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트라피스트 수도승인 토머스 머튼은 오늘날 남녀의 필요에 응답하는 영성과 신비주의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글을 썼다.
그의 대표적인 책들과 논술들 안에서 머튼은 사막의 교부들,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 현대심리학, 가톨릭, 비잔틴, 개신교 신학, 동방종교, 젠, 예술, 시, 문학, 실존주의, 그리고 사회 문제들을 언급하였다. 그의 저서들은 수도적인 전통과 현시대의 관심들을 독특하게 융합한다. 머튼의 작품은 기도를 통해 영적인 모험에 대하여 몰두하고 하느님과의 일치에 열정적인 한 인간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주는 토마스 머튼의 선물은 단순한 메시지이다: 즉 거룩함과 새로운 비전의 삶 사이의 고유한 일치로 이끄는 관상적 체험은 다만 수도자들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메시지이다. 그는 말했다. “나의 소명은 아마 드물 것이다. 그러나 관상은 봉쇄 수도원의 벽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모든 사람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 안에서 그 자신도 모르게, 세상과 다른 모습과 의미를 지닌 내적인 삶을 알도록, 적당한 신비스러운 경험 안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부름을 받는다(<존경할 만한 독자>에서).
홀로 암자에서 3년 동안 살면서 이 트라피스트 수도자는 다양한 삶의 여정을 겪은 사람들,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 모두와 소통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인격적으로 그들의 가장 깊은 요구를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결코 추종자를 원하지 않았지만 토머스 머튼은 우리시대의 가장 사랑받고 가장 영향을 끼치는 영적인 스승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어린시절
토머스 머튼은 프랑스 피레네 산맥 근처에 있는 프라데스에서 1915년 1월 31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 오웬과 루쓰는 영국의 한 화가 밑에서 파리에서 같이 공부하는 중에 만났고 사랑하여 결혼했으며, 그림에 헌신하며 단순하게 살 수 있도록 프랑스 남쪽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중 가족은 미국의 롱 아일랜드로 이사했고 그의 유일한 동생인 존 폴이 태어났다.
성공적인 풍경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웬은 작품을 팔아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직장을 구했고 가족은 소박하게 살았다. 그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뉴질랜드계 성공회 교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에 따라 행동했다.
머튼은 어머니 루쓰가 그에게 가졌던 높은 기대감과 함께 아이로서 그 기대치에 맞출 수 없다는 무력감을 항상 기억하였다. 그가 6살 때 루쓰는 암으로 죽었다. 죽기 바로 직전에 그녀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편지를 썼다. 그녀의 죽음으로 그의 유년기는 무너져 버렸다. 이 비극은 어떤 강한 중심과의 끈을 느슨하게 만들었고 어린 소년을 그의 나머지 생애에 계속될 순례여행에 표류하도록 만들었다.
루쓰의 죽음 후, 오웬은 때때로 톰(토마스)을 그의 그림 여행에 데려갔다. 한번은 그들이 지방도시 케이프 코드에 갔을 때, 톰은 범선 부두에서 놀았다. 버뮤다에 가서 일곱살 난 소년은 그 섬과 바다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빠졌다. 공동적 상실 때문에 가까워진 아버지와 아들은 이런 여행들을 하면서 특별한 친밀감을 나누었다.
여행에서 돌아 온 후, 톰과 존 폴은 롱 아일랜드의 더글라스시에서 그들의 조부모, 샘과 마샤 젠킨스와 함께 살며 안정되었다. 오웬은 알제리아와 남프랑스로 그림을 그리러 가며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 돌아 왔을 때 그는 톰에게 프랑스로 데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때쯤 소년은 안정을 찾았고 친구들과 수영, 야구를 하며 삶을 즐기고 있었다. 새로운 가정은 톰이 원했던 마지막 소원이었다. 이사하는 것에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톰은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톰은 오래된 교회들과 수도원들을 거닐었고 중세 문화의 유적들에 매혹되었다. 그는 몬토반에 있는 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곳에서의 2년은 11살 소년에게는 어둠의 시기였다. 약한 자를 괴롭히고 입버릇이 심한 학생들을 모방하는 것 외에 톰은 두려움과 포기의 느낌을 직면해야 했다.
톰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오웬은 영국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했다. 1929년 톰은 런던 근처에 있는 소년 기숙학교인 리플리 코트에 입학했다. 그는 라틴어를 몰랐기 때문에 가장 낮은 반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년도 안되어 톰은 그의 동년배들을 따라 잡았고 오크햄 공립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시험에 합격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대학을 준비하면서 4년을 보냈다.
1929년 비극이 다시 한번 톰을 찾아왔다. 오웬이 런던의 병원에서 장기투병을 했으나 톰의 16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악성뇌종양으로 이승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가 점점 무력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아버지의 죽음과 그것이 가져온 고통을 이해할 수 없어 절망에 빠진 그에게 또 다른 의문이 그를 괴롭혔다: 이제 그는 가정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오웬의 죽음 이후 톰은 그의 아버지의 의사이자 부유한 친구인 톰 베네트와 함께 학교 휴가를 보냈다. 베네트는 톰에게 현세의 길을 제시하는 후견인, 아버지 형상, 그리고 이성적인 모형이 되었다. 인자하고 친절한 베네트는 어린 소년의 독서 및 영화, 문화사에 대한 관심을 많이 격려해 주었다. 톰은 영국의 오크햄 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고 롱아일랜드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여름을 보냈다.
