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아나키스트, 리 호이나키 "내 영혼의 망명정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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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아나키스트, 리 호이나키 "내 영혼의 망명정부를 찾아서"
  • 한상봉
  • 승인 2018.09.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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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버벅대고 영 내 맘같이 움직이지 않을 때, 이리저리 조작해보다가 결국 ‘리셋’(re-set)을 할 때가 있다. 영 문제가 풀리지 않고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 우리는 ‘첫마음’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문제는 항상 바깥에도 있고, 안에도 있다.

거기서 내 영혼이 고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래서 맥이 풀리고 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잠시 나 자신에게 ‘망명’을 신청해야 한다. 공간적 이탈과 시간적 퇴행을 반복하면서, 내 영혼의 망명정부를 세운다. 방구석에 앉아서 그 망명정부의 내각을 구상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고, 기분좋은 상상이 나를 다시 살게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내게는 몇 번의 탈주(脫走)가 있었다. 그리고 그 탈주의 순간은 매번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라는 다소 거창한 간판을 달고 있던 생애의 첫 직장을 다닐 때, 그러니까 1991년이었다. 그해 레오 13세 교종이 발표한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노동헌장) 반포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노동자와 노동문제를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로 노동신학이란 걸 해 보고 싶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전하는 원론적 입장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마침 필리핀에 갈 기회를 얻어 여성노동자 사목을 하던 에밀리아나 수녀를 만났다. 그 수녀에게 노동신학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공부하려면 자료가 필요하니까. 그러나 돌아온 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어떤 노동자가 당신에게 노동신학이 필요하다고 말하던가요?” 물론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노동현장에 가본 적이 없고, 그들을 만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그저 학문적 욕구가 나를 이리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실천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학문은 효용성이 없고, 효용성이 없는 학문은 공부하는 이의 자기만족적인 에너지 낭비에 불과하다.

부끄러운 얼굴로 한국에 돌아와 생각했다. 노동신학은 노동자들이 자기 삶의 중심에서 하느님을 고백할 때 발설되는 신학이라고. 그래서 노동신학을 하려면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탈주는 간단했다. 연구소를 그만두고 ‘가톨릭노동청년회’ 출신의 선배들이 만든 의자공장에 취직했다. 타카로 레자를 박으며, 당시 양희경이 진행하는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듣는 재미에 몰두했다. 휴식시간에는 자재창고에서 스티로폼 위에 누웠다. 몸이 고단해서 신학은 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몸으로만 살았던 망명정부는 누추했으나 마음은 편안했다. “바닥에서야 자유롭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싶었다.

시인 김수영은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고. 김수영은 방만 바꾸었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고 말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공장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이어서 가톨릭노동사목 활동가로 일하면서, 3년 동안 많이 만나고, 많이 배우고, 많이 힘들었다. 많이 슬프고 또한 많이 행복했다. 이 당시 나의 망명정부는 국고가 바닥이 나도 어려운 줄 몰랐다. 아직 젊었으니까. 그 후에 대학원에서 정식으로 신학공부도 하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격월간 잡지 <공동선>에서 편집장도 하였다. 그러다 문득 그리고 갑자기 귀농을 결심했다.

또 다른 탈주의 계절이 온 것이다. 망명정부의 이름마저 흐릿해지면, 얼추 십년 주기로 조직을 떠나라고 나는 나한테 명령한다. 그 당시 결정적인 자극이 된 것은 스콧 니어링이었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읽으며, 경북 예천으로 상주로 떠돌다 전북 무주 산골에 정착했다. 2000년 처음 무주군 안성면 정류장에 내렸을 때 기억이 삼삼하다.

