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법: 회당에서 내몰린 자의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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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법: 회당에서 내몰린 자의 시선으로
  • 김진호
  • 승인 2019.07.1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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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와 적대한 뒤, 갈릴래아 촌락 ‘밖’에서―떠돌이 예언자들-1

촌락회당 안에서 예수는 바리사이와 충돌하였다. 그 결정적인 사건은 ‘안식일’을 둘러싼 갈등이다. 바리사이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가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것이고, 예수의 관점에서 보면 바리사이가 안식일을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은 대개 그 사회의 존속을 위한 공공적 필요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준수하게 하려면 보상과 체벌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공공적 필요’란 법 제정의 동기이고, ‘보상과 체벌’은 그것의 결과다. 그러니까 이상적인 것은 법 적용에 따른 보상과 체벌이 그것의 제정 동기에 부합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법이 적용될 때마다 제정 동기에 부합하는지 물을 수는 없다.

법 자체로 보상과 체벌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여 법은 그것의 배경이 되는 역사로부터 탈출하여 보편적 지위를 주장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법의 정신 운운하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모호한 요소보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내용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법은 그 제정의 정신을 넘어서 적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여 특정 법을 둘러싸고 제정의 정신과 그 적용 사이의 관계가 적절한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이러한 논쟁은 그 법을 매우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반대로 그런 논쟁이 불온시되면 법은 그 건강성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나의 논지는 예수와 바리사이 간의 안식일법을 둘러싼 논쟁이 바로 그런 양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안식일법의 유래

우선 안식일법 제정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안식일 전승이 언제부터 어떤 이들에 의해 유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먼저 살펴볼 것은 〈열왕기하〉 4,23이다. 이것은 기원전 9세기 초의 예언자 엘리사에 관한 전승으로 되어 있는데, 어쩌면 그보다 반세기 앞선 엘리야 예언자의 전승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여기서 한 여인의 아들이 돌연사하자 그녀가 서둘러 예언자를 찾아 나선다. 한데 그녀의 남편은 안식일도 아닌데 그이에게 어떻게 찾아가려느냐고 묻는다. 이는 안식일이 예언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상황이 전제되고 있다. 그것은 그날에 큰 제사가 수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관행이 유다국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는 안식일에 거행되는 제사의 허례허식에 대해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이사, 1,13)

이 두 텍스트를 통해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국과 유다국에서 안식일마다 제의가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엘리사 설화에서 볼 수 있듯 그것은 일상과 깊게 얽힌 종교성이었다. 사람들은 난데없이 일어나는 일상의 위기를 견뎌내기 위해 일년에 겨우 몇 번 오는 명절보다는 7일마다 오는 안식일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한데 기원전 7세기 초 유다국에서 안식일법이 제정되었다. 그때는 요시야 왕 시절이다. 〈신명기〉 5,12~15이 이때 제정된 안식일법의 조문을 반영한다. 하지만 〈신명기〉의 안식일법보다 더 오래된 안식일법이 있었다. 〈탈출기〉 20,8~11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계약법전’(Covenant Code)이라고 부르는, 성서의 법전중 가장 오래된 법문서에 수록된 십계명의 일부로 안식일법이 들어와 있다. 이 법전은 아마도 이스라엘국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국에서 먼저 안식일법이 제정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후에 유다국에서도 안식일법이 제정되었다는 얘기다. 아마도 요시야 왕실은 이스라엘국의 ‘계약법전’을 입수하여 그것을 참조하면서 독자적인 법전인 신명기법전(the Deuteronomic code)을 편찬했다는 얘기다.

안식일법 제정의 정신

다음 도표는 두 법전의 안식일법을 비교한 것이다.

위에서 보듯 두 안식일법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안식일에는 반드시 쉬어야 한다. 쉼을 누리는 대상은 집주인, 자녀, 종, 가축, 그리고 식객(the foreigner that is within your gates)이고, 그런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이는 집주인이다.

한데 두 안식일법에서 다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법 제정의 동기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탈출기〉는 창조 때에 하느님이 쉬었으니 모두 그날엔 쉬라고 하는 데 비해 〈신명기〉는 출애굽 때에 하느님이 구출해 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쉬라고 한다. 전자는 쉼 자체가 우주의 질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면, 후자는 해방받은 것을 기념하는 쉼이다. 아마도 요시야 개혁의 주체세력은 안식일의 쉼이 일종의 ‘구원을 상징하는 가상적 체험’임을 명시하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안식을 실행하는 주체와 안식을 누리는 대상에 관한 내용은 일치하지만, 안식에 관한 철학, 그 법 제정의 정신은 다르다.

