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려면 낯선 침묵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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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려면 낯선 침묵을 받아들여야 한다
  • 캐더린 도허티
  • 승인 2018.05.1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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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핵심으로-18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기도는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도의 집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들은 기도의 집으로, 암자로, 혹은 광야로 도망가고 싶다. 그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살고 싶고 기도하려고 한다. 그들은 견딜 수 없는 상황, 현대 도시 생활로부터 도망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괴롭히는 것으로부터 도피하는 또다른 길인가?

만일 후자가 사실이라면, 궁극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곧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고독 속으로 들어갈 때 떨쳐버릴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우리 자신이므로. 다른 한편으로, 이 사람이나 혹은 저 사람을 어떤 기도에 참으로 초대하는 하느님의 목소리일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의 의지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진출처=pixabay.com

많은 기도의 집들이 생겨났으나 곧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의 집을 시작했으나 거의 유지할 수가 없다. 다른 이들은 싸움과 어려움 속에 비극적인 끝을 맺었다. 왜? 알 수가 없다. 다만 기도의 집이나 암자에 사랑과 평화가 없다면 그것이 기도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다.

왜 기도의 집들이 생겨나고 있을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냥 주위를 돌아봐도 온갖 악이 퍼져있다.” 그러나 우리의 다음 질문은 이래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악으로부터 도망쳐야 할까 아니면 그 한 가운데로 들어가 싸워야 할까?” 그리고 실제의 질문은 이렇다: 나는 악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광야에서 살아감으로써? 외딴 곳에 삶으로써? 도시에 머물고 지냄으로써? 지금 내가 있는 곳에 남아 있음으로써?

우리의 기도는 삶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하루 종일 기도하며 지낼 수 있다. 우리는 수도회의 신비가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공중에 떠오르고 오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험은 언제나, “그들의 열매에 의하여 너희는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마태 7,20). 기도는 만일 우리가 우리의 기도로 변화한다면 그때 비로소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면 기도는 열매를 맺을 것이고 틀림없이 맺어야 한다. 그 열매는 하느님이 받아들일 열매다.

기도의 집이나 광야 같은 곳을 마치도 기도하는 유일한 길로 말한다면 잘못이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의 집을 만들어야 한다. 그곳에 고요히 있는다. 우리 자신 안에서, 내면을 향하는 여정에서 하느님을 찾으라. 하느님이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고독의 삶으로 부르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하여 우리의 광야를, 기도의 집을 내면화하라.

기도와 고독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행위이고 그의 생명 자체다. 기도는 사랑하는 마음속에서 지속되고 치통이 고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아니면 즐거움이 고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고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도는 존재하기 위하여 고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때때로, 고독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군중으로부터 벗어나 광야 같은 고독 속으로 도피할 수 있을 때에만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우리는 기도에 관하여 실제적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 앞에 고요히 머무는 것이다. 기도에 관하여 질문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고요히 머물러야 한다.

누가 기도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가? 오직 하느님 만이 설명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책에서 기도에 관하여 읽을 수 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고, 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정수는 전달될 수 없다. 우리 중의 그 누구도 기도에 관하여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아무도 하느님 이외에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가 하느님일 때, 기도는 왕과 그가 신부로 선택한 사람이외는 비밀로 남는다. 기도는 고요함이다. 기도는 고요하며 사랑을 나눈다.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이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누가 묘사할 수 있는가? 사랑의 기적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고요하게 머무는지 누가 말해줄 수 있는가?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움직이고, 우리와 함께 놀고, 우리와 친구가 되며, 우리와 함께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쁨으로 울부짖는 것을 누가 말해줄 수 있는가? 우리는 고요하게 머물고 기다려야 한다. 하느님 몸소 올 것이고 그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 줄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모든 것이 내면화되면, 아마도 하느님이 우리들을 고독으로 부를 것이다. 고독은 특별한 소명이다. 하느님이 말씀한다, “나와 함께 광야로 들어가 밤낮으로 기도하자. 나는 네가 어둔 밤 속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고독 속에 있기를 바란다.”

고독이 당신의 소명이 아니라면, 그리고 고독을 기도와 혼동한다면, 홀로 있어보니 기도를 전혀 할 수 없으며, 당신의 고독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고독에 환멸을 느낄 때에 우리는 기도도 마찬가지로 뿌리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고독의 성소에 한 부분인 특별한 외로움이 있다. 그러나 외로움은 또한 그것이 침묵의 한 부분이므로 보통의 그리스도교적 성소의 한 부분이다. 진정으로 기도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를 에워싸고 그것이 터져 나오도록 하기 위하여 낯선 침묵이 필요하다. 이 침묵은 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내적인 상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이런 침묵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갖는 것이다. 기도하기 위하여 고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내적인 침묵은 필요하다. 내적인 침묵이 있으면 우리는 어느 때라도 기도할 수 있다. 심지어 누구와 말할 때에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평화를 가져오는 환경이 도움이 된다. 그런 환경은 베네딕토회의 한결같은 이상이 되어 왔다. 그렇다고 그런 환경이 반드시 수도원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 가족이나 공동체일 수 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내적인 침묵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이면 된다. 그래서 혈연의 공동체, 본당 공동체 대학그룹 등 어떤 그룹이나 환경이 되어도 좋은데, 다만 중요한 것은 그곳의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그들의 적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할 때, 우리가 하는 비판은 원한에 찬 비판이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데 실패한다면,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사라지고, 우리의 기도는 참으로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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