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무너뜨린 제국의 발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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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무너뜨린 제국의 발톱
  • 한상봉
  • 승인 2018.11.1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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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묵시록 묵상-1

[성서읽기-마르 14,43-50] 

잡히시다(마태 26,47-56; 루카 22,47-53; 요한 18,1-11)
43 그러자 곧,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44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45 그가 와서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하고 나서 입을 맞추었다.
46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47 그때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48 예수님께서 나서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
50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묵시록을 읽기 위해, 먼저 네 번에 걸쳐 마르코복음의 수난사화를 읽으며 로마제국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고 묵시록 해제를 공부합니다.] 

90년경에 쓰여진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로마 제국과 황제숭배 현실에 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예루살렘이 어떻게 파괴되었으며, 이때에 유다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과 로마제국의 탐욕, 그리고 폭력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황제숭배의 가증스런 우상숭배적 현실과 저항정신을 공부해 봄이 옳을 것이다.

유다 고위층과 로마의 폭력

주후 64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되자, 1만8천 명의 유다인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헤로데 아그리파 2세가 일거리를 주기 위해 시작한 도로포장 공사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시골에서는 소농들이 대토지 소유자들이 매긴 아주 낮은 가격으로 곡물을 내다 팔 수 있었다. 그해 가뭄으로 수확량이 떨어지자 곡물 가격은 평소보다 16배나 뛰어올랐지만, 창고를 가진 부자들만이 시장에서 이득을 보았다.

대토지는 대제사장 등 예루살렘의 큰 가문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농지 이득뿐 아니라 희생제사를 위한 짐승, 사치품, 군수품, 성전의 재정관리 등으로 도시의 경제권을 한손에 쥐고 있었다. 따라서 61년 대제사장 이스마엘 벤 피아비의 어머니는 그에게 1만 데나리온짜리(노동자의 10,000일치 임금) 겉옷을 사주었다.

요수아 벤 가말리엘은 아그리파 2세에게 6리터의 데나리온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들였다. 그들은 대제사장이고, 아들들은 재정관리인이고, 사위는 대법관이며, 그의 노예들은 몽둥이를 가지고 백성을 두들겨 팬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힘깨나 쓰는 대제사장의 하인들은 농부들의 타작마당에 직접 들어와 십일조라며 곡식을 탈취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제국 역시 유다인에 대한 강탈에 나섰다. 64년에 유다 지방에 새로 부임한 로마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는 서둘러 유다의 재산을 우려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66년에는 아예 성전 안에 있는 보물을 직접 거두어 가겠다고 나섰다. 성전을 지키려고 유다인들이 몰려왔고, 총독은 군대를 데리고 왔다. 그 충돌로 인해 유다인 3천명이 살해당했다.

유다인 통치자 아그리파 2세는 로마 군대에 대항하지 말도록 이렇게 백성을 달랬다.

“더 고결한 자유를 향한 열망에 부푼, 셀 수 없이 많은 민족이 그들에게 복종했습니다. 그런데 우주가 다 복종하는 그들에게, 당신들만이 노예가 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도움을 믿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 역시 로마 사람들의 편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없다면 그런 제국을 세우는 일이 불가능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젤롯당은 66년 문서 보관소에서 보관되어 있던 빚문서를 불태웠으며, 로마 수비대를 암살했다. 그리고 대제사장 아나니야를 습격해 그를 사형에 처했으며, ‘시온의 해방’ 이라는 글귀를 새겨넣은 은전을 주조했다.

 

The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 by David Roberts, 1850

통곡하는 예루살렘

이 사태를 평정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왔으며, 갈릴래아의 세포리스와 같은 도시를 항복시켰다. 여기서 목숨을 건진 유다인들은 학살되거나 노예시장에 끌려갔다.

70년 초 티투스가 군단을 몰아서 예루살렘을 공략했다. 성곽을 빙 둘러싸고 있던 나무들을 쓰러뜨렸고, 발사대와 궁포대는 성안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7킬로미터에 걸쳐 성벽을 둘러싸 파놓은 참호는 예루살렘을 한치의 빈틈도 없이 가두어 놓았다. 도망을 시도했던 불행한 사람들은 성벽 기슭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 성안에는 굶주림으로 떠는 사람 천지였으며, 자기 아이를 굽고 있는 여인을 현장에서 잡은 적도 있었다. 결국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은 대부분 로마 군대에 의해 참살당했으며, 성전은 약탈당하고 불타올랐다.

로마 군대는 부스러기가 된 성전을 차지하고서, 살아 남은 자들을 세 묶음으로 나누었다. 한 떼는 개선행진에 쓰려고 로마에 보내졌고, 건장한 사람들은 검투사들의 경기를 위해 마련되었고, 나머지는 중노동 인부 또는 노예시장에 팔려 나갔다. 이렇게 황제의 사유지가 된 유다는 티투스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정복된 유다’ 라는 글귀를 주화에 새겨넣었다. 성전의 붕괴와 함께 유다의 제사종교는 사라지고 말았으며, 랍비들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과 참 이스라엘로서 새로운 계약을 받았다고 믿었던 그리스도 교회로 나누어졌다.

한편 로마 시내는 유다를 정복한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축제 분위기를 띠었다. 개선형렬은 ‘신성한 길’을 따라서 행진하기 시작했고 그 뒤로 군인들이 약탈해 온 금과 은, 상아, 진귀한 옷감, 동물들이 금실로 짠 옷을 입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 나왔다. 그 다음엔 키와 외모로 뽑힌 칠백명의 젊은 유다인 포로가 줄지어 행렬에 참가했다. 그리고 병사들이 성전에서 가져온 전리품을 날랐다. 공물로 바쳐진 빵을 놓는 금으로 된 제단, 은나팔,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촛대, 그리고 성소의 자주색 휘장 등이었다.

