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 칼럼]
평소 도로시데이를 흠모하던 차에, 그분이 가장 즐겨 읽던 소설이 러시아문학이라는 글을 접하고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다시 읽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겉사람 뿐 아니라 속사람도 알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이참에 며칠 전 ‘여성’에 대한 남성의 몰이해에 대한 핀잔을 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 ‘하루에 책 한 권 읽기’에 돌입한 어느 여자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남자들이 쓴 소설을 읽다보면 정말 짜증난다. 여자들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였다.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톨스토이가 쉰 줄에 들어서 회심한 뒤로 아내와 심각한 갈등을 빚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백작이었던 톨스토이가 귀족생활을 청산하고자 하나, 아내는 내내 누려왔던 생활을 버릴 수 없었고, 결국 남편의 눈 밖에 나서 죽어서도 곁에 묻히지 못했다. 톨스토이에게 여자란 ‘안나 카레리나’처럼 본능에 충실한 천박한 족속에 지나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죄와 벌>의 소냐처럼 창녀지만 성자였던 여성이 없는 게 아니지만, 그가 심리적 천재를 발휘한 사람들은 라스콜리니코프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남자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의 천재가 여성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사실상 남자 사람이 주류를 형성한 문학세계에서 여성은 항상 ‘주변인’이거나, 상상 속의 여성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포함해 남자 사람들이여, ‘인간’을 알고 싶으면 여성작가들이 쓴 소설을 읽어라. 그들은 어쩌면 남자 사람들보다 훨씬 ‘개성화’된, 좀더 진화된 사람들일 공산이 크다. 잘 나가는 유명 작가 중에 남자들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정작 책을 읽고 사색하는 대다수는 여성일지니. 내가 가장 존경하는 두 사람이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오늘 알았다. 도로시 데이와 시몬 베유.
특별히 남성들이 주류를 형성하는 교회에서 여성은 ‘사람’일 수 없다. 그들은 혐오의 대상이거나, 아니면 성모 마리아처럼 ‘상상 안에서만 고결한 사람’이기 쉽다. 실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쉽게 소비된다. 여성들의 발언은 ‘위경(僞經)’이거나 참고사항이 될지언정 진지한 ‘정경(正經)’에 포함되지 않는다. 예수를 증언한 4대 복음서 가운데 여성의 이름이 오르지 못하는 까닭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를 가장 사랑했고, 그분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여인이지만,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교회에서 그(녀)들을 위한 자리는 없거나 없어졌다.
여성 평신도, 착한 신자 또는 소비재
이런 생각들이 들끓는 가운데, 주일 아침에 들려온 소식은 먼저 “터질 게 터졌구나”였고, 피해 여성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 역사 안에서 줄곧 침묵을 강요당하며 소비되어 왔던 여성’이라는 집단적 의미로 다가왔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일원이면서, 얼핏 보기에 사람 좋게 생긴 그 사제도 엉겁결에 교회역사 안에서 희생당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발생한 그 성추행 사건을 한 사제의 개인적 일탈로 본다면 오산이다. 예전에도 많았고, 지금도 ‘사실상’ 많고, 앞으로도 비일비재할 교회 성추행 사건의 틈새가 김밥 옆구리 터지듯 세간(世間)에 잠시 비어져 나온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지금 당장은 미투(Me Too)운동 차원에서 격렬하게 논란이 되고 있으며, 지난 9년 동안 보수정권에 빌붙어 먹던 언론이 ‘선정적 기사’라는 호재를 만나 먼지털이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문제는 수원교구에서 그 사제에게 ‘정직’을 먹이느냐, ‘면직’을 먹이느냐가 본질은 아니다. 이 사제의 스캔들은 ‘사실상’ 빙산의 일각이다. 본인의 입으로 고백했듯이 “내가 내 몸을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네가 좀 이해를 해 달라.”는 말은 절박해 보이고, 단순히 수양부족으로 돌리기에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사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상대 여성이 때로는 ‘착한 신자’로 보이다가, 때로는 “내 필요에 응답하는 (단순한, 의식 없는, 존중하며 상대의 의사를 물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아닌) 소비재”로 보이는 까닭이다.
