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처음에는 매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이 받아들여짐은 기본이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자신이 이미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에야 비로소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삶의 첫 번째 걸음은 우리가 이미 받아들여졌음을 온 존재를 다하여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약간 차갑고 또 믿을 수 없는 느낌을 주는 “받아들여진다”는 말 대신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더 따스하고 부드러운 말인 “선택된다”는 단어를 쓴다면 이해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들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선택된 사람들
“선택되었다”는 말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주기를 바란다. 이 말은 당신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말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 선택된다는 말에 대하여 우리는 저항감을 느낄 수 있다. 나 자신도 그런 경험이나 느낌을 가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서품된 사제로서 나는 자주 특별한 사람으로, 다르게 행동하도록 선택된 사람, “따로 있는” 사람으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저 “나일뿐”이라는 사실을 보이거나 증명하려고 자주 노력했으며 특별한 존경을 받고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한가지 방식은 그저 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특별한 사람, 선택받은 사람으로 여겨질 때에 당신은 쉽사리 박해를 받거나 칭송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이 “받아들여졌다”거나 “선택되었다”는 생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선택된 사람임을 알게 될 때에 나는 특별한 사람으로 보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나의 고유함을 알게 되고 그래서 나를 알고 싶고 가까이 다가오고 싶으며 나를 사랑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로서 하느님의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 우리를 보고 있으며, 고유하고 특별하며 소중한 존재들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되었다”라는 말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를 더 깊고도 넓게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내면으로부터 그 의미를 이해하기를 바란다. 영원으로부터, 당신이 태어나고 역사 속에 들어오기 훨씬 그 이전부터 당신은 하느님의 마음속에 존재하였다. 당신의 부모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친지들이 당신의 선물을 인정하기 훨씬 전부터, 또한 당신이 선생들이나 동료들 그리고 고용자들이 당신을 격려하기 훨씬 전부터 당신은 이미 “선택된” 것이다.
사랑의 눈길이 당신을 소중하며 무한한 아름다움과 영원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고 보았다. 사랑이 선택할 때에는, 선택받는 존재의 고유한 아름다움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갖고 선택하며 그 어떤 사람도 배제된다는 느낌없이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도...너는 선택받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위대한 영적 신비와 만나게 된다. 즉 선택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거부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신비이다. 우리의 세계처럼 경쟁적인 세계에서 이러한 신비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선택되는 것에 관한 나의 모든 기억들은 다른 사람들이 선택되지 않는다는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내가 축구팀에 뽑히지 않았을 때, 보이스카우트 순찰팀의 지도자로 뽑히지 않았을 때, 혹은 내 서품 동기생들 중에 연장자로 뽑혔을 때나 특별한 상을 받아 명예가 주어졌을 때에는 항상 웃음 뒤에 눈물이 그리고 눈물 뒤에 웃음이 따라 왔다. 경쟁과 비교가 이처럼 항상 있었다.
얼마나 자주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필요로 했던가? “뽑히지 않았다고 하여 네가 좋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다른 어떤 사람이 조금 더 좋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 조차도 거의 위로가 되지 않았는데, 거부되었다는 느낌이 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뽑히고 최고로 선택되었을 때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내 자리에 있지 않아서 얼마나 실망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 때에 나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듣고 싶어했으리라: “네가 뽑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좋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네가 그저 조금 더 나을 뿐이야.”
