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세대를 통하여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왜 가능한 한 자연에 가까이 살려고 노력했는지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세 때의 성 베네딕도, 성 프란치스꼬, 성 부르노 뿐만 아니라 켄터키의 숲속에서 살았던 토마스 머튼 그리고 수도원을 뉴멕시코의 고립된 협곡에 지었던 베네딕도회 수도승들도 그렇게 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 살며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임으로써 평화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연은 참으로 말한다: 새들은 프란치스꼬에게, 나무들은 인디언들에게, 강은 싣달타에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에 더 가까이 갈수록 그것을 기념할 때에 우리는 삶의 핵심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자연은 우리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은 우리에게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소중해지려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또한 소중하다고 말해준다.
나는 점심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어느 평범한 식당의 똑같은 식탁에 매일 앉았던 때를 기억한다. 식탁 한 가운데에는 작은 꽃병 안에 아름다운 붉은 장미가 꽂혀 있었다. 나는 장미에 공감하며 바라보았고 그 아름다움을 즐겼다. 매일 나는 장미와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주간 내내 나의 기분은 행복에서 슬픔으로, 실망에서 분노로, 열정에서 냉담으로 변해가고 있었는데, 나의 장미는 똑같은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손가락을 꺼내어 만져 보았다. 그것은 플라스틱 장미였다! 나는 너무나 화가나서 그 식당에 다시 가지 않았다.
우리는 플라스틱 물건과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관한 실제이야기를 말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의 소리에 민감하게 깨어있다면 생명체 모두가 그들의 모습을 찾아가는 자연의 세계로부터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빵과 포도주가 우리에게 자연 전체는 실제 그 자체를 훨씬 넘어서는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는 성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빵과 포도주라는 성사적 징표들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일요일의 전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는 일을 우리에게 온전히 상기시켜줄 때에만 비로소 진실한 예배가 될 수 있다. 빵은 빵 이상의 것이다; 포도주는 포도주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이다. 그것은 일주일에 한번씩 일어나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자연이 밤낮으로 말하고 있는 신비에 대한 집중이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소리들에 대해 점점 더 깨어있게 될수록 또한 자연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이 커갈수록, 우리는 금반지 속의 사파이어처럼 자연 속에 깊숙히 박혀있는 인간존재로서의 우리자신들을 참으로 보살필 수 있게 될 것이다.
「창조적인 사명」에서
[원출처] <Henri Nouwen>(Robert A. Jonas, Orbis, 1998)
[출처] <참사람되어> 2004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