오월이었는데 덕유산 정상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이럴 수가 있는 거구나, 여기가 무주공산(無主空山) 무주구나, 하는 감탄사가 나를 이곳에 6년 동안 머물게 했다. 여기서 자식도 키우고, 전답을 일구고, 간간이 글을 쓰다 동터오는 새벽을 맞이하곤 했다. 보일러도 없이 구들방에서 지낸 겨울밤 음산한 대숲소리가 아직도 귀에 찰랑거린다. 그리고 나머지 4년은 경주로 옮겨 토함산 자락과 국립박물관 앞에서 살다가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생각하면 모두가 아득하다. 토함산 자락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던 1년 동안 새벽이면 토함산 석굴암 자리에서 움터 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았다. 박물관 앞 남천 너머 논자락에 자리잡은 집 마당에선 –비록 녹음된 것을 들려주는 것이지만 – 새벽마다 에밀레종 소리를 들었다. 유일한 이웃인 암자에선 이내 독경소리가 시작되었다. 그 비구니 스님이 돌아가시고, 우리는 경주를 떠났다. 오월이면 집 주변에 가득 대어놓은 논물 때문에 우리집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난 10년 가까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일하고, 지금은 다시 ‘가톨릭일꾼’이라는 망명정부를 다시 세우고 있다. 망명정부란 어디에도 매일 것 없이 ‘자기 영혼의 영토’를 구축하는 일이다. 그래서 망명정부가 닿을 곳은 오로지 아나키스트의 길일 수밖에 없음을 다시 새긴다. 그래서일까, 최근에 SNS 계정에 ‘가톨릭 아나키스트’라는 프로필을 달아 놓았다. 지금 ‘가톨릭’과 ‘아나키스트’라는 표식 위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가 그랬고, 리 호이나키가 그랬다.

실패한 탈주-회피는 망명이 아니다

리 호이나키

리 호이나키(Lee Honiacki)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 2007)의 서문을 쓰면서 “일상생활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둘러싸고 있는 불확실성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서 사상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속에서 인간의 성격이 형성되고, 우리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시간이라는 매개체에 육체를 부여하기 위해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상이라는 유령은 이야기라는 육체를 얻어야 사람이 된다는 말일 게다. 평생 책상머리를 떠난 적 없는 이의 실상이 의심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은 뇌에서 나오지 않고 손발에서 나와야 현실감을 얻는다. 시몬 베유의 스승이었던 프랑스 철학자 알랭이 ‘위(胃)의 철학’을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배고픔의 문제는 삶의 문제이고, 위장의 요구에 응답하는 사상이라야 인간을 구원한다는 말이다.

리 호이나키는 1928년 미국 일리노이주 링컨에서 태어났다. 대학시절에 토머스 머튼의 <칠층산>을 읽고 감동해 1951년 도미니코회에 들어가 뉴욕 맨해튼 빈민구역에서 사목하다가, 1960년 스페인어를 배우려고 푸에르코리코에 가다가 이반 일리치를 만났다. 이후 수도회를 나와 1967년 결혼하고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리 호이나키가 자신만의 망명정부로 탈주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 후였다.

1970년 봄, 맑은 어느 날 아침, 박사과정을 위해 시험지에 답안을 쓰고 있던 호이나키는 창문 바깥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감지하였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였다. 최루탄 가스가 터지고, 경찰들이 학생들에게 곤봉을 휘둘렀다. 그때 호이나키는 “나 자신을 위해 구축해왔던 안락한 세계가 그날 아침 그렇게 하여 무너졌다. 무엇인가 내 인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내 위(胃)가 나에게 알려주었다.”고 했다.

