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들과 목사들은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무슨 특별한 선물을 받는가? 그들은 다른 이들이 보도록 돕기 위하여 제시할 수 있는 비전을 갖고 있는가?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그들 존재의 원천에 더 가까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구속되어있지만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싶은 조건들을 더 깊히 알고 있고 느끼며 보고 있는가?
만일 이 질문들에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우리가 삶을 기념하도록 그들이 정말로 우리를 도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정당하게 떠오를 것이다. 사람들을 하느님의 신비의 핵심으로 이끌도록 따로 구별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맹목적이고, 길을 모르거나 하느님의 옥좌에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결코 사람들을 그렇게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사제 서품이란 서품을 받는 당사자가 두려움의 벽을 넘어있으며, 살아있는 존재들의 하느님과 친밀한 만남 속에 살고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자 하는 뜨거운 갈망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고 긍정한다는 것이다. 서품이란 그 사람이 하느님께 복종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이해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체험을 하도록 길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장엄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은 그가 삶의 기념을 가능하게 하고 싶다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기도의 사람들만이 다른 이들을 기념으로 이끌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도의 사람들과 만나는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쉽게 얻을 수 없지만 강하고 깊은 어떤 원천으로부터 기도의 사람들이 권능을 이끌어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자유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독립을 주는데 그것은 권위적이거나 거리감이 있지 않다. 오히려, 자유는 그들에게 주변 사람들의 즉각적인 필요와 가장 긴급한 욕구 위에 설 수 있게 한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깊은 영향을 받지만 그것들에 의해 자신들이 무너지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그들은 주의깊게 듣고, 자기확신적인 권위를 갖고 말하지만 쉽사리 흥분하거나 과민해지지 않는다.
말하거나 행동하는 모든 것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이끌고 있는 비전을 표현한다. 그 비전에 그들이 승복하는 것이다. 비전은 그들에게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날카롭게 구분해준다. 그들은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드는 것에 무감각하지 않지만, 그런 것들을 자신의 비전의 관점에서 보며 사람들의 요구를 다르게 평가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들을 때 기쁘고 만족하지만 어떤 파벌을 형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사람에게만 배타적으로 매달리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이 확신있고 단호하게 보여도,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들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분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이 비전, 이상을 존중하는 내적인 자유를 갖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 자신들을 목적에 이끄는 안내자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하여 인상적으로 자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자신들의 존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속 생동감을 느끼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그 첫 번째 모습들을 보았고 너무나 거기에 이끌려서 그들의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선이 그 확실함을 잃어버린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산다. 이런 사람은 삶을 단지 기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새로운 세계를 원하도록 도울 수 있다.
「창조적인 사명」에서
[원출처] <Henri Nouwen>(Robert A. Jonas, Orbis, 1998)
[출처] <참사람되어> 2004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