 ‘권력’의 이름 아래 잔잔한 지구의 질서를 아수라장으로 흔들어 놓곤 하지만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제 성깔만 조금씩 눅여준다면 세상은 한도 많지만 작은 기쁨도 구석구석 배어 있는 그런대로 견딜 만한 공간이라 생각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좀 생뚱맞은 요청 속에 산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는 것’ 그 자체에 몰두하기 마련인데,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인연을 따라가는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들 잘 건사하면 족하다고 은연중 신념을 다지고 있다. 그러나 신앙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명이 있음을 자꾸 상기시킨다. 그저 사는 걸 넘어서는 사뭇 다른 천명(天命)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 천명 때문에 세상이 가르치는 질서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로마 식민지 시대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는 신자들이 국민의 의무였던 황제숭배를 거부했으며, 황제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공무원이나 군인신분을 포기해야 했다. 로마에 역병이 돌자 그들만이 남아서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 시대의 주류적 흐름과 상식을 거부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일탈(逸脫) 행위이며, 일반사회에 편입되기를 꺼리고 오히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만을 고집하는 태도이자 사랑의 행위였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살고자 소망했던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때로는 집도 절도 다 버리고 가족과 친지들을 떠나야 했으며,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한 사랑에 몸을 맡겼다. 하느님 앞에서 기존의 것들을 모두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곧 신앙이다. 어찌 보면 영웅적 행위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실상 복음서 전편에 흐르는 맥락이 하느님과 마몬(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진언(眞言)이다. 때로는 기성질서를 떠남이 곧 하느님께 귀의하는 것임을 조금만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어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언젠가 잡지에 이런 경험담이 실린 적이 있었다. 아이가 아파서 급하게 병원신세를 져야 했는데 진료비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느 신자가 치료비를 대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 목숨이 더 귀하다면서 그분이 전셋방을 빼어 돈을 대준 것이라 한다. 자기 전세금을 빼 사글세로 이사하면서까지 이웃을 도와준다는 것이 요즘 같은 자본 중심·가족 중심 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사소한 곳에서부터 기적을 발생시키는 것이 신앙이 아닌가. 상식을 벗어난 곳에서 우리의 숨통이 열린다. 다들 그렇지만 ‘그럼에도’ 일탈적 행위를 감행하는 게 신앙이다.
나의 경우에도 부모님의 입장에선 일탈로 비추어졌을지 모른다. 대학에 들어가선 밤낮 데모한다고 쏘다니고, 월급 아닌 활동비 받아서 살아야 하는 단체에 들어가질 않나, 공장에 취직했다가 결혼하면 철들까 했더니 노동사목에서 일한다 하고, 내내 운동단체 언저리를 배회하는 아들이었다. 집안에선 돌연변이로 취급받았는데, 이젠 어떤 행동을 취해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다. 몇 년 전 산골에 들어가 농사를 짓겠노라고 했을 때도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오히려 시골에 정착해서 집도 사고 땅도 사고 벼농사에 고추농사까지 하니까 오히려 반기는 기색이다. 그나마 자리잡고 사는 게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부처님도 한 나무 아래서 하루 이상 머물지 말랬다고,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른 행장(行裝)을 꾸리게 될지 모른다. 그래도 한 10년은 이곳 무주땅에서 농사를 지어볼 심산이다. 하나밖에 없는 인생이기에 바닥 깊은 곳까지 내려가고 싶고, 넓은 곳에서 목숨을 누리고 싶다. 상식이 정해놓은 행복의 기준에서 벗어나 내 영혼의 바람대로 물처럼 구름처럼 흐르다 보면 머물 곳도 생기고 떠날 곳도 생길 것이다. 그리고 마침표는 헤아릴 길 없는 하느님께서 정해주실 것을 믿는다.
나는 만사에 일탈을 꿈꾸는 아웃사이더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고 싶었다. 마음처럼 늘 몸이 따라와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보다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들판에 서서 별을 바라보는 것은 거룩한 나의 과업’이라고 노래했던 시인 신석정의 선언처럼 좀 다른 차원의 천명을 따라서 살고 싶다. 김중식 시인이 ‘이탈한 자가 문득’이라는 시편에서 이렇게 읊조렸듯이 말이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별똥별의 위태로움을 사는 것, 연습이 있을 리 없는 생애를 남김없이 주저없이 천명에 거는 삶은 어떨까? 물론 선택한 만큼 후회도 없어야 하겠다. 예전에 원주에 다니러 가서 어느 어른께 글씨를 부탁드린 적이 있다. 내가 원했던 것은 한글로 ‘지상에서 천국처럼’이었는데 그분은 한문으로 써주었다. ‘생지여천국(生地如天國)’, 곧 땅에서 살기를 천국처럼 하라는 말씀이었다. 새기고 새겨 들을 만한 멋진 말씀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