사제 중심주의

이러한 안식일법은 안식일 제사가 이스라엘국과 유다국에서 널리 거행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대중의 일상 깊게 스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관행대로 그날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땅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쉼의 날이 되게 하라고 한다. 여기서 제사와 노동금지는 어떻게 연관되는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날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안식일 제사는 여전히 중요한 행사였을 것이다. 여기에 안식일법은 그날은 제사를 드릴 뿐 아니라 노동을 멈추고 쉬는 날임을 명시한 것이다.

한편 식민지 재건공동체 시대의 안식일법에서는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는 요소가 사라지고 제사만이 강조된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반드시 쉬어야 하는 안식일이다. 거룩한 모임을 열어야 하고,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날은 너희가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지킬 주의 안식일이다."(레위 23,3)

계약법전, 신명기법전 등과 아울러 3대법전이라고 불리는 ‘성결법전’(Code of Hollness)의 안식일 규정이다. 성결법전은 식민지 재건공동체 후기의 법문서다. 이때 유다재건사회는 사제 중심의 귀족과두체제의 사회였다. 사제가 중심인 사회니 제사가 중요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쉼’은 추상화되고,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는 구체적 규정은 사라졌다. 오히려 ‘쉼’의 의미가 ‘고행’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 날은 너희가 엄격하게 지켜야 할 안식일이다. 너희가 스스로 고행을 하는 날이다.”(〈레위기〉 16,31)

한데 사제중심사회라는 얘기는 중앙의 사제귀족의 권력이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중앙성전의 위상이 압도적으로 높아졌고 지방성전의 위상을 추락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과거 군주국 유다 시대의 요시야 개혁의 슬로건인 중앙성전 중심주의가 이 시대에 와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작동하자, 지방성소는 우상숭배의 장소로, 그러니까 폐기되어야 할 장소로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방성소에서 제사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니 실제로는 여전히 상당히 많이 수행되었을 것이다. 지배담론의 관점에서는 사교(邪敎)적 집회로 간주되었지만 적지 않은 대중은 그 제사를 통해 악령이 퍼뜨리는 재앙을 견뎌냈다.

그럼에도 중앙의 제사와 지방의 제사는 담론상 대립적이었다. 지방의 많은 사제들은 지방성소에서 벌어지는 제사의 제주(祭主)이고자 했지만, 중앙의 사제들은 지방의 사제들을 중앙성전에서 거행되는 제사에 차출되어 허드렛일 하는 하급사제가 되기를 요구했다. 하여 일부 사제들은 사교의 교주(敎主)처럼 군림했고 다른 일부의 사제들은 스스로를 하급사제로 간주하며 중앙권력에 귀속되었다.

이렇게 사제중심적 사회로의 변화는 대중의 일상 속에서 안식일 제사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되었다. 7일마다 거행되는 제사보다는 중앙성전에서 벌어지는 연중행사가 강조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만 중앙의 관점이다. 대중은 여전히 일상을 덮치는 악령의 마수를 견뎌내야 했다. 그래서 지방의 사교화된 제사가 여전히 소비되기도 했지만, 또 다른 구원의 장치가 필요했다. 문제는 7일마다 돌아오는 구원의 장치를 재가동되는 동력이 무엇인가였다.

문자혁명과 바리사이

여기서 우리는 ‘글’을 주목하게 된다. 과거 글은 중앙정치세력이 탄탄한 정치경제적 기반을 갖추었을 때 활용된다. 저장성(Storage capacity)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글’이라는 매체는 왕을 까마득하게 먼 조상, 심지어 신과 연계시킬 수 있는 탁월한 도구였다. 해서 글을 통해 왕은 신에 준하는 막강한 위상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글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데 있다. 즉 백성이 철저히 탈주체화된 사회에서 글이 통치의 주된 도구였다.

한데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사회에도 문자혁명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은 우선 상형문자가 아니라 알파벳문자가 널리 활용되는 시대와 맞물린다. 대표적인 것이 아람어와 헬라어다. 시리아 지역어의 국제화된 버전으로서의 아람어의 대두가 페르시아 제국의 정치경제와 관련이 있다면, 그리스 지역어의 국제화된 버전으로서의 헬라어의 대두는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후계자들의 제국들(헬레니즘제국들)의 정치경제와 관련이 있다. 지난 1강과 2강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시대에 특히 민간서기관들이 대거 등장하여 문자의 대중화를 추동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대중을 등에 업고 중앙정치에 진출하여 개혁정치를 펴는 일이 잦았다.

