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연민' 때문에 길 잃은 양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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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연민' 때문에 길 잃은 양이 되다
  • 알버트 노우런 신부
  • 승인 2018.10.14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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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임박한 전쟁-2

예수는 임박한 재난을 예견한 세례자 요한에 동의하였다. 시대의 징표를 읽으면서 그들은 이스라엘이 로마와 충돌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예수와 요한은 이 급박한 재난을 하느님의 심판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재난에 대하여 예수는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세례자 요한과 달리, 예수는 요르단강에서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예수가 그의 주의를 돌렸던 사람들은 복음에서 다양한 부류로 나타난다. 가난한 이들, 눈먼 이들, 절름발이들, 장애자들, 나병환자들, 배고픈 이들, 우는 이들, 죄인들, 창녀들, 세리들, 마귀들린 이들, 박해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 법을 전혀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들, 군중들, 보잘 것 없는 이들, 작은 이들, 말째들, 어린이들 그리고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들이다.

여기 말하는 이들은 이스라엘 주민들 중에서 분명히 구분되고 결코 잘못 알 수 없는 계층이다. 예수는 일반적으로 이들을 가난한 이들이나 작은 이들로 말하였다. 똑같은 사람들을 바리사이들은 죄인이나 율법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어중이들로 취급하였다. 오늘날 이들은 아마도 최하류 계층이나 억압받는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by Kiko Arguello

예수, 고통의 역사를 선택하다

대부분의 역사서들은 중요한 사람들이 행한 일과 말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준다. 즉 왕이나 왕자, 권력가들, 금력가들, 억압자와 군대 등이다. 인류의 진정한 역사는 고통의 역사이지만 그것에 대한 것을 책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역사상의 영광스러운 전쟁 때문에 고통받았던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선택했던 예수의 결단의 중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통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초세기 팔레스타인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에서 ‘가난한 이들’이 반드시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다. 가난한 이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걸인들이다. 그들은 병들고 불구라서 구걸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일을 찾을 수 없고 돌봐줄 친척도 없는 이들이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물론 병원도, 복지시설도 장애자 수당도 없었다. 빵을 위해서 그들은 구걸해야만 했다. 따라서 맹인들, 귀머거리들, 벙어리들, 절름발이들, 나환자들은 대부분 걸인들이었다.

또한 과부와 고아들도 있었다. 여자와 어린이들은 그들을 돌봐줄 사람들이 없었고 생계를 벌수도 없었다. 그들은 열심한 신자들의 자선과 성전 금고의 희사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는 기술 없는 날품팔이들도 포함된다. 그들은 자주 일을 찾을 수 없었고 농장에서 일을 하던 농부들이 있었다. 또 아마 노예들도 여기 포함된다 하겠다.

굶주림보다 더한 고통, 수치와 치욕

대체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전쟁이나 기근 때를 제외하곤 굶주림이나 빈곤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끔 배고프거나 목이 말랐으나 오늘날 굶주리는 수백만의 사람들과 달리 거의 굶주리지는 않았다. 가난한 이들의 근본적인 고통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수치와 치욕이었다. “…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루카 16,3)라는 비유의 청지기 같은 심정인 것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자선에 의지하였다. 서구인들보다 동양인들에게 이것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었다. 중동에서 위신과 명예는 음식이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돈과 권력과 지식은 인간에게 명예와 지위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 그는 독립하게 되고 타인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진짜 가난한 이들, 이웃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신은 부양할 사람이 없는 이들은 사회 계층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 그에게는 명예도 위신도 없다. 그는 거의 인간이라 할 수도 없다. 그의 삶은 의미가 없다. 오늘날 서구인은 이러한 체험을 인간존엄성의 상실이라고 표현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난한 이들”이라는 말은 모든 억압받는 이들, 타인의 자선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든 이들을 포함한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가난한 이들”이라는 말은 결국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이들, 즉 마음이 가난한 이들(마태 5,3)이라는 의미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by Kiko Arguello

죄인, 사회의 낙오자

죄인들은 사회의 낙오자들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율법을 어기고 중간계층의 전통을(교육받고 덕 있는 이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어기면 업신여기고 하류계층으로 취급받았다. 다시 말하면 죄인들은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가난한 계층이었다.

