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예언시기 이후 유다인들은 평화와 풍요를 가져오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길러 왔다. 예수가 이러한 선조들, 동시대의 유다인들과 다른 점은 그러한 목표의 실현을 하느님의 지배 혹은 하느님의 왕국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와 있다고 선포함으로써(마태 13,33 : 마르 2,22 : 루카 11,20) 예수는 묵시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비관론과 침울함을 벗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인류역사를 결정하는데 있어 인간의 행동이 무익하다는 예정론적 관념을 거부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박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하느님의 통치와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라고 요구했다(마태 5,11; 6,33).
하느님의 통치(왕국)-문화위기에 대한 예수의 응답
구약의 예언자들은 새로운 인류에 모든 나라들이 다 포함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세계주의는 이스라엘과 성전을 그 중심으로 보는 것이었다. 예수의 세계주의에서 새로운 인류는 하느님 이외에는 다른 중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준비, 이웃에 대한 사랑이 바로 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이처럼 예수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관점을 거부하였던 것이다(마르 3,35).
열혈파는 유다왕국의 복고를 갈망하였다.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예수의 세계주의는 이들의 생각과도 달랐다. 하느님의 왕국에 대한 예수의 희망은 단순히 유다문화의 비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변혁을 뜻하는 것이었다.
문화를 형성하는 관념, 신념, 가치관, 규범 등은 서로 평등한 위치에 있다. 이것들은 개인과 집단이 존재하는 궁극적 목표인 근본초점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에서는 그 초점을 ‘무크티’, 불교에서는 ‘열반’,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통치’라고 부른다. 이 근본 초점의 빛으로 의미가 파악되고 가치가 인식되며 규범이 형성되는 것이다.
삶의 궁극 목표에 대한 급진적이고 새로운 이상은 그러므로 기존 문화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과 재해석을 요구할 것이다. 역으로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삶의 궁극목표에 대한 재해석을 포함하는 것이다. 어떠한 가치관이든 특정한 생각과 신념을 전제로 하며 규범과 관습과 기대를 발생케 한다. 그러므로 기존 가치관의 전복은 바로 전체 문화의 전복과 동일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문화들은 종교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기 때문에 종교와 세속사회의 구별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런고로 유다교에 대한 예수의 비판은 동시에 유다사회에 대한 비판이며, 유다사회에 대한 비판은 바로 유다교에 대한 비판이라 하겠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통치는 가치 중의 가치, 즉 가장 세계적인 가치를 이루며 모든 다른 가치가 측정되는 빛이기도 하다(마태 13,44-46). 임박한 하느님의 통치에 비추어 보면 예수의 동시대인들에게 가치있는 것이 예수에게는 별로 가치가 없게 여겨졌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예수는 사물과 인간, 사건, 관습 그리고 행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방법으로 그의 사회적 삶을 형성해 나갔다. 그는 가치관의 총체가 구체화되어 있는 양극의 사회관계에 있어서 논쟁점이 되었다.
유다문화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문화를 제시하는 예수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당시의 가치체계를 어떻게 전복시켰고, 또한 어떻게 새로운 문화라고 일컬을 수 있는가 알 수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하여
부가 하느님 축복의 구체적인 징표이며 가난이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는 결정론적인 관념은 그 당시 부자들의 이익과 매우 부합하였다. 즉 부자들에게 그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있으며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지 않다고 안심하게 해 주었다.
예수는 우상의 추구와 하느님에 대한 봉사의 상반성 때문에, 새로운 시대의 축복은 오직 가난한 이들에게 속한다고 선포함으로써 그러한 안이함을 흔들어 놓았다(마르 10,25 : 마태 6,24). 그렇다고 예수는 마치 하느님의 통치가 결핍을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부보다 가난에 더 많은 가치를 두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느님의 통치는 물질적이고 영신적인 풍요를 의미한다(마르 10,29-30). 또한 예수는 착취당하는 이들이 착취하는 이들과 그 역할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예수가 가난한 이들을 택했던 이유는 그들이 보다 더 미래에 열려 있으며, 하느님이 그들을 위해 준비하고 계셨던 반면, 부자들은 현재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착취가 사라지는 급진적이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예수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위대한 것과 가장 미소한 것에 대하여
여기에서 예수는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권위의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권력의 기존 사회적 분배 체제를 비판하고 있다(마르 10,42-44).
그는 “당신들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4)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부름은 봉사의 수단으로서 권력의 사용에 관한 단순한 충고로 해석되지 말아야 하며, 모든 권력의 행사에 있어 급진적인 포기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위대해지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타인에게 종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종이 되고 동시에 주인이 되어야 한다. 즉 그는 공동체의 모든 개개인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녔음을 인정해야 하므로 종이고,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정되므로 주인인 것이다.
다시 한 번 예수는 가장 미소하고 무력한 이들을 옹호한다. 그들은 새로운 인간성에 보다 더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간의 세계에서는 권력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말째가 첫째가 된다. 권력으로서 권력을 위한 명령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봉사가 위대함과 진정한 삶을 판가름하는 참 기준이 되는 세계이다(루카 13,30; 14,11).
-아는 자와 단순한 자
지적인 노동과 신체 노동의 구분에 따라 이루어지는 모든 사회에서는 지식의 독점을 주장하는 계층의 사람들이 단계적으로 등장하게 마련이다. 지식이 분류되기 시작하면 지식 자체가 바로 인간에 대한 권력이 되어 버린다.
율법학자들은 비록 경제적으로 가난했지만,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하느님에게서 비밀의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하면서, 계시주의 운동의 창시자로서 유다사회의 특권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다 대중의 의식이 예언적 가르침에서 어떤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율법학자라는 계층이 법의 공식적인 해석자로서 이스라엘에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지식의 합법성과 비법(秘法)성을 강조하는 것은 사랑과 정의의 실천을 통하여 얻어지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와 예수가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지식으로 유일하게 인정했던 것은 바로 이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의해서, 또한 모든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연민과 동화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지식이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하여
모든 가부장 중심의 사회처럼, 유다주의는 남자에 보다 높은 가치를 두었으며 여자들을 낮은 위치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현실에 반하여 예수의 가르침은 진정으로 혁신적이었다. 그는 결혼의 불가해성에 대하여 가르쳤다(마르 10,9).
[원출처]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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