그 뒤로 승리의 여신상이 따랐고, 이어서 네 마리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가 지나가자 군중들이 환호하였다. 마지막으로 유다의 장수 시몬 바르 기오라가 밧줄에 목이 묶인 채 채찍을 맞으며 끌려나왔다 결국 그는 지하감옥 툴리아눔에서 교살되었다.

 

Close-up of the relief on the Arch of Titus, showing spoils from the Siege of Jerusalem

 

티투스의 초상이 그려진 로마의 주화

축제의 그늘 속에서 전하는 희망

백성의 은인인 로마 황제는 축제를 통해 복음을 선사하였다. 전차 경주와 검투사들의 대결, 그리고 연극공연이 그것이었다. 이것들은 로마 시민들을 기쁘게 해주었는데, 그 비용을 댄 귀족들은 ‘자선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도시의 한편에서는 바깥의 소란한 환호성을 뒤로 한 채 창고 같은 장소에 모여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다인인 듯한, 구리빛으로 그을린 한 남자가 그리스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숨을 죽여 가며 그 이야기에 열중했다.

“…병사들은 예수를 총독관저 뜰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 전 부대원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예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다음 ‘유다인의 왕 만세!’하고 외치면서 경례하였다. 또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다. 이렇게 희롱한 뒤에 그 자주색 옷을 벗기고 예수의 옷을 도로 입혀서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이들은 40여년 전에 죽은 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최근에 발생한 예루살렘 붕괴와 동족들의 참혹한 죽음, 그리고 위풍당당한 황제와 로마 군대, 환호하는 로마 시민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황제의 자주옷, 면류관, 로마 군대는 그들의 축제만큼이나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새로운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을 희망해야 했다.

한편 로마의 제국주의 문화는 귀족들과 부자들을 방탕과 사치로 내몰고, 빈자들과 노예들을 더욱 가혹하게 대했다. 뛰어난 미식가로 알려진 티투스 페트로니우스는 낮 시간은 자는 데 바치고, 밤 시간은 쾌락을 누리는 데 쏟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동안에도 빈둥거리며 재산을 탕진하였는데, 로마 사람들은 그를 ‘인생의 향락을 아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해방노예들은 이렇게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나는 오늘 빵 한 조각도 살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뭄이 계속 된다면…봐라, 사람들이 굶어 죽을 지경인 게 벌써 일 년째나 된다. ‘나를 도와줘, 너를 도울게.’하면서 제분업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있는 도시 관리놈들이야 말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대중들은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는데도 아가리가 큰 놈들은 날마다 잔치다.…아, 하루하루가 더 나빠지고 있다. 이 도시는 송아지 엉덩이같이, 뒷구석이 살찌고 있다.”

 

로마의 노예들

탐욕스런 로마의 은덕

그 대표적인 사례를 우리는 폼페이에서도 볼 수 있다. 폼페이에는 5천개의 좌석을 가진 야외극장, 1천3백 석의 극장, 2만 석의 대강당, 체육관, 깊이 2.6미터의 수영장이 딸린 투기장, 세 개의 공중 목욕탕, 그곳에 온천과 해수요법을 할 수 있는 건물, 그리고 당연히 수로와 여러개의 물 저장소 덕분에 가능했던 수많은 분수와 부자들의 저택에 흘러들어가는 물이 있었다. 이렇게 쾌적한 로마의 힘과 공간은 노예노동과 농민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돈으로 노예를 사고, 쾌락을 누릴 공간을 확보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새겨진 비문에는 ‘돈 만세!’라고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10만 세스터스의 자금을 제공하고 행정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며, 기사계급이 되거나 원로원 의원이 될 수도 있었다. 대토지를 소유하고 노예노동을 통해 부자가 된 사람들만이 정치적인 놀음에 끼여들 여유를 누렸다.

폼페이에는 8천 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노예광장이나 유쿤두스 은행 가까이에 있는 베쥐브문 시장에서 노예들을 사거나 내다팔았다. 이 노예들에게 남아 있는 평균 수명은 대개 14년 6개월이었다. 가혹한 노동으로 그들은 젊은 나이에 죽어갔으며, 밤이면 ‘에르가스튈르’라는 감옥에서 사슬에 묶인 채 잠들어야했다. 창녀들도 노예가 많았고, 대극장 뒷문 근처에 거주하던 검투사들도 대부분 노예들이었다. 이들은 시민들의 쾌락을 위해 경기장에서 싸우다 죽어야했다.

이 모든 것이 로마시민들이 섬기는 황제와 그의 군대가 가져다 준 은덕 안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마무리 기도-한상봉]

실낱 같은 목숨 그다지도 모질게 버텨온 것은
주님, 당신 떄문 아니오이까.
당신의 자비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다만 그것뿐 아니오니까.

돌담 부스러기 위에 앉아
통곡하는 날,
그날이 오지 않기를 저희가 갈망하고
또 목을 뽑아 바라나이다.

횃대처럼 방벽에 높이 앉아
파수를 서고 탐욕의 비수를 꽂을 도적을 막아낼 수 있다면,
그예 우리가 당신의 자비하심 그대로
가멸진 중생들의 보호가 되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우리 주님.

*<야곱의 우물> 1998년 6월호부터 1999년 12월호까지 연재했던 글을 다듬어 연재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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