다소 스펙트럼의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안에서 올라오는 욕구를 참느냐, 행동으로 드러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에 대한 사제들의 인식은 그다지 인격적이지 않은 게 문제다. 남성 사제 중심의 교회는 ‘교회의 주류인 여성 평신도’에 대하여 무지할 뿐 아니라, 사실상 그다지 관심도 없고, 관심이 있다면 여성이 혐오할만한 대상으로 떠오를 때뿐이다. 그래서 본당에서도 여성 신자들은 ‘배려 없이’ 지칠 때까지 마구 소비된다.
사제들의 성추행 배후에는 교회가 있다
사제들에게 여성 신자는 두 종류다. (복음서의 진짜 의미와 상관없이) 베타니아의 마리아처럼 존경의 눈초리로 사제의 얼굴만 바라보는 어리석은 팬클럽이거나 본당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마르타들뿐이다. 마리아들은 사제에게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허위의식을 지니게 하고, 마르타들은 사제들의 수족처럼 움직인다. ‘영혼이 없는’ 그들에게는 당연히 사목적 결정권이 없으며, 사제는 그들의 머리이며, 동시에 심장처럼 행동한다. 사제가 살면 너희도 살고, 사제가 죽으면 너희도 죽는다는 논리가 대세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결국 이번 성추행 사건의 배후는 ‘사실상’ 교회다. 사제들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가부장 문화이다. 여성과 관련된 스캔들이 발생할 때마다 교회가 취하는 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시쳇말로 “여자문제는 참아도 돈 문제는 못 참는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사제가 특정 여성과 관계를 맺었을 때, 교구에서는 통상 “사제도 남잔데 그럴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 문제로 횡령 등 교회재산에 피해를 입혔을 때는 사정이 다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쩌다 보니 특정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다는데, 하느님도 ‘사랑 그 자체’라고 가르치는 마당에 문제 삼기 어렵다. 교회법보다 상위법이 사랑의 법칙 아닌가? 이웃사랑 하겠다는데 무엇이라 말할까? 그러나, 성추행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이다. 문제는 사제들이 여성에 대해서는 유독 사랑과 폭력을 자주 헛갈린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여성 그 자체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때문이다.
여성은 실패한 남성, 또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2018년을 살고 있지만, 여성에 대한 인식은 성직자들의 복식과 언어만큼이나 중세(中世)를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오로지 남성만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까닭에 신성한 사제직분은 남성들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둔스 스코투스는 여성은 인류를 타락하게 만든 하와의 후계자이므로 인간의 구원을 담당하는 공직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이처럼 여성은 남성과 비교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라는 게 교회의 전통적 생각이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허약하게 태어나며 이성과 미덕과 기강 면에서 떨어지며 불안정하고 변덕스럽고 쉽사리 격정에 빠져들고 자신과 타인을 통제하는 능력이 뒤진다는 것이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심지어 여자는 “악마가 들어오는 통로”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는 수태의 형식요소가 남성씨앗인데, 자궁의 토양이 불결한 경우에 어머니를 닮은 남성을 낳거나 아버지를 닮은 여성을 낳거나 또는 어머니를 닮은 여성을 낳는다고 보았다. 즉, 여성은 수태될 당시에 이미 ‘실패한 남성’이거나 하나의 ‘기형’이라는 것이다. 비록 <여성의 존엄> 등 교황들의 변화된 여성관을 담은 문서들이 발표되어도, ‘독신’ 남성 사제들이 중심이 된 교회에서 여성들은 끝없이 경계해야 할 대상이며,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들을 교회의 ‘정상적인 사목적 파트너’로 인식할 수 없는 현실은 여성을 은연중에 ‘물건’처럼 취급하며,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소비의 대상’으로 만든다.
