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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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5.0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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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역사: 신앙의 진전]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구약 시대의 하느님과 신약시대의 하느님을 전적으로 다른 별개의 두 개체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한편으로는 분노의 하느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야훼는 처음부터 사랑과 신의의 하느님이셨다. 그는 한 민족을 창조하셨고 그들을 당신만이 이루어 줄 수 있는 미래로 인도하셨다.

신약성서를 보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가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은 그녀의 삶 속에 온전히 들어 오셨으며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심으로써 육체적으로도 개입하셨다. 예수님은 그 분 존재의 시초부터 하느님께 온전히 열린 분이시며, 예라는 응답이 인격화되신 분이시며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진 분이셨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11장은 구약의 모든 사건을 신앙이 걸어온 역사로, 아직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희망하던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확신속에서 충실하게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는 사람들의 역사로 그리고 있다. 그 장의 전문을 인용하기에는 너무 길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유명하게 된 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카인과 아벨은 둘 다 하느님께 번제물을 바쳤지만 하느님은 아벨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제물만을 받으셨다. 에녹은, 들은 바에 의하면, 하느님을 너무나도 깊이 신뢰한 나머지 죽지 않고 곧장 천국으로 불러 올리심을 받았다. 이 일은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가깝게 만든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사실,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다가올 홍수에 대해 알려주신 것을 믿음으로써 노아는 방주를 축조하면서 이웃들로부터 놀림을 받았지만 자신과 가족들을 살릴 수 있었다. 믿음으로의 초대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 하느님이 그의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도착하게 하였다. 사라는 믿음으로써 아이를 가질 나이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시험받았다. 이사악 역시 굳은 믿음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아들 야곱과 그 아들 요셉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조상들은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굳은 믿음을 지켰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약속한 땅으로 이끌어 주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며 일평생을 살았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께서 참으로 그들을 당신께로 이끌어 주셨음을 알게 되었다.

모세는 파라오의 궁전에서 편안한 삶을 살수도 있었지만 대신 믿음 안에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살며 그들과의 연대 속에서 고통 받는 삶을 선택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노예 상태로부터 구하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이끌고 에집트를 나와 사막을 건널 때 그를 인도해 준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다. 이스라엘이 예리고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약속한 땅을 정복한 것도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기드온, 삼손, 사무엘, 다윗과 다른 예언자들에게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원수를 정복하고, 왕국을 세우고 기적을 행한 것은 모두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가능했다.

사람이 되신 말씀, 그리스도에게로

그러나 이 모든 역사가 궁극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곳은 어디인가? 서간의 저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 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리 12,2)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인성과 삶 속에서 지난 2000년간의 계시가 완성되었다. 구약의 모든 기록들은 사람이 되신 말씀, 그리스도로 귀결되었다.

계시를 살펴보고 있자면 우리는 그것이 2000년간 변화해 왔고 발전되어 온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변하지 않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시라고 할 때 변한 것은 그 분이 아니라 우리일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가 아니면 발전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은 발전하며 그 경험에 대한 그들의 이해 역시 발전한다. 세대가 바뀌고 그들이 한층 심화된 헌신과 비전으로 옮겨갈수록 그 이해 정도는 점차 성장하며 깊어진다. 발전하는 믿음은 믿음의 여정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늘어나고 여기에 덧붙여 신뢰가 증가하면서 이루어진다. “교의의 발전”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는 발전하는 믿음이 그리도교적인 구원 역사의 첫 편인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불어 성장하는 믿음을 가진 개인들의 삶이나 공동체의 체험들 속에서 이것이 구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믿음이 성장하는 양상은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의 믿음이 성장하는 양상과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믿음이 성장하는 보편적인 양상이다.