호이나키는 “이 나라가 도덕적으로 하나의 괴물로 변해버렸다면 내가 어떻게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가?” 물었다. 그리스에서 가장 혹독한 형벌은 공동체와 고향에서 추방당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서는 어떠한 덕행과 우정, 어떠한 좋은 삶도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호이나키는 “내게 열려 있는 가장 극단적인 행동은 항구적인 망명”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존의 원천에 자발적으로 등을 돌림으로써 –왜냐하면 그 원천이 심각히 오염되었으므로 – 나는 오히려 내 나라를 진실로 섬기고, 애국심이라는 덕행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산을 정리하고 베네수엘라로 떠났다. 그렇다고 베네수엘라가 ‘약속의 땅’은 아니었다. 그 나라 역시 부자들은 소비주의에 중독되었고, 가난한 자들은 시기심에 중독되었다. 결국 첫 번째 망명정부는 오래 가지 못했다. 몇 년 뒤에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오하이오주의 생거먼 주립대학에 취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애초에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과 부도덕에 항의하는 표시로 미국을 떠났지만, 이것은 너무 손쉬운 선택이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첫 번째 망명은 ‘회피’의 결과였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했다.

“내 나라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친구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거창한 언어로 표현되기보다는 나날의 번거롭고 피곤한, 그리고 흔히 사소한 보살핌, 충성, 사려깊음과 같은 행동들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다.”(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31쪽)

 

도로시 데이

아는 만큼 살다-도로시 데이, 베유, 스코트 니어링

대학교수 생활은 호이나키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가져다 주었다. 어느 날 대학 총장이 초대한 점심식사에서 만난 사람은 도로시 데이였다. 이미 1950년대 학생 시절에 도로시 데이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가톨릭일꾼운동이 좋은 일을 하고 있으며, 도로시 데이가 흥미로운 사람이라고만 기억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여러 해 동안 <가톨릭일꾼> 신문의 피상적인 독자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날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서는 집에 돌아와 소화불량으로 고통을 겪었다. 돌연히 대학교수라는 자신의 쾌적한 직업, 매력적인 집,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생활이 자신을 가두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도로시 데이는 미국인으로서 어떻게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 일꾼들은 비타협적인 평화주의자들이었고,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에 대한 급진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아나키스트들이었다.

“미국인으로서, 그들은 우리 시대의 현실에 대응하는 놀라운, 그리고 부패를 모르는 방법을 발견했다. 갈수록 커져가는 국가의 힘에 맞서서 그들은 아나키스트적인 비협력주의를 선택하였다. 무지막지한 소비주의에 맞서서 그들은 가난을 택하고, 기술주의적 추상화에 맞서서 그들은 자신의 이웃과의 친밀한 사귐을 택하고, 풍요와 성공을 구가하는 사회에 맞서서 그들의 남루한, 멸시당하는 자들 곁에 서있기를 택하였다.”(리 호이나키, 같은 책, 55쪽)

호이나키는 대학에서 품위 있게 살면서도 학생들을 가르침으로써 세상에 의미 있는 등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이후 도로시 데이가 의식의 안팎으로 출몰하며 그를 평화 속에 내버려두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나를 건드리고 쿡쿡 찔러댔다. 그녀는 내게 성가신 어떤 존재였다.” 이 때 호이나키에게 발견된 책이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의 쓴 <조화로운 삶>이다. 그들은 지름길을 택하지 않고, 세상의 주류와 타협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노동절약적 테크놀로지의 거짓 약속을 거부하고, 굶주린 사람들의 착취 위에 건설된 풍요사회의 거품 바깥으로 나가면서, 소박한 삶을 품위 있게 누리면서 빛나는 ‘삶의 기쁨’을 느끼는 방법을 발견했다. 게다가 웬델 베리의 <미국의 붕괴>는 아미쉬 공동체와 같은 농부들의 삶을 전해 주었다.

시몬 베유

지식인들은 이따금 ‘어떤 책’을 통해서 회심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 호이나키는 대학 교과과정으로 열리는 세미나에서 산업-기술사회에 대한 비판서들을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는 E.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반 일리치의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 자크 엘룰의 <기술사회>, 시몬 베유의 <뿌리를 찾아서> 등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지식인들은 이미 산업-기술사회가 제공하는 장밋빛 약속과 물신에 중독되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용기가 없다.