사제가 원하지 않는데도 달겨드는 여성이 있다면 ‘미친 년’이고, 사제가 원할 때 수용하는 여성은 사제들 욕망의 ‘착한 배설구’가 된다. 교회는 ‘사실상’ 우리 사회에서 양성평등의 사각지대이다. 상징적으로는 ‘여성사제 불가 원칙’이 보여주는 가부장적 교회구조가 그러하고, 독신서원을 통해 ‘여성성’을 상징적으로 버린 ‘독신자 여성 수도자’에 대한 우대정책이 그러하다. 교회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비롯된 하와만 기억할 뿐,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동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는 기억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 여성과 남성을 사랑하신다. 독신자뿐 아니라 유부남 유부녀도 사랑하신다.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신다. 이걸 믿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가부장권을 강박하는 나머지 생각은 역사적으로 끼어든 우상숭배의 결과라도 보아도 좋다.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복음서에서 남성 제자들은 수없이 예수의 질책을 받지만, 예수는 단 한 번도 여성을 꾸짖거나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지금은 사순절이다. 그 엄혹한 성주간에 남성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 앞에서 자리다툼을 벌이지만, 정작 예수 죽음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람은 여성이었다. 누가 역차별적 발언이라 부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복음서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예수에게, 그분이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있었다.
이참에 이번 사제 성추행 사건을 둘러싼 논란에 관해 몇 가지 의견을 덧붙이고 싶다.
1. 피해 여성의 고백에 지지와 감사를 드린다. 그분의 고백은 참 겸손하고 아름답다. 가족들의지지 역시 그분 가정이 얼마나 튼튼한 신앙에 뿌리를 대고 있는 공동체인지 느끼게 해 주었다. 이분들의 용기가 교회에 뿌리내려 있는 어두운 가부장적 편견과 도착된 성의식, 일그러진 교회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교회는 자신의 병고를 알면서도 마취제로 처방해 왔지만, 아무래도 수술대로 가야할 지도 모른다. 아픔이 클수록 성장하는 법이다. 이 말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 이번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정의구현사제단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 사제단은 자발적인 결사체로서, 사과문을 통해 “한 모 신부는 엄연히 사제단의 일원이며 형제이므로 그의 죄는 고스란히 사제단의 죄”라고 고백한 것은 도의적으로 필요하지만, 사제단 활동 중에 발생한 사건도 아닌 마당에, 이 문제는 사제단의 죄가 아니라, 사제들의 허물이며, 교회의 책임이다.
3. 성추행 당사자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개인적 친분도 없고, 저간의 사정에 대한 내막을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제직을 목숨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점과,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사제는 서품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며, 그리스도인 역시 세례로 완성되는 게 아님을 확인할 뿐이다.
4. 이 사건이 드러나자, 즉각적으로 수원교구에서 해당 사제에 대한 ‘정직’ 처분을 내리고, 교구장 주교가 특별사목서한을 통해 “공동 연대 책임을 지고 함께 회개하며, 올바른 사제상을 재정립하고 사제단의 쇄신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힌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게 공영방송의 힘인지, 이런 문제에 특별히 민감하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문제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제 성추행 사건들이다. 피해 여성은 ‘전수조사’를 요청했는데, 교회를 위해서도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해당 사제를 ‘정직’이 아니라 ‘면직’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면직이란 아예 신부 옷을 벗기자는 요구인데, 자칫 ‘해당 사제에 대한 혐오 또는 증오’가 배어 있는 발언은 아닌지 찬찬히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사제직무수행과 관련해 교구의 현명한 판단이 뒤따르기를 기대한다. 마녀화형보다 마녀가 출몰하는 이유를 먼저 살펴야 한다. 해당 사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필요하지만, 일벌백계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폄하적, 여성을 사물처럼 대상화하는 교회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형무소(刑務所)가 아니라 교도소(矯導所)다.
5. 그동안 교회는 자신을 세상보다 우월한 ‘완전한 사회’라고 믿어왔다. 교회는 세상을 위한 ‘교사’로서 가르쳐 왔다. 한국사회를 두고도 정의와 평화, 공동선과 민주주의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교회 자신에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다. 마치 교회는 정의와 평화, 공동선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서 면제받은 ‘성역’처럼. 그 성역이 무너지고 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복음은 양날을 가진 검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면 할수록 “과연 우리는 복음적인지” 더 끈질기고 명료하게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긴 글을 쓰고도 허망한 느낌은 왜인가? 나도 평신도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본당 사목위원으로서, 신학활동가로서 교회의 일부분인데, 이 모든 이야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스스로 묻고 있는 까닭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