이들 죄인계층에는 죄를 짓거나 청결치 못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포함되었다. 즉 창녀나 세리들, 도둑, 목자, 놀이꾼과 고리대금업자들이었다. 세리들은 사기꾼이나 도둑으로 간주되었다. 직업 때문에 그들은 세금액을 마음대로 조정하여 징수할 수 있었으며 또 그중 얼마를 자신들이 차지할 권리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세리들은 또한 정직하지 못했다.

비슷하게 양치는 목자들도 그들의 가축떼를 남의 땅으로 끌고 들어가 풀을 뜯게 하고 소풀을 좀도둑질해 먹는 혐의를 받았다. 또 많은 경우에 그것이 사실이었다. 양치기들과 기타 직업들은 늘 사회적인 누명을 달고 다니는 것이었다.

죄인들 중에는 또한 사제들에게 십일조를 바치지 못하거나 안식일 규정과 청결예식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한 율법과 관습은 매우 복잡하여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차 몰랐다. 그 당시의 교육이란 율법과 그 세칙들을 배우는 것이었다. 문맹자들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율법을 모르고 비도덕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율법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요한 7,49) 무식한 농민들은 힐렐같은 가장 진보적인 바리사이파 조차에게도 덕행과 신심을 전혀 깨우칠 가망이 없는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출구없는 인생

죄인들은 사실상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원칙적으로 창녀들은 세밀하게 규정된 참회, 정화, 보속의 절차를 통하여 정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식에는 돈이 필요했는데 창녀들의 돈은 불결하고 무용하게 여겨졌다. 세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죄인이 된다는 것은 영원한 열등의 위치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죄인들은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그들에게 여러가지 하느님의 벌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은 특히 질병에 약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비참한 환경에서 오는 신체적 악조건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심리적인 여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불행과 질병, 무질서 등은 악령의 장난이라고 여겨졌고 그래서 당사자들과 그 조상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하느님이 벌을 내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요한 9,2 : 루카 13,2-4).

이것은 대부분의 동양인들처럼 유다인도 하느님이 인간에게 영을 불어넣어 그 힘으로 인간은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황홀의 경지 등 예외적인 행동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것으로 여겨졌으며 반면 병약한 상태는 악령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억눌리고 박해받는 이들” “사로잡힌 이들”(루카 18 : 마태 5,10)의 처지였다. 오늘날 이들은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 혹은 낙오자들로 사람들측에 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인구 대부분이 이러한 사람들이었다. 복음에 나타나는 군중은 대부분 이러한 처지에 놓인 이들이었던 것이다.

자발적인 사회적 낙오자, 예수 

중간계층은 극소수였고 더구나 상류층은 그보다 훨씬 적은 숫자이었다. 전문직업인들, 상인들, 목수나 어부들은 존경받는 중간계층이었다.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열혈당원들은 모두 중간계층으로 교육받은 이들이었다. 열혈당원에는 특히 예루살렘 말기에 이르러서는 율법에 대하여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도 합류했으나 일반적으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은 종교-정치적 운동에 거의 참여할 수가 없었다고 하겠다.

상류계층과 권력층은 엄청나게 부유했으며 사치와 낭비를 누리고 있었다. 중간계층과 상류층 사이에는 경제적 격차가 굉장히 컸었다.

상류층에는 헤로데와 그 귀족문중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세금징수로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사제장 계층도 성전세와 십일조의 수익을 장악하였으며, 장로계층은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수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중간계층 출신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당시 사회의 하류층에서도 가장 낮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스스로 선택하여 사회의 낙오자가 되었던 것이다.

왜 예수는 그렇게 했는가? 복음에 나타난 답변은 매우 분명하다. 그것은 연민 때문이었다(마태 14,16; 9,36 : 마르 6,34 : 루카 7,13 : 마르 1,41 : 마태 20,34 : 마르 8,2).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이 예수에게 그렇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면 다가오는 절박한 재앙으로 비롯될 막대한 고통에 대해서 예수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연민이 고통에 대한 대답일 뿐이었다. 처절한 고통을 동반한 엄청난 참변의 재앙은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했을 것이며 연민과 배려로 가득찬 예수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었다. 그는 울기조차 하였다(루카 19,41).

그러나 사랑과 동정을 느끼기만 하면 어쩔 것인가? 이 엄청난 고통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세례자 요한의 응답은 회개의 세례였다. 예수의 방법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 이었다(루카 4,16-21; 7,22 : 마태 10,7-8).

[원출처]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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