그러나 다시 한번 이런 말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내가 느끼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 속에서 선택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다른 이들과 비교되어 따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지극히 경쟁적인 우리 사회 안에서 “선택된 사람들”은 특별한 관심과 주의의 대상이 될 뿐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수많은 잡지들이 스포츠, 영화, 음악, 연기와 기타 탁월한 방식의 “영웅”에게 바쳐지고 있다. 그들은 “선택된” 존재들이고 독자나 청취자들 혹은 시청자 등 그들에게 빠진 사람들은 그들을 알거나 가까이 다가가는 것으로부터 어떤 대리적인 기쁨을 추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뽑히는 것은 이런 의미들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포용한다. 다른 사람들을 덜 가치있다고 여기며 거부하는 대신 그들의 고유함을 인정하면서 받아들인다. 그것은 경쟁적인 것이 아니라 연민 어린 선택이다. 우리의 정신은 그러한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아마도 우리의 정신은 그 사실을 결코 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이러한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선택된 사람들”, “선택된 탈렌트”, 혹은 “선택된 친구들”에 대해 들을 때마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엘리트들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고 질투, 분노 혹은 회한의 느낌들을 갖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선택받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공격, 폭력 그리고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받음”의 의미에 대해 세상에 항복해서는 안된다. 그 의미가 끊임없이 오해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주장해야 한다. 당신이 선택받은 존재라는 진리를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 이 진리는 당신이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는 근저이다. 이 진리와의 접속을 잃어버릴 때에 당신은 자기 거부의 유혹에 노출되며 그러한 유혹은 사랑받는 존재로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가능성을 침식시킨다.
선택받았다는 것은 내가 정말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나의 내면을 볼 때에나 내 주변을 볼 때에 “너는 특별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넌 그저 수백만 사람들 중의 또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야. 너의 삶은 그저 먹어야 할 또 하나의 입에 불과하고 너의 요구들은 그저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에 불과할 뿐이야”라고 말하는 어두운 목소리에 압도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목소리들은 끝없이 강해지는데, 특히 수많은 부서진 관계들의 시대에는 더욱 더 드세지는 것이다. 많은 아이들은 이 세계에서 자신들이 참으로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절대로 가지지 못한다. 그들의 불안한 웃음뒤에는 자주 이런 질문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정말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인가?”
어떤 청소년들은 그들의 어머니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기도 한다: “난 정말로 너를 원하지 않았어. 그런데 임신된 것을 알았고 어찌됐든 너를 낳기로 결정했지… 넌 그저 우연히 생겨난 아이일뿐이야.” 이런 말들이나 태도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선택되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게 한다. 우리들의 세상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에게 생명을 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쉽사리 절망, 실망 그리고 자살에까지 이를 수 있는 자기비하감으로 일생 고통을 겪으며 살 수 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현실 한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진리를 끊임없이 인정하고 주장해야 하며, 세계가 우리를 선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
우리들의 부모, 친지, 형제, 선생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선택받음을 결정하도록 허락하는 한 우리는 효율성과 지배라는 자체의 기준과 안건에 따라 우리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며 질식시키는 세계의 그물망에 갇혀있게 된다.
영원으로부터 주어진 선택
이 진리를 다시 주장하는 것은 자주 끈질긴 노력을 요구하며 일생이 걸리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세계 역시 우리를 자기의혹, 자기비하, 자기거부와 절망의 어둠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작업을 집요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자기비난이 강한 사람일수록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권력에 의해 쉽사리 이용당하고 조작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위대한 영적 전투는 우리의 선택받음을 다시 주장함으로써 시작되며 절대로 끝나는 법이 없다.
어떤 인간존재가 우리를 보기 훨씬 전에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스런 눈길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자신의 울음이나 웃음소리를 듣기 전에 하느님은 귀를 활짝 열고 우리에게 귀를 기울였다.
이 세계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걸기 훨씬 전에 영원한 사랑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들의 귀중함, 고유함 그리고 개별성은 시간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우리의 짧은 일생의 현존 속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영원으로부터 존재했고 또한 영원을 통하여 지속될 사랑으로 우리를 선택한 하느님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거부로 둘러쌓여 있을 때 어떻게 우리 자신의 선택받음과 만날 수 있겠는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이것은 참으로 영적인 투쟁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투쟁에 관하여 많은 지침과 안내들이 있는가? 몇가지를 설명해 보기로 하자.
먼저, 당신은 항상 당신주변의 세계에 대한 참 모습을 이해하려고 계속 노력해야 한다. 이 세계는 조작과 지배, 권력에 대한 굶주림으로 가득찬 세계이고 궁극적으로는 파멸을 가져오는 세계이다. 세계는 당신에 대하여 많은 거짓말들을 하고 있으며 당신은 이 사실을 자신에게 상기시킬 수 있도록 충분히 실제적이 되어야 한다.
