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첫번째 장을 읽을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그것이 과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것은 영원한 현재,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현재에 관한 이야기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살던 시대에 선포하였고, 그것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영원한 진리임을 알려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세기의 저자 역시 자신들의 시대에 만난 말씀을 적었으나 그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 적용되는 진리를 선포하는 영원하신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느님과 인간, 세상의 좋은 것, 고통을 야기시키는 죄에 대한 영원한 진리에 관해 쓴 것이다.
하느님의 첫 창조
창세기는 하나가 아닌 두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창세기 1,1-2,3에서는 혼돈을 질서로 변화시키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쉬시는 하느님을 그리고 있다. 2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데, 남자를 창조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연을 창조하고, 마지막에 가서 여자를 창조한다. 고대의 저자들은 두개의 이야기가 틀린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두 이야기 모두 영감이 넘치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하느님만이 홀로 하느님이시며 다른 모든 것은 그 분의 창조물이며 그분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좋다는 진리이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첫 창조 설화에서 명확히 볼 수 있다. 매일의 창조 작업을 마치신 하느님은 당신께서 하신 일을 보시곤 "좋았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엿새째 되던 날 그 분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는 다시 한번, “그래, 정말 좋구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일곱째날 휴식을 취하신다.
이 문장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밝혀내야 할 일이다. 그것보다는,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간에, 하느님께서 그 일에 책임이 있으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 세상이 세상을 창조하지도 않았다. 하느님이 이 모든 창조를 이룩하신 것이다.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신학적인 용어로 정리하자면, 그 이야기는 모든 것이 은총이고, 모든 것이 선물이며,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분이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먼 옛날이 아닌 여기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만드시는 분이시고 우리 자신을 무상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다. 그 분은 자연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비단 자연 만물 뿐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인 본성과 좋은 것은 모두 주신다. 그것을 선물로 받는 이상 우리는 그것을 모두 즐겨야 한다.
이 구절이 두 번째로 지적하고 있는 점은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힘들게 일하신 후 휴식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유대의 저자들은 이것을 안식일의 거룩한 기원으로 보았고 그 안에 깊은 종교적인 중요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매일 지나치게 일을 하고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능가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말로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조차도 일주일 내내 일만 하시지는 않았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모든 것이 그 분의 손안에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이 우리하기에 달린 듯 일을 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이 사실을 믿고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우리가 가로채 스스로 하려고 하고 있다. 몇 장 후에 우리는 인간이 하느님을 능가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첫번째 창조설화 말미에서 우리는 성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주님 안에서의 안식이라는 주제에 대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아담과 이브
창세기 2장에서 두 번째 창조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는 아담과 이브로 대변되는 모든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해 강조하고 있다. 이 두 이름은 모두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리스어로 아담은 “남자” 또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지 또는 흙에서 유래한 말로,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인간과 흙의 상관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브란 “생명”을 뜻하는 말로 그것은 그녀가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상징적인 어머니라는데서 유래한다 (창세기 3,19-20). 그러므로 아담과 이브는 모든 인간, 전체 인류를 대표한다. 그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오래 전 특정 기간에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영원한, 심지어 지금까지, 진리로 인정되는 사실에 대한 기술이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신화적으로 그린 초상이다.
