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 아모스서, 미가서는 대체로 짧은 편이다. 반면 이사야서는 예언서 중에서도 가장 길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사야서가 적어도 세 명의 작가에 의해 서로 다른 시기에 집필 된 후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을 것이라는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첫 부분, 혹은 이사야서 1-39장은 8세기부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40에서 55장까지의 둘째 부분은 바빌론 유배 기간 중에 아마도 여성에 의해 쓰여졌던 것 같다. 그리고 56장부터 66장까지의 셋째 부분은 유배 이후에 쓰여졌다.
당신이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사야서를 읽는다면, 작가들이 서로 다른 상황을 기술하고 있으며 상황이 변하는 것에 발맞추어 주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백성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고자 했는지를 자세히 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1 이사야 예언자, 남왕국의 멸망을 예고하다
첫번째 저자인 이사야는 책제목의 주인공인 예언자 이사야였다. 미가처럼, 그도 유다에 살았고, 지도자와 백성들이 주님의 길을 버림으로써 남부 왕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부와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본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새벽부터 독한 술을 찾아 나서고
밤늦게까지 술독에 빠져 있는 자들아!
수금과 거문고, 소구와 피리소리 들으며 술이나 마시고
야훼께서 하시는 일에는 관심도 없으며
그가 손수 이루시는 일은 아랑곳도 하지 않는 자들아!
내 백성은 지각이 없어 포로가 되고
귀족은 굶어 죽고 민중은 목이 타 죽으리라."
(이사야 5,11-13)
스바니야, 하바꾹, 나훔은 북왕국이 멸망한지 한참 지난 후, 그러나 남왕국이 멸망하기 한 세대 전인 7세기 중반에 활동했다. 그들은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며, 사람들의 안전장치가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하고 사람들이 누리는 안락함이 그들에게 안락함을 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야훼께서 오실 무서운 날이 다가왔다.
득달같이 다가왔다.
야훼께서 오실 날,
역마보다 날쌔게 오는구나.
구인보다도 잽싸게 닥치는구나....
그때가 되면
나는 불을 켜들고 예루살렘을 뒤지리라.
팔자가 늘어져 스스로 말하기를
“야훼가 무슨 복을 주랴? 무슨 화를 주랴?”
하는 자들을 벌하리라.
그들의 재산은 털리고 집은 헐리리니,
일껏 집을 짓고도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일껏 포도 농사를 하고도 술을 빚어 마시지 못하리라."
(스바니야 1,14. 12-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젠가 겸손한 “아나윔”으로 되돌아가 여전히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사랑을 믿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회개하라고 외쳤다:
"너희는 야훼를 찾아라.
하느님의 법대로 살다가 고생하는 이 땅 모든 백성들아
바로 살도록 힘써라.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애써라.
그리하면 야훼께서 크게 노하시는 날
너희만은 화를 면하리라."
(스바니야 2,3)
슬픔의 예언자, 예레미아
예레미아는 예루살렘이 몰락하기 직전 예언자직을 맡아 백성들이 유배지로 끌려가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그는 예언자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인물로 알려져 왔는데, 그것은 그의 책 안에 자신에 관한 상세한 설명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장의 초반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그는 주님께 불평하며 울부짖는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고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예레미아 20,7-9).
그 양날을 세운 칼이 또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며,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할 때면 미움만 받는다. “저주 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예레미아 20,14). 그의 고통은 그를 거의 삼키다시피 하지만 자신 안에서 천둥처럼 울리는 말씀을 전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신전과 그것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여겨 우상화 시킨 사람들을 비난했다:
"너희는 생활 태도를 고쳐라. 그래야 나는 너희를 여기에서 살게 하리라. 이것은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 한다마는 그런 빈말을 믿어 안심하지 말라."(예레미아 7,3-4)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태인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성전을 갖고 있으므로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신전은 그들은 보호해 줄 수 없으며, 결국 보호해 주지 못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다시 성전을 비난하는 말씀을 하신다. 다시 지어진 성전은 또 다시 우상으로 전락해 버렸고, 하느님의 성령이 머무시는 곳인 참된 성전을 대신하게 되었다. 하느님이 지으시려 하셨던 성전은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이 오늘날 건설하시려는 교회는 벽돌과 회반죽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성전은 돌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 같은 공동체에서도 이런 사실은 간과되기 쉬웠다. 한번은 돌아오는 주말에 있을 피정 때 좀더 근사하게 보이기 위해 우리 건물을 손볼 일이 있었다. 내가 사람들을 심하게 독촉하고, 좌우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페인트를 엎질렀다. 나는 그 애에게 고함을 쳤고 그 순간 한 젊은이가 내게 다가와서는, “신부님, 일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쟎습니까? 신부님은 그걸 아십니다. 저희가 여기 모여 있는 건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쟎습니까.”
나는 내 자존심을 버려야만 했고 그것이 강론 시간에 내가 한 말임을 깨달았지만 지금은 그가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주님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 의지하기보다는 사람의 능력에 더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성당이나 학교, 수도원과 피정의 집들을 지으며 이 세상에 하느님의 성전을 건설하고 있다고 곧잘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령이 사시는 성전은 주님이 건설하시는 성전이다 - 서로 사랑하고 그 분께 의탁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성전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했듯이, 성전은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거진 사백년 가까이 유지되었지만 영원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기원전 587년에 파괴되었다. 영원한 성전은 오직 하나 뿐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곳도 오직 하나일 뿐이지만 그것은 돌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그 성전은 신앙의 공동체로서 항상 새롭고 절대 변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둘이나 셋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가능하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천천히 배워가고 있었다. 아 우리는 너무 더디게 배운다! 그 가르침을 배우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고 또 얼마나 자주 그것을 잊는지! 우리가 터득하기엔 너무 어려운 교훈이다! 이스라엘과 유태인, 믿음의 선조들은 그 모든 것을 쓰라린 경험을 통해 배워 나갔고 우리 역시 그래야만 한다.
지금까지 예언자들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조하거나 믿음이 부족함을 탓하였다. 그들은 사람들과 지도자들에게 하느님께 약속했던 그 믿음을 지키라고 끊임없이 호소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불충실함이 만연함에 따라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변하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충실하심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간헐적으로만 언급되었던 점이었다. 그러나 유배 기간 동안, 그것은 어느덧 중추적인 주제가 되어 있어 있었다:
하느님은 언제나 충실하시다. 그 분은 유배지에서까지도 당신과 함께 계신다. 당신은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분께서는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주실 것이다. 그 분의 자비는 영원하다; 그분의 선하심은 한이 없으시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