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대면하셨고 우리들도 대면하는 두 번째 유혹은 굉장해지려는 유혹이다.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성전의 꼭대기 난간에 세운 다음 말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5-6).
이 유혹은 하느님께 비범한 것, 획기적인 것, 예외적인 것, 들어보지 못한 것에 응답하도록 강요하고 그런 다음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강요하는 유혹이다. 위대한 무엇인가를 하려는 유혹은 예수님 시대 이후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섬김이 가치있는 것이고, 시위나 항의는 매스컴의 카메라가 돌아갈 때 의미가 있으며, 공부 그룹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때 해볼 만하고,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속하고 싶어할 때 성공적인 교회가 된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 문화에서 “진실”이란 대부분 통계에 의해 결정되므로 듣고, 보고 혹은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 상황의 질적인 측면을 평가하는 잣대라고 실제로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스라엘의 남는 이들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다. 또한 무엇인가 매우 좋은 어떤 것이 알 수 없는 자리에서 왔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다. 그리고 우리들의 하느님은 보잘 것 없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으며 보통의 범죄자처럼 처형되었던 하느님이심을 믿기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소수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부들이 세상에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했다는 사실은 더욱 더 믿기가 어렵다.
우리는 마치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평가하는 주요 잣대가 가시성과 평판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지 않으면 행동하기가 쉽지 않다. 통계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최고의 대성공 히트, 베스트셀러 책, 가장 빨리 팔려나가는 차, 기록을 깨뜨리는 체육인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다룰 때에 나타나는 징표들이다.
위대해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버렸고, 일생동안 내내 구경꾼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알려지지 않은 것, 위대하지 않은 것, 그리고 숨겨진 것은 아무런 가치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측면에 만연되어 있는 유혹을 어떻게 극복 할 것인가? 위대한 것에 대한 우리의 허기짐은 –예를 들면 영향력을 가지려는 우리의 욕구 따위- 실상 자아됨에 관한 우리의 추구와 매우 관련이 깊다.
인격체가 되고, 보여지고 칭찬받고, 누가 좋아해 주고 받아들여주는 것에 대한 갈증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감사의 말을 하지 않거나, 나의 일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 나는 누구인가? 더 불안정해지고, 더 의심스러운 현실이 된다. 더 외로울수록, 인기와 칭찬에 대한 우리의 욕구는 더욱 더 커진다.
슬프게도, 이 굶주림은 결코 만족을 얻는 법이 없다. 더 많은 칭찬을 받을수록, 우리는 더 칭찬을 원하게 된다. 인간적인 인정에 대한 허기는 마치도 바닥에 구멍이 뚫린 물통과 같다. 결코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혹자에게 대답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참으로, 보기에 크고 반짝이는 것에 대한 추구는 하느님께서 완전하게 그리고 무조건으로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의심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정말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저는 하느님 당신이 진정으로 저를 보살피시는지, 진정으로 저를 사랑하시는지, 진정으로 저를 가치있다고 생각하시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저의 내적인 두려움을 인간의 칭찬으로 완화시키시고 인간의 갈채에 의하여 제가 무가치 하다는 느낌을 줄여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면 제가 믿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참다운 도전은 중심으로, 마음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어떤 인간의 목소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확신시키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모든 직분의 기반은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들로서 무한하고도 한계 없이 받아들이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다. 이런 하느님의 받아들임은 너무나 충만하고 전적이며 모든 것을 포옹하는 것으로, 우리를 보여지고, 칭찬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충동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우리를 섬김의 길로 이끄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유롭게 해준다.
하느님의 받아들임에 대한 이런 체험은 우리를 끊임없는 욕구로부터 해방시키고 자기를 넘어서 이웃들에게 관심을 둘 수 있는 새로운 자리를 창조해낸다. 그리스도 안의 이 새로운 자유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충동에 제약받지 않고 움직이도록 해주고, 웃음꺼리가 되고 거부당할 때에도 심지어 우리의 말과 행동이 죽음을 가져올 때조차도 창의적으로 행동하도록 해준다.
관상기도의 훈련을 통하여 우리는 천천히 하느님의 첫 번째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거나 다른 인간의 사랑을 받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사랑이다. 요한복음 사가는 말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19).
관상기도는 우리를 그 첫 번째 사랑에, 그것에 의하여 우리가 참다운 자아를 받게 되는 사랑으로 이끈다. 우리는 투표로 이루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 안에서 창조한 존재다. 빛의 자녀들,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오로지 하느님과 지속적인 친밀함이 이루어지는 삶만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됨을 밝혀줄 수 있다. 오로지 그러한 삶만이 우리가 진리에 따라 행동하고, 위대함에 대한 우리의 욕구에 따르지 않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
이러한 삶은 수월함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진지하고 끈기 있는 고독, 침묵, 그리고 기도의 훈련이 요구된다. 그러한 훈련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빛나는 성공을 보상으로 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온 존재를 밝혀주는 내적인 빛을 주고 자유롭게 하여 삶에서 하느님 현존을 거침없이 증언하도록 해줄 뿐이다.
(출전: 참사람되어, 2015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