그 이야기는 남자가 여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을 이해할 수 있으며, 여자는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이해할 수 있고, 그 둘 모두 하느님을 떠나서는 자신들의 인간성을 이해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서로를 떠나서는 불완전할 수 밖에 없으며, 그 둘은 하느님과 일치할 때만 온전한 인간일 수 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그들의 삶은 천국이다. 과거에도 그래 왔고 지금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 안에 계신 그 분 성령의 숨결을 느끼고,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에 감사할 때만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과 다른 이들과의 조화를 이루며 사는 천국의 상태는 낙원으로 상징된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들과 함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자신 및 세상과 평화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낙원에서 모든 자연은 이런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원래 의도되었던 내용이다;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세상 일들이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나? 우리는 어떻게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는가? 성서의 저자는 제3장 멸망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들로부터 소원해진 문제에 대해 번뜩이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낙원 추방 이야기
이야기에서 여자와 남자는 금지된 과일을 먹음으로써 주님을 어기고 결국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아주 바보 같은 얘기라고 할 수도 있다; 하느님은 왜 그들에게 한번의 기회를 더 주시지 않으셨을까? 그 속의 깊은 의미야말로 가장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가 깨질 때마다 우리는 더 이상 천국을 맛볼 수 없다. 일치를 깬다는 것은 순수하고 열린 동료애 안에서 삶을 나누는 공동체를 잃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고는 낙원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않음으로써 그 분을 신뢰할 것을 요청하신다. 그들은 그 과일을 먹으면 자신들도 하느님 같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의지하는 대신 인간의 힘을 믿는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마자 그들은 곧 자신들이 갖고 있던 힘을 잃게 되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힘을 얻는 방법도 포기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알몸을 보게 되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것은 태어날 때 우리가 겪는 상황과 정확히 똑같다. 이것이 인류의 “원죄”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맨 처음에 두고 싶어한다. 우리는 독립적이고 싶어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음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그것은 성서의 하느님이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고, 완전하게 사랑하시는 분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그것을 창조하셨다. 그 분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실 필요가 없었으나 그것을 주셨다. 그 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진리는 단순하지만 우리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한다. 대신 우리는 현실에서 도망쳐 천국이 아닌 다른 곳에 다다르게 된다.
결국 우리를 낙원에서 쫓으신 분은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과 용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일치의 삶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내쫓았던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이미 조화로운 삶이 아닌, 인간이 이미 죄에 빠진 그러한 세상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피조물로서 공통의 경험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성서의 말씀과 달리 그들은 이제 우리에게 이방인이 되었고 원수가 되었다; 한 분 뿐이신 하느님이야말로 인간성의 원조이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자신마저도 이방인처럼 느끼곤 하는데,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면서도 정작 그 삶이 유래한 곳은 바로 보지 않는다. 이렇게 행동하고, 거짓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원죄를 이어받고 다시 물려주게 된다.
혹자는 그것이 그 이야기의 전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인들의 근시안적인 사고로 우리는 종종 역사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성의 일치가 완전하게 실현된 것은 예수님 이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감을 받은 저자들은 아니라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대답하며;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을 떠나기 전 야훼께서는 인간이 거짓을 깨닫게 되고 그것의 근원을 부수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창세기 3,15). 그들은 유혹을 극복하고 기질을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인류는 승리할 것이다. 대지의 자녀들은 다시 한번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성서의 저자들은 그 날이 요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과 상호교류 하시는 하느님의 양상을, 하느님이 자신을 내어주시고 인간이 일치를 거부하는 그 양상을, 하느님이 계속해서 생명을 내어주시는 양상을 깨달았다. 그 양상이야말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노아와 홍수, 바벨탑의 이야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모습인 것이다.
얼마 안 있어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하느님과의 단절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도 소원하게 만들고 그것은 모든 의사소통을 단절시키는 살인이라는 궁극적인 고립으로 상징된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다른 이들에게서부터도 떨어져 나가게 된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아담과 이브의 다른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자녀들도 그를 이어 살아간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주님을 알지만 대부분은 모르고 지낸다. 소외, 경쟁과 부패가 지상을 덮어버린다.
노아와 홍수 이야기
창세기 6~10장에서 저자는 선과 악에 관한 우화를 삽입한다. 노아와 홍수의 이야기는 주기적인 홍수로 종종 뜻밖의 재난을 당한 중동 지방의 고대 설화와 유사하다. 이야기 작가들은 흔히 그런 재난을 통해 교훈을 전달하고자 하는데, 히브리인들에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인간의 악과 하느님의 선함이라는 보편적인 교훈을 들려주고 있다.