톰은 무신론을 주장하면서 제도적 종교를 거부했다. 그는 할 수 있으면, 유럽 주위를 혼자 방랑하였다. 이 여행들 중, 그는 피에 독약을 넣는 법을 개발하였다. 절망적이고 목표가 없었던 이 시기를 머튼은 후에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내 마음 속에는 무관심만 가득한 채 있었다. 그 무관심 속에는 자존심과 악의 같은 것이 있었고 마치 내가 약간의 불편함으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 삶의 잘못인 것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삶에 경멸과 증오를 보여 주고 죽으리라고 생각했다.”(<칠층산>에서)
그리고 나서 삶은 상승기류를 탄 것처럼 보였다. 1932년 톰은 캠브리지에 있는 클레어 대학의 장학금을 얻었다. 그는 옷 잘 입고, 데이트를 즐기며, 지적인 친구들과 사귀고, 글 쓰고 노래하고 스쿼시와 테니스 하는 꿈을 이루었다.
18번째 생일 축하 후에 톰은 베네트가 준 여행표와 돈으로 프랑스를 가로 질러 로마까지 여행하였다. 초기 교회들과 대성당들을 정처 없이 거닐면서 그는 화려한 비잔틴 모자이크 문화에 매혹되었다. 그는 비잔틴 그리스도 수난상에서 자신이 찾고 있었던 어떤 것을 본 순례자가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로마의 모든 위대한 성전을 아무 의식 없이, 의도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방문했고 진정한 순례자의 열정과 열망과 욕구와 함께 그 성전들의 지성소를 찾았다.”(<칠층산>에서)
톰은 새롭게 구매한 성서를 읽고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떤 영감을 받았다. 그는 방에서 아버지의 현존을 느꼈다: “어떤 것이 그냥 섬광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그 섬광 안에서 나는 내 영혼의 비참함과 타락에 대한 갑작스럽고도 심오한 깨달음으로 압도되었다.”(<칠층산>에서).
머튼은 이 사건을 열정적인 수도승의 관점에서 어린 시절의 잘못들을 되돌아본 것으로 묘사했지만, 그 경험은 영적으로 매우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도덕적으로 확실하게 진정으로 위대한 은총이었다. 내가 그것을 오직 철저히 따랐었더라면 나의 삶은 다가오는 미래에 매우 다르고 훨씬 덜 비참해졌을 것이다.”(<칠층산>에서).
캠브리지와 콜롬비아
토머스 머튼은 영국 외교 통상부에 들어갈 목적으로 1933년 10월 캠브리지 클래어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업과 필수과목들을 중단하고 선택과목들을 공부했으며 알코올을 마시게 되었다. 그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명백하게 친아버지 소송이 그에게 제기되었다. 후견인의 도움으로 그는 아이에 대한 책임을 수락했고 부양을 위해서 일했다. 사실상 여인과 아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가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머튼은 그들에게 재산 일부를 남겨 놓았다.
톰의 무책임한 생활방식과 성적 만용에 깊이 실망하여 후견인 베네트는 톰을 런던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톰에게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깊이 부끄러워하며 톰은 변명하지 못했다. 얼마 후, 그는 캠브리지를 떠나 뉴욕에 있는 외가집으로 상선을 타고 보내졌다. 가는 도중 그는 삶의 문제들, 아버지의 기대에 대한 배신, 자신에 대한 무가치한 느낌에 관해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외갓집에서 거주하면서 톰은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했고 거기에서 삶에 대한 그의 한없는 열정은 방향을 발견하여 활성화되었다. 여전히 심한 애연가와 흡연가로서, 헌신적인 우애를 가진 남자로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존재의 중심에서 느꼈던 두려운 혼돈을 메꾸는 방법을 찾는데 빠져들었다.
콜롬비아에서 톰은 밥 랙스, 에드 라이스, 시 프리드굿 같은 명쾌하고 배려하는 친구들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 교수인 마크 반 도랜은 그에게 진실에 대한 올바른 추구를 불어넣어 주었고 생애 내내 머튼과 관계를 맺었던 철학자 다니엘 월시는 그에게 영적인 격려자가 되었다. 그의 순례에 이 사람들이 주었던 영향을 회상하면서 머튼은 <칠층산>에서 이렇게 평한다: “하느님은 나와 6명의 다른 사람들을 콜롬비아대학으로 보내 주셔서 우리를 친구로 만들었고, 우리의 우정은 우리들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혼돈과 불행 속에서 우리를 힘 있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작용하였다.”(<칠층산>에서).
톰의 독서와 체험은 그를 더욱 더 가톨릭 신앙으로 끌리게 했다. 친구인 힌두교 수도승 브라마차리는 그에게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 그리고 <준주성범>을 읽도록 권유하였다. 에티엔느 길쏭, 알더스 헉슬리, 윌리암 블레이크와 자끄 마리땡은 톰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넓혀 주었고 다양한 종교적 체험들을 하게 해주었다. 점차 톰은 “책과 사상과 시들 그리고 이야기들, 그림과 음악, 건물, 도시, 장소, 철학 등이 은총이 일하는 자료”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의 전 삶이 하느님께로 당겨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톰은 신부님을 만날 용기를 얻었고 미사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후 어느 날, 예수회 시인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일생 이야기를 읽는 동안 탐은 그의 내적 삶이 결단을 절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러한 움직임을 무시하려 했으나, 그것들이 더 강해짐을 느꼈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콜롬비아 캠퍼스로부터 성체 교회 사제관까지 몇 블록을 걸어가 가톨릭 신자가 되겠다고 청했다.
1938년 11월 16일 콜롬비아의 몇 몇 친구들은 가톨릭교회에서 토머스 머튼의 세례에 입회하였다. 수년간 추구한 후, 그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평화와 새로운 실재를 주도록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책은 1994년 미국 미네소타주의 세인트 매리 출판사에서 발간된 웨인 심직의 <Praying with Thomas Merton>을 <참사람되어>(2001.1)에서 편역한 것이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