발전하는 믿음

발전하는 믿음은 당신이 반드시 믿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삶 속에서 검증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를 소급해서 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도달한 지점에 이르러서야 당신은 어떻게 거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주님께서 처음부터 당신을 어떻게 이끄셨는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믿음의 순례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나 믿음의 생활을 지금 막 시작한 이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는데, 그것은 아직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해를 하기 시작하고 주님께서 시작부터 궁극적으로 그들이 도달한 지점까지 어떻게 이끌어주셨는가를 보게 된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초기 생활을 돌아보노라면 평범함 중에서 비범함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초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평범해 보인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성전을 복구하기 위한 벽돌을 구걸하고 돌아다닐 때, 그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중세 교회의 복구라는 과제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베네딕토 성인이나 이냐시오 성인 도로시 데이와 마틴루터 킹과 같은 분들도 초기에는 자신들이 어떤 길로 인도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하느님이 자신들로 하여금 질서를 확립하고 새로운 운동을 펼치라고 부르시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가고 있는 방향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당연히 어느 정도의 암흑기를 거쳐야만 했다. 후에,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의 길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는 것, 주님께서 맨 처음부터 거기에 계시며 그들을 계속해서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렇듯, 당신의 삶 역시 그럴 것이다. 매일 매일의 나날들은 너무나 평범하게 보인다. 그 날들이 중요했었다고 어느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면, 3년, 10년, 혹은 20년, 우리는 그 당시에는 지나쳤던 의미를 발견한다. 우리는 그 평범한 날들의 중요성을 발견한다. 무의미가 의미심장함으로 바뀐다.

우리의 과거는 현재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속량되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신의와 선하심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분은 우리가 모르는 동안에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노력을 계속 하고 계신다. 그것을 깨달은 날, 우리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믿음의 눈으로 알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선물을 받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와 항상 함께 있었다.

믿음의 여정 4단계 

믿음의 여정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믿음이 발전해 나가는 4가지 단계, 혹은 차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첫번째 단계에서 사람들은 하느님과 그 분 사랑의 실재를 알게 된다. 이전에는, 아주 자주, 하느님은 하나의 이름이나 개념에 지나지 않았으나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과 어떻게든 마주치게 되면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하느님이 자신들처럼 선택된 사람들 혹은 참된 교회만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 시작하나 그 분의 사랑이 자신들의 응답에 달렸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들은 은총이란 조건부로 받는 선물로 하느님은 선하게 살면 자신들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계명을 계속해서 지켜나간다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이란 자신들이 노력할 때만 자비를 얻을 수 있는 동의로 생각하며, 자신들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번째 단계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한계가 없으며 조건이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나 이보다 더한 것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하느님이 사람들이 선하고 악한 것에 상관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자각하고, 정의롭거나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이 그 모든 일을 저 위의 천국 어디쯤에서 우리와 아주 동 떨어진 곳에서 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모든 행위의 과정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마침내, 네번째 단계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인간의 삶과 상호 관계 안에서 육화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이 되신 말씀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닫게 되고 점차 하느님이 자신을 통해서도 똑같이 활동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시며 자신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 분을 체험하게 된다. 그들은 사랑하시는 분, 그리고 구원하시는 분이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이 세상에 보내시는 은총의 통로가 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바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

이 네 단계의 세 단계를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볼 수 있다; 네 번째 단계는 신약성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유대의 계시 끝 부분에 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이 그들에게 지키고 살아야 할 계약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몇몇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구원이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일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돌파구는 복음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퍼지고 교회가 팔레스타인을 벗어나기 시작한 신약에 이르러서야 마련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믿음이란 그러므로 이 네 번째 단계에서의 믿음을 말한다: 그것은 국가와 문화를 뛰어넘어 일반화되고 진정 보편화된 믿음이다. 동시에 그것은 개인적이고 참으로 구체화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삶 속에 내재된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제도 교회의 믿음은 이 중 두번째 혹은 첫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상-벌 위주의 도덕의식과 천국에 가기 위한 방편으로 계명을 지키는 윤리체계 -이런 믿음은 두번째 발전 단계에 속한다. 종교적인 배타성, 구원은 교회의 일원에게만 적용되고 그 밖의 사람들을 제외시키는 것- 이것은 믿음의 발전 단계의 두번째에 해당한다. 매우 자주 교회는 신약의 계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구약 시대의 믿음의 양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같은 문제는 여전하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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