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없는 평화: 도로시 데이와 토마스 머튼의 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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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없는 평화: 도로시 데이와 토마스 머튼의 평화론
  • 한상봉
  • 승인 2019.02.26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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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코-47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꼽으라면 도로시 데이와 토머스 머튼을 지나칠 수 없다. 1933년 가톨릭일꾼운동을 창립했던 도로시 데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된 1963년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어머니’들과 함께 로마 순례를 떠나 요한 23세 교황을 알현하고, 공의회 마지막 회기인 1965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선언을 발표해 달라고 청원하며 로마에서 열흘간 단식했다.

도로시 데이는 “예수가 제일 먼저 행한 기적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한 기적이었으며, 배고픈 군중들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이었고, 예수가 마지막으로 행한 기적은 예수를 체포하려는 사람들에게 맞서서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입힌 상처를 치유하신 것이었다.”고 말했다. 예수는 날카롭게 명령하셨다. “칼을 치워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도로시 데이는 그 말씀이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전했다.

 

평화주의는 중립이 아니다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일꾼운동의 평화주의는 중립노선을 달리지 않았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탄압하자 뉴욕의 가톨릭일꾼들은 1935년 부둣가로 달려가 독일의 정기여객선인 브레멘 호 앞에 모인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독일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호소문을 통하여 “미국의 환대를 원하는 유태인들에게는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나라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는 미국정부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고,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만 입국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은 유대인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한편 인종차별과 나치의 사악함을 알고 있었으나 도로시 데이는 전쟁을 수단으로 하여 악과 싸운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승리 없는 평화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고 나서도 가톨릭일꾼운동은 전쟁에 줄기차게 반대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은 전쟁에 나가는 대신에 교도소나 시골의 노동단지에서 일을 했다. 어떤 사람은 무장을 하지 않는 위생병으로 군복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톨릭일꾼> 신문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길들인 늑대 옆에 서 있는 그림과 함께 “승리 없는 평화”라는 말을 곁들여 계속 실었다.

<가톨릭 양심적 반대자>란 신문도 발간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애국적인 사람들에게는 배신자처럼 느껴졌고, 많은 주교들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전쟁 중이라고 해서 우리의 적을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도로시 데이는 거듭 말했다. “우리의 삶의 법칙은 애덕의 일을 하는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의 애덕활동을 평화운동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놀라운 애덕활동을 평화주의로 더럽히지 말라’는 비난이 쏟아져 들어오자 이렇게 응수하였다.

“우리가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데 반해 전쟁은 기아를 가져다주었고, 우리가 괴로워 우는 이들에게 위로를 가져다주는데 반해 전쟁은 비참과 폐허를 가져왔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에게 해준 것은 무엇이든, 친절이든 폭력이든 그분께 직접 해 드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것이다.”

 

토머스 머튼의 평화론

토마스 머튼은 1961년부터 <가톨릭일꾼> 신문에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연재물을 투고하기 시작하였다. 이 글은 1962년에 4월에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라는 책으로 묶여 나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토마스 머튼이 소속해 있던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돔 가브리엘 소르테스 총원장이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글을 더 이상 쓰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토마스 머튼은 책의 원고를 등사본으로 만들어 비밀리에 돌리게 되었는데, 훗날 바오로 6세 교종이 된 밀라노의 몬티니 추기경도 받아볼 수 있었다. 또한 1962년 12월에는 공의회 토의자료로 교황청에 사본이 들어갔으며, 1965년에 발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인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에 중요한 내용들이 반영되었다.

이를 테면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무차별 파괴를 자행하는 모든 전쟁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범죄이다. 이는 확고히 또 단호히 단죄 받아야 한다.”(사목헌장, 80항)고 하였으며, 또한 공의회에서는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사목헌장, 79항)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사목헌장의 이러한 내용은 이미 1963년 초에 요한 23세 교황이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를 통해 확인된 것이었다. 이렇게 도로시 데이가 스페인 내란 당시부터 줄곧 견지해 오던 그리스도교 평화주의가 교회 안에 공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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