홍수를 겪어봐서 알겠지만 그것은 가히 혼란스러운 경험이다. 삶의 질서는 파괴된다; 당신이 일궈 놓은 모든 것은 휩쓸려버린다. 그와 같은 일이 하느님과 다른 이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을 경우 우리에게도 생길 수 있다. 삶의 조화가 깨진다; 우리가 목표로 일해 온 것이 무의미해진다. 대홍수는 결국 악의 자연적인 결론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시대에 걸쳐 일어난다. 성서의 저자는 왕국의 멸망을 통해 이스라엘에도 그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접 목격했다. 이 이야기에서 그는 이와 같은 일이 온 세상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죄악과 사회적인 혼돈 속에서도 주님을 믿는 한 사람이 있었다. 노아의 이야기는 신앙의 형상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인간의 악이 초래한 종말을 맞기 훨씬 전에 야훼는 그로 하여금 방주를 짓게 한다. 사막 한 가운데서 이런 큰 배를 짓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노아는 하느님을 믿었다. 그는 평생 하느님을 믿었고 그 같은 행동은 신앙의 자연스러운 단면이다. 이웃들은 그를 비웃었으나 그는 계속해서 배를 만들었다. 그는 그의 가족들과 가축이 다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배를 건조한다; 방주 속에는 때가 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생명이 충분했다. 하늘이 갈라지고 인간의 사악함이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세상의 악이 씻겨 내려갔으나 주님을 아는 사람은 구원되었다. 신앙은 구원의 방주이다.
그 이야기는 하느님이 이 땅을 새롭게 하시는 것으로 끝난다. 과거의 실 수는 깨끗이 씻겨지고 인간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동물들이 방주에서 나오고 창조가 다시 시작되었다. 혼돈은 화합으로 변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맹세가 다시 승리한다.
이 모든 일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셨던지 하느님은 노아와 그 후손과 계약을 맺는다. 원시적인 계약 같으나 이것은 앞으로 올 일들의 전조이다. 무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의 행동양식을 깨달을 수 있도록 당신의 방식을 드러내신다. 사람들은 홍수가 나기 전 그랬던 것처럼 살인자를 처벌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동의한다. 그 답으로 하느님은 다시는 홍수로 이 세상을 벌하지 않으시기로 약속하신다. 악이 다시는 그전 같이 창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신앙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하신 약속이다. 그것은 생명 그 자체, “모든 살아있는 것”과의 계약이다. 하느님은 생명을 사랑하시고 그 분만이 죽음을 선포할 능력을 갖고 계신다.
바벨탑 이야기
그러한 일을 겪은 후 인간이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성서 저자들은 우리 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으나 상황은 여전히 안 좋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성서저자는 하느님에게 손자란 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아는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나 그의 자녀들 모두가 주님께 그만큼 가까웠던 것은 아니다. 서서히 죄가 다시 사람들 곁으로 스며들고 특히 자존심과 오만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저자는 언어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온 인류가 노아의 자손들이라면 어떻게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서 그는 다른 신화를 끌어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벨탑 설화이다.
11장에서 우리는 처음 두 인간의 죄가 훨씬 큰 규모로 반복되는 것을 보게 된다. 권력과 자만심이라는 욕망이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기로 했다. 그들은 곧바로 그 일에 착수했고 그것을 내려보시며 하느님은 “저런 또 시작이구나! 이번에는 또 어떻게 저들을 가르쳐야 하나?” 하고 생각하셨다. 주님은 그들의 언어를 교란시켰고, 언어가 서로 달라진 사람들은 더 이상 공사를 진행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온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유사점은 명백하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의 힘으로 성과를 내고,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한다. 우리는 정치적 군사적인 동맹을 맺는다. 경제 정책과 사회적인 압제로 그것을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협력하고자 하는 욕구는 곧잘 경쟁을 야기시키고, 일치를 위한 노력은 분열을 낳고, 성공에 대한 염원은 실패를 가져온다.
어떤 단체가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여기게 될 때면, 그들은 어김없이 다른 이들을 소외시키고, 단체 내에서 일어나는 권력 투쟁은 불화와 분열을 초래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느님의 방식이 아닌 사람의 방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방식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한다.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거기에 참여할 때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종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요일에 일을 하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본당, 교구 프로그램을 조직하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례와 프로그램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도록 하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우리가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때 문제가 생긴다.
신학까지도 인류의 실패작일 수 있다. 우리는 연구하고 배우며, 토론과 대화를 하며, 합의를 이루는 방법을 생각해 내고는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단순히 신학적인 정립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건 하느님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며, 성서 연구나 교리 분석이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발전되지 않는 한 그것은 또 하나의 말장난일 뿐이다. 그것은 고급 말 맞추기 게임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나 신학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원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우리가 가장 원하고 있는 것은 거룩한 삶이다. 하느님만이 당신과의 일치를 통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믿고 일치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중심으로 실천하는 것 뿐이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