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라고, 그리스도가 말했다. 그분이 오신 후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그늘에서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빛 안에서 살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이 없다면, 우리는 빛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둠속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죄의 어둠을 짊어진 그분과 동일시 하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속수무책과 무력함을 경험한다. 이제, 하느님은 우리를 낫게 할 수 있다. 신앙의 행위는 지성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어둠속에서 일어난다.
이 신앙의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 결국 빛이 그 속에서 터져 나오지만, 당장은 아니다. 먼저, 하느님이 말씀한다, “나를 믿는다면, 오너라. 물 위를 걸어라.” 사도들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는 것을 보고 어쩔 줄을 몰랐다. 베드로가 그분을 향해 물 위를 걷기 시작했지만 가라앉았다.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다(마태 14,22-33). 우리들 대부분은 두려워 발을 내딛지도 못한다. 사도 요한은 말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8). 우리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그런 종류의 사랑을 상상할 수도 없다.
불타는 집에서 생겨난 한 아이의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가 바깥에서 그를 부르고 있다, “뛰어내려! 뛰어내려!”
“아빠,” 아이가 울부짖는다, “아빠를 볼 수 없어요!”
“괜찮아,” 아버지가 말한다, “내가 너를 볼 수 있어.”
기술문명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뛰어내리는지 보고 싶다. 우리는 우리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치고 있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 발밑의 땅도 보려고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싶다. 혼돈으로 보이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두려워한다. 그곳은 실제로 완전한 질서가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자, 잘 정리하고 체계를 잡아요.” 하느님은 우리 기준에 따라 체계를 잡고 싶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조정할 수 없다 – 그러나 얼마나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하는가!
한편, 세상은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다. 구원을 애타게 청한다. 인간은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지, 언제 도움이 올지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울부짖는다. 예수님은 바로 구원하는 존재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을 사랑하고 그 고통을 완화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어떻게 왜곡되고 도움이 필요한 세상에 정의와 자비를 가져올 수 있는가? 오로지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다. 그리스도는 말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그러나 우리가 기도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대에 응한다. 그분은 “나 없이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5.7.)라고 덧붙였다.
기도는 역동적이고 거룩하다. 기도는 하느님과 만나고 그분과 일치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일치가 커짐에 따라, 우리는 기도가 의로움을 포함하고 있으며 기도로부터 하느님이 인류에게 주고자 하는 모든 선함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도는 우리의 온 존재를 다하여 살아계시는 하느님과 소통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 위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기도는 수천가지 모습을 띄는 이 응답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친지들과 세상의 필요를 위하여 소리를 내어, 단순하게, 아이처럼 기도하고 묵주기도를 하기도 한다. 잠잘 때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주님을 향하여 깨어있다. 기도할 때, 하느님을 경배할 때 사람들은 그들 자신보다 더 위대하고 더 우주적인 어떤 것에 사로잡힌다. 온 우주가 하느님을 경배하며 절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경배에 합류한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