그렇지만 호이나키는 특히 시몬 베유에게서 자극을 받았다. 시몬 베유는 파시즘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1932년 독일로 갔고, 1934년에는 노동자의 세계를 몸소 알기 위해서 공장으로 일하러 들어갔다. 1936년에는 스페인 내란에 참가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갔고, 1941년에는 농장노동자의 피로에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바치기 위해 포도밭의 일꾼이 되었다.

이윽고 호이나키는 “나 자신이 실제생활에서 그녀가 몸소 보여준 범례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내가 학생들에게 베유를 읽게 하고, 그녀의 논리를 심각하게 고려해 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부정직한 짓인가”라고 고백했다. 시몬 베유는 사람이란 정신과 육체를 모두 써서 살아야 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역사적 순간에 적합한 태도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주었다. 호이나키는 7년째가 되어 정년보장 교수가 되기 직전에 대학을 떠났다. 두 번째 망명을 결정하자, 안정된 고소득 일자리와 아름다운 집, 몇몇 좋은 동료들과 지적 교류,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기회가 한순간에 시시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인간이란 얼마나 오묘한 존재인가.

삶의 실험-건강한 고립

호이나키는 남부 일리노이의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곧바로 북쪽에 위치한 40에이커의 비탈진 땅을 매입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살림살이의 대부분을 전문가들에게 맡겨버리고, 삶을 버티게 위해 돈만 벌어야 하는 근대인의 삶을 버리고, 남녀 인간들이 수천 년 동안 살아왔던 방식을 선택하였다. 일체의 보험을 버리고, 대지에 깃들어 사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었다.

“나는 한 장소와 거기에 살고 있는 생물들과 서서히 친숙해졌고, 사계절을 알게 되었으며, 한 특정한 토양에서 ‘집에 있음의 느낌’을 갖게 되었다. 나는 직접적 체험과 성찰을 통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하나의 새로운 우주, 감각적으로 풍부한 삶터 속으로 기분 좋게 걸어 들어 갔다.”(리 호이나키, 같은 책, 73쪽)

15년 동안 호이나키는 이곳에서 살았다. 삶의 중심은 ‘일상’이었다. 그는 “진실은 오직 몸을 통한 구체적인 체험 속에서 알 수 있을 뿐, 불완전한 언어를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호이나키는 한계 안에서 무한을 경험하였다. 그는 가청(可聽) 거리를 벗어나 들을 수 없었고(전화가 없으므로), 지평선을 넘어 볼 수 없었으며(텔레비전이 없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 접근하지 않은 채 도울 수 없었다. 그는 “타자와의 측량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와 나를 결합시켜 준 것은 바로 이러한 물질성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기도처럼 매일매일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작고 되풀이되는 행동, 보살핌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웃과 작물들은 나의 구체적인 돌봄을 요구한다.

이러한 삶은 ‘덧없는 시간의 세계 속에서’ 내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가르쳐 준다. 땅과 동물과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존을 유지하면서, 자연의 리듬과 조화를 이룬 노동과 보살핌의 섬세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다만 하나의 피조물일 뿐, 내가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려준다. 농사를 지으며,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한껏 기쁨을 누리겠지만, 언젠가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이것을 호이나키는 사회적 주류와 떨어져 사는 “건강한 고립”이라고 불렀다.

한때 정기적인 수입이 필요해서, 호이나키가 인근에 있는 주립대학에서 취직하면서 얻은 성찰은 더욱 고무적이다. 그는 교수로 취직한 것이 아니라 ‘부엌일꾼’으로 일했다. 자신의 이력을 자랑처럼 들이미는 일이 얼마나 역겨운 일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동안, 그는 자유의 감각과 정신의 가벼움을 경험했다.

