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희망의 예언자"-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의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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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희망의 예언자"-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의 바탕
  • 가톨릭일꾼
  • 승인 2018.09.1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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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떻게 살았나-1

교종 바오로 6세 이후 교회는 매해 1월 1일을 <평화의 날>로 선포하였다. 1986년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가 택한 주제는 “평화는 경계선이 없는 가치관이며 남-북, 동-서, 어디에나 단 하나의 평화가 있을 뿐이다”라는 주제이었다. 

우리시대를 위한 예수: 사회운동의 영성

예수도 그 당시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 속에서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였는가? 비슷한 점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전 세계적인 차원은 물론 아닐 것이다. 예수의 응답은 그 당시 진퇴양난의 상황을 벗어나 새로운 이상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사회는 기존하는 사회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예수는 이것을 새로운 사회, 하느님나라라고 불렀다.

하느님나라의 온전한 의미와 예수의 사상의 정당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 말씀의 온전한 예언적 의미가 드러나고 우리의 개인적인 동기가 심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회운동의 근본적인 기초라고 하겠다.

 

하느님나라로의 회심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가슴과 마음과 삶 전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이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이러한 근본적 회개를 매우 다른 방식으로 가르쳤다고 전한다.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4). 그러나 예수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와 세례자 요한 시대의 이스라엘 상황을 이해하면서 그들이 회개를 다른 방식으로 가르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예수 시대의 유다 사회구조에 관하여 알 필요가 있다. 로마는 기원전 63년 이스라엘을 정복했고 심한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사람들을 지배하였다. 이스라엘에는 두 주요계층이 있었다. 하나는 부유한 이들이며 다른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실제적으로는 이들 모두가 로마의 막중한 세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부유한 이들은 로마 지배 하에서도 부와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로마에 저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 부유한 계층은 두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사두가이라는 세속귀족 집단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귀족 집단으로 사제장과 바리사이파들이었다. 이들은 상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함께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사두가이파는 부재지주로, 사제장은 종교세로, 바리사이파는 더 많아지는 율법규칙으로 이스라엘 사회의 지배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 중에는 로마를 전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력혁명이라고 믿고 있었던 열혈파가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기원후 66년 로마를 이겼으나 70년 로마는 재공격으로 이들을 무참하게 멸망시켰으며 135년에도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반드시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은 아니었으나 유다인들에 의해 낙오자로 대우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세리, 나병환자, 창녀, 여자 그리고 악령들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었다.

공관복음은 모두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예언자와 같았다. 그는 유다인들이 로마에 저항한다면 닥쳐올 재앙을 예견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죄를 회개하여라. 너희 중에 어떤 이들은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수는 부분적으로 요한과 동의하였다. 예수는 “재앙이 올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나라가 왔다고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있다. 회개하고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여라”고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숙명의 예언자요 예수는 희망의 예언자였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의식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동맹하고 있다. 루카와 마태오의 산상수훈은 가난한 이들, 낙오자들, 죄인들이 하느님나라에서 우선권을 가진다고 말한다. 루카는 재물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데 장애물이 된다고 한다. 마태오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또한 마음으로도 가난한 이들이며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절실한 요구를 깨닫고 근본적으로 성령을 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 도와준다. 물질적 가난은 자동적으로 신성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의 가난으로 이끄는 물질적 가난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가 현존한다는 징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인간 상호관계에 기초를 둔 새로운 사회이다.

1)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새로운 관계가 하느님나라의 중심 관계이다(마태 23,8-12).

2) 이 새로운 관계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율법과 전통과 인습에 관한 두려움, 걱정,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마르 2,1-12; 7,1-15).

3) 그러나 이 자유는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자발적으로 우리는 서로를 섬기는 사람이 된다(갈라 5,1. 13).

4) 이웃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은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도록 모두에게 정의를 원하는 것이다(마태 25,31-46).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하는 교회

교회의 사명은 가난한 곳에서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 자신이 보다 분명하게 하느님나라의 징표와 성사가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사명은 하느님나라의 성장과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고발하고 세상 속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그러한 장애물을 없애는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1-4항).

[원출처]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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