유다국의 요시야 개혁도 문자를 정치에 활용했고 대중을 등에 업은 개혁정권이긴 했지만, 이때 글이 대중정치의 장치로 작동했는지는 잘 입증되지 않는다. 하지만 페르시아와 헬레니즘 시대에 대중을 추동한 문자계층의 등장을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묵시문학이나 지혜문학(〈잠언〉 〈전도서〉 등), 그리고 통속소설(〈욥기〉 〈에스더기〉 〈룻기〉 등)은 문자가 대중과 소통하는 데 일련의 역할을 했던 흔적들이다.

비록 대중은 글을 읽지 못했지만 글을 읽는 이가 대중에게 낭송의 형식으로 들려주곤 함으로써 글의 소비자가 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 억울한 일이 있어 재판을 받을 때 민간서기관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과거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확장된 국제교역 과정에 일정한 역할을 부여받은 이들도 거래장부를 위해 민간서기관의 도움을 받았다. 아무튼 글은 읽든 읽지 못하든 놀라울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이때 대중사회에서 글이 종교성을 표현하는 새로운 도구가 되기도 한다. 마치 동물 같은 형상이 종교적 상징이 되듯 글자가 종교가 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대중과 가까이 있는 문자계층이 대중의 지도자가 되는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데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에서 이런 이들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이 ‘바리사이’(φαριαιος)였다. 그들은 아직 어떤 강령을 가진 종파집단이 아니었지만, 촌락사회에 대중을 이끄는 계층적 주체였다.

여기서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레위기〉의 안식일 규정의 ‘거룩한 모임’(qodes miqra, holy convocation)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게 된다. 안식일을 지키는 데서 제사가 중요해졌던 시대의 산물이라고 했다. 해서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는 사회적 함의는 안식일에서 사라졌다. 대신 추상적인 표현으로서 ‘쉼’이 강조되었다.

안식일과 촌락회당의 권력 강화

그런데 제사가 중요해졌지만, 중앙의 제사가 부상한 만큼 일상의 영역에서 안식일이 구원의 장치로 작동되는 새로운 양식이 요청되었다고 했다. 〈레위기〉의 구성주체인 엘리트 사제들은 안식일에 ‘거룩한 모임’을 제사를 대신하는 구원의 장치를 만들려 했다. 하지만 아직 그것은 모호했다. 그 모임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지, 누가 할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한데 점차 그 자리에 촌락회당(συναγωγή)이 들어섰다. 그리고 점차 그곳을 바리사이 같은, 소자산가적 대중엘리트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바리사이들들에게서 안식일 신앙은 다시 재동력화되었다. 이때 그 새로운 구동 장치가 바로 ‘글’이었다. 율법으로 해석된 다섯 권의 책 ‘토라’는 대중에게는 너무 먼 텍스트였다. 그것은 이전까지는 사제들의 율법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 문자 덩어리를 일상의 계율들과 매칭시키는 가르침을 배우는 장소, 그것을 지키거나 지키지 못함으로써 보상과 체벌을 받는 것을 확인하는 장소, 그것이 바로 촌락회당이었던 것이다.

하여 극단적으로 대중은 회당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자로 나뉜다. 이때 회당 안의 사람들은 구원의 가능성 앞에 열린 죄인이다. 그것이 가능성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회당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안과 밖의 이분법은 바리사이적인 회당체제가 작동되는 데 있어 필요불가결한 요소인 것이다.

한데 예수는 그밖으로 혹은 내몰릴 자들의 시선에서 안식일 율법에 대해 묻는다. 왜 안식일은 구원의 장소가 되면 안 되는가. 특히 밖으로 내몰린/릴 이들에게 말이다. 바로 이 문제가 예수와 바리사이의 안식일 논쟁의 핵심이었다. 그것은 바리사이적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며 따라서 바리사이는, 적어도 그들의 상당수는 예수와 더 이상 공존할 수 없게 되었다.
 

김진호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의 객원컬럼리스트. 《예수역사학》 《예수의 독설》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권력과 교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반신학의 미소》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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