당신이 상처를 받거나 공격받고 거부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이렇게 자신에게 당당히 말해야 한다: “이러한 느낌들은 아무리 강할지 몰라도, 나에 관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야. 진리는, 비록 지금은 그것을 똑바로 느낄 수 없어도 내가 하느님의 선택받은 자녀이고 하느님의 눈에는 소중한 존재이며, 영원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이고 영원한 사랑의 품속에서 안전하게 있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야.”
두 번째로, 당신은 이러한 당신의 진리가 말해지고, 선택받은 존재로서의 당신의 심오한 신원이 상기되는 자리들과 사람들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선택받음을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택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감정이나 느낌 혹은 욕망들이 우리를 자기 거부의 늪 속에 고립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회, 회당, 수많은 신앙공동체들, 다양한 지지그룹들은 이러한 진리를 상기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우리와 인간성을 공유하는 제한되고 때로는 부서진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를 자주 지적해준다. 즉, 하느님의 눈에 우리 모두가 소중하다는 진리를. 이 진리는 우리의 중심으로부터 부상되는 내적인 진리에 그치지 않는다.
이 진리는 또한 우리를 선택한 존재에 의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삶과 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 진리로 돌아가도록 요청하고 있는 역사 속의 수많은 남녀들에게 계속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회한보다 감사를 선택하라
세 번째로, 당신은 당신의 선택받음을 항상 기념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을 선택해준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를 말하는 것이고 당신의 선택받음을 기억시켜 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감사함은 당신이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거룩한 선택으로 태어난 존재라는 의식을 깊게 해주는 가장 풍요로운 방식이다.
감사해야 할 경우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지 못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친절할 때에, 일이 잘 풀려나갈 때, 문제가 해결될 때, 관계가 회복되고 상처가 치유될 때 등 감사해야 할 구체적인 이유들이 있을 때가 많다. 그 감사를 말로, 꽃으로, 편지로, 카드로, 전화로 혹은 간단한 애정의 표현으로 한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 또한 우리에게 비판적이고 회의적이게 하며 심지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친절할 때 우리는 그의 동기에 의심을 가지며, 일이 잘 되어갈 때에 더 좋게 풀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다시 생겨나기도 한다. 관계가 회복될 때에도 항상 “언제까지나 계속될까?”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상처가 치유될 때에도 또 다른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그냥 남아 있는다…
이처럼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는 곳에는 항상 회한을 가져야 할 이유가 발견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결정을 해야 할 자유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감사하거나 회한을 가지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순간에 선택받음을 인정하거나 그늘 쪽에 더 초점을 맞추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늘진 편을 보기로 고집할 때에 우리는 점차 어둠 속에 머물고 말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매일 우리 공동체에서 보고 있다.
우리 공동체의 핵심요원들, 정신적인 장애를 지닌 남녀들은 회한을 느껴야 할 수많은 이유들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모두 깊은 외로움, 가족과 친지들로부터의 거부, 삶의 동반자를 가지고 싶은 채워지지 않은 욕구, 그리고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는 끊임없는 두려움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대부분 회한을 갖지 않기로 선택하며 그들의 삶에 주어진 수많은 작은 선물들에 대하여 감사하기로 선택한다. 그 선물들은 저녁식사에의 초대라든가, 며칠간의 피정 혹은 생일잔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우정과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과 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일상생활이라는 선물들이다.
