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사람들을 치유했던 단 하나 그리고 유일한 동기는 연민이었다. 예수의 단 하나의 소망은 사람들을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숙명론적 체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해방이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으며 그의 기적적인 치유는 바로 이같은 신앙의 덕택이었다. 더군다나 예수는 자신이 연민과 믿음과 기적의 치유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하고자 했던 것은 주변 사람들 속에 있는 이와 똑같은 믿음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힘을 움직이게 하고 또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었다. 하느님은 이미 예수 안에서 일하고 계셨으니 예수가 사람들 안에 있는 신앙을 일깨우기 때문에 그들의 해방이 가능하였다.
우리는 예수가 치유된 사람들 각자에게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낫게 하였소”라는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을 본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에 의존했으나 예수는 믿음만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힘은 바로 믿음의 힘이었다(마르 10,27; 9,23 : 마태 17,20).
그렇다고 믿음의 힘이 단순히 어떤 힘찬 확신의 위력이나 강력한 암시의 정신 신체적 영향, 이른바 위압요법에 의하여 치유효과를 낸다
고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확신도 무조건 다 믿음이 되지는 않는다. 믿음은 확신의 특수한 종류이며 그렇기 때문에 힘을 얻는다. 믿음은 선한 확신이며 참된 확인이다. 그것은 어떤 일이 그 자체가 선이기에, 그리고 선은 악을 이길 수 있으며 또 이기리라는 것이 참이기에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또 이루어지라는 확신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하며 그분은 악을 이길 수 있고 또 이기리라는 확신이다. 믿음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인 것이다.
믿음의 반대는 숙명론
믿음과 반대되는 것은 그러므로 숙명론이다. 숙명론이란 한때 세상 어느 한 구석에서 존재했던 특이한 한 가지 인생철학이 아니다.
숙명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유력한 생활태도이다. ‘그야 어쩔 수 없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 ‘희망이 어디 있느냐’;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이런 표현들이 숙명론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 하느님이 약속한 바에 참으로 희망을 걸지 않는 사람들의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희망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의 의미는 희망과 거의 구별될 수 없다(히브 11,1 : 로마 4,18-22). 말하자면 믿음과 희망이란 동일한 마음 자세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불신과 절망이 숙명론의 양면이듯이.
우리는 앞에서 예수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 죄인, 병자들의 숙명론에 관하여 보았다. 예수의 치유활동의 성공은 숙명론에 대한 믿음과 희망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병을 평생의 운수라고 체념했던 병자들은 용기를 얻어 자기들도 나을 수 있고 또 나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믿음은 가르쳐줄 수 없다, 전염될 뿐
예수 자신의 믿음, 예수 자신의 요지부동한 확신이 이 믿음을 일깨웠다. 믿음이라는 삶의 태도는 예수와의 접촉을 통하여 예수로부터 사람들에게로 일종의 전염병인양 옮아갔다. 그것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옮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그들은 믿음을 키우기 위하여(루카 17,5) 또는 불신앙에 대한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마르 9,24) 예수를 찾기 시작했다. 예수는 믿음의 창시자였다. 그러나 일단 믿음이 창시되고 나면 그것은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전파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믿음은 다른 사람 속에 믿음을 일깨울 수 있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 속에 믿음을 일깨우러 파견되어 나갔다.
세례자 요한은 죄인들에게 설교를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죄인들에게서 악령을 쫓아냈다. 그러나 예수는 죄인들과 하나가 되었다. 자신의 길을 가면서 거지, 세리, 창녀들과 어울려 사귀었다(루카 15,2;5,29 : 마르 2,15 : 마태 9,10 : 루카 7,48-50).
그리고 일단 예수의 사람됨을 헤아리기 시작하면, 세리나 죄인이나 병자나 무능력자나 모두들 예수와 어울리려고 하였고(루카 15,1) 그를 초대하는 것이었다(루카 19,1-10). 이런 식사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장이 될 수 없으리라.
그들을 친구로, 동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는 그들의 수치감과 비굴함과 죄의식을 씻어 주었다. 그들이 자기에게 중요한 사람들임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자존심과 해방감을 주었다. 그들과 더불어 식탁에 기대어 앉아 있을 때에 예수는 그들과 신체적으로 접촉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요한 13,25). 그런 접촉을 거절할 생각은 꿈에라도 해본 일이 없음이 분명하다(루카 7,38-39).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결백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임을 느끼게 했다.
그뿐인가, 예수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또한 예언자로서 우러러 보여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의 우의의 표시를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인정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이제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죄스러움과 무식함과 부정함은 이미 문제삼을 장애가 아니었다.
예수는 그들을 안심하게 했다. 악령도 악인도 호수 위의 폭풍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병들면 어쩔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기뻐하라’는 말들을 하면서(마르 5,36; 6,50 : 마태 6,25. 27. 28. 31. 34; 9, 2. 22; 10,19. 26. 28. 31; 14,27 : 루카 12,32 : 요한 16,33 및 이 구절들에 해당하는 모든 병행구절. 또한 마르 4,19. 40; 10,49 : 루카 10,41 참조).
예수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격려한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던가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예수는 비단 치유하고 용서했을 뿐 아니라 또한 두려움을 몰아내주고 걱정으로부터 건져 주었다. 예수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원출처]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2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