고용의 위계질서 가운데 맨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은 고 노회찬 의원과 랄프 엘리슨이 <보이지 않는 인간>에서 언급한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중요한 사람들이 퇴근한 뒤, 또는 출근하기 전에 빗자루와 진공청소기를 들고 나타나는 사람들이다. 호이나키는 특히 식당 노동자들을 위한 화장실과 갱의실이 있는 지하층 구역 청소를 좋아했다. 내일이면 다시 더러워질 이 덧없는 청소를 하면서 그는 ‘하느님이 창조한 덧없는 세계의 신비’를 고요히 묵상했다. 그리고 세상의 시궁창에서야 자유롭고 거룩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중심은 어둡고, 천한, 낮은 곳에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모든 빛을 초월하는 ‘빛’에 감촉될 수 있다.”고 말한다.

거룩한 바보-애먼 헤나시

호이나키는 가톨릭일꾼이며 아나키스트였던 애먼 헤나시(Ammon Hennacy. 1893-1970)를 우리시대를 위한 모범으로 추천한다. 그는 1917년 스물네 살에 징병거부를 이유로 애틀란타 연방교도소에 8개월 동안 갇혀 있었다. 그에게 허용된 유일한 책은 성경이었고, 그 독서가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헤나시는 ‘한 사람의 혁명’(one-man revolution)을 제안했다.

“나는 만약 내게 용기가 있다면, 사람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오늘 당장 살기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사회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자기자신의 변화를 위한 시도이다.”(리 호이나키, 같은 책, 327쪽)

에먼 헤나시

그는 국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의미로 세금납부를 거부했으며, 일용 농업 노동자로 살았으며, 매년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 기념일에는 연방정부 건물 앞에서 피켓을 들고 단식하며 군비경쟁에 항의하였다. 그는 국가권력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며, 스스로 안전과 특권을 포기함으로써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고통에 합류하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전략과 계산이 아니라 그저 ‘용기’뿐이었다. 그리고 유머와 상상력이 유쾌한 저항을 촉발시켰다.

그는 사람들이 피켓시위와 단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질문하면 이렇게 답했다. “아뇨,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확신합니다.” 그는 도로시 데이를 만나고선 평생 버림받은 이들에게 수프와 방을 제공하고 신문 만드는 일을 도왔다. 저항운동과 애덕의 일은 기도와 단식으로 힘을 받았다.

호이나키는 이런 ‘거룩한 바보’들에게서 영감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자신의 망명지였던 농장을 떠나 이반 일리치와 함께 일하며, 이런 사상과 경험을 남일리노이대학과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독일의 올덴부르크대학과 브레멘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제 망명지는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 주류세력의 요청에 내가 ‘아니오’라고 발음하는 모든 곳에서 망명정부가 발생한다. 

아나키스트,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 아름다운 족속

가톨릭일꾼의 공동창립자였던 피터 모린은 ‘푸른혁명’(Green Revolution)을 주장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늪 한가운데서 탈(脫)자본주의의 섬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 섬은 주류사회에 통합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공식적인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망명정부’인 채로 남아 있을 공산이 크다. 이런 위태로운 망명정부에 오히려 매력을 느끼는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적게 소유하고 충분히 존재하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속도를 접고 마차를 타는 사람들이며, 자전거에서도 내려 걷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걸어서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서 바보인 채로 고결한 사람들이다. 이반 일리치와 리 호이나키가 그랬고, 시몬 베유와 도로시 데이가 그랬다.

이런 사람들은 ‘슬픈 족속’이다. 시인 백석은 ‘흰 바람벽 있어’에서 애틋한 사람들을 호명하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한 세상을 살면서 모두가 외면해도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런 사람들과 접속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정말 기꺼이 사랑하기 위해 자유를 선택했던 사람들이다. 가야파의 저택에서 암말 못하고 심문을 받던 예수의 쓸쓸한 뒷모습을 기억하는 자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이미 걸어서 천국에 닿았으니.

[출처] <녹색평론> 2019냔 1-2월호(<가톨릭평론> 원고 수정보완)
[원출처] <가톨릭평론> 2018년 8-9월호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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