그들은 회한보다 감사함을 선택하며 이러한 모습들은 비록 정신적인 장애자들은 아니지만 똑같은 선택을 해야하는 그들의 협력자들에게 희망과 영감의 큰 원천이 되고 있다. 우리는 빛을 계속 붙잡을 때에 점점 더 빛을 발하게 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를 사로잡는 사실 하나는 우리가 감사하기로 결정할 때마다 새롭게 감사해야 할 것을 발견하는 일이 더 쉬워진다는 사실이다. 사랑이 사랑을 낳듯이 감사 역시 감사를 더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의 집에는 방이 많다
나는 위의 세 가지 방법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당신이 자신의 선택받음을 느낄 수 있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 방법들은 선택받은 존재로서의 나의 삶에 영적인 지침들이 되고 있다. 이러한 지침들을 실천하는 것은, 특히 위기의 때에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지침들을 알기 전에 나는 끊임없이 불만을 말하고 내가 받은 어떤 거부를 곱씹고 복수할 방법들을 구상하곤 했다. 그러나 이 지침들을 내 마음 속 깊숙히 간직할 때에 나는 그늘을 넘어 나의 진실의 빛 속으로 갈 수 있다.
“선택받은 존재”에 관한 생각들을 마무리하기 전에 나는 이 진리가 타인들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선택받은 존재들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또한 끊임없이 상기할 때에 우리 안에는 곧 다른 이들에게도 그들의 선택받음을 밝혀주고 싶은 깊은 갈망이 생겨나게 된다. 우리가 더 나은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는 대신,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귀중하고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하는 대신 선택받음에 관한 우리의 자각은 다른 사람들의 선택받음에 대하여 눈을 열게 해준다. 이것이 바로 선택받음에서 오는 큰 기쁨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선택받았다는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곳에는 모든 사람에게 고유하고도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하느님의 눈에 우리 자신이 소중하다는 진리를 깊게 깨닫고 신뢰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소중함과 하느님의 마음속에 있는 그들의 고유한 자리들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이 사실은 나로 하여금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인 헬렌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수년전 새벽공동체에 그가 왔을 때 나는 그가 무척 낯설었고 약간 무섭기조차 했다. 그는 자신의 작은 세계 속에서만 살았고 그저 소란스러운 소리만 냈으며 어떤 사람에게도 접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헬렌을 더 알게 되고 그를 신뢰하게 되자, 점차적으로 그는 자신에게서 벗어 나왔고 웃기 시작했으며 전 공동체에 큰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나는 헬렌의 고유한 선함을 발견하기 위하여 나 자신의 선함과 만나야 했음을 깨닫는다. 나 자신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나를 인도하는 한 나는 헬렌이 나에게 그의 아름다움을 보일 수 있는 여백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선택받음을 주장한 후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나에게 주는 한 존재로서의 헬렌과 함께 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경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고유함 속에서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우리자신의 자리를 주장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품는 사랑, 결코 비교하지 않는 사랑을 체험할 수 있으며 하느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형제자매들과의 관계에서도 안전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충실한 삶인지 알고 있다. 우리는 수년동안 친구였었다. 처음에는 어떤 비교와 질투, 경쟁이 우리들의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각자의 고유함 속에서 더 편안함과 확신을 가지면서, 다는 아니어도 이런 경쟁심의 대부분은 사라지고 각자의 선물을 더 인정하게 되며 격려하게 되었다.
나는 당신과 함께 하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그것은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어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때문에 당신이 기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 역시 내가 당신을 방문할 때에 기분이 좋다. 그것은 내가 당신의 친절과 선함과 당신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선물들에 경탄하고 있음을 당신이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당신의 선물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서라기보다 당신이라는 존재 때문에 나는 경탄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우정이란 각자의 선택받음을 그리고 하느님의 눈에 각자가 소중함을 서로 격려하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당신의 삶과 나의 삶, 그것은 각각 하나일 뿐이다. 아무도 당신의 삶이나 나의 삶을 이전에 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앞으로 당신의 삶이나 나의 삶을 다시 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인간실존이라는 모자이크의 고유한 돌들이다. 그것들은 값을 셈할 수 없으며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선택받음은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삶에 기초이다. 선택받음을 주장하고 견지하는 것은 일생에 걸친 투쟁이지만 일생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것을 더 풍요롭게 인정할수록 사랑받는 존재의 또 다른 측면을 더 쉽게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축복 받음이라는 측면이다. 이제 이 축복 받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원출처] <사랑받는 사람의 삶 Life of the Beloved -세상 속에서 영적인 삶을>, 헨리 나웬,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1999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