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례는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일상적이고 또한 가장 거룩한 행위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진실이다. 너무나 인간적이지만 너무나 거룩하다; 너무나 친숙하지만 또 너무나 신비스럽다; 너무나 가깝지만 너무나 계시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점이 예수의 이야기이다.
그분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던”(필립비 2,6-8) 분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고자 했던 하느님의 이야기이다. 너무나 가까이 와서 우리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으며, 우리자신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이다. 너무 가까워 우리와 그분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고, 갈라놓는 것도 분열시키는 것도 거리를 만들어내는 아무것도 없다.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있는 하느님,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이다. 예수는 어떤 유보도 없이 완전히 우리를 위하여 당신자신을 내놓고 우리에게 넘치도록 당신자신을 주는 하느님이다.
예수는 보류하거나 그분의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분은 줄 것이 있으면 모두 준다. “먹고 마셔라, 이것이 나의 몸이고 이것은 나의 피이다...이것이 너를 위하여 주는 나다!” 우리 모두는 식탁에서 우리자신을 주고자 하는 이 욕구를 알고 있다. 우리는 말한다: “먹고 마셔라; 나는 이것을 너를 위하여 만들었다. 더 들어라; 네가 즐기도록, 더 튼튼해지도록, 그렇다,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가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을 주는 것이다. “나의 손님이 되주십시오” 하고 우리는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친구들에게 우리식탁에서 먹자고 격려할 때에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의 친구가 되어주고, 나의 동료가, 나의 사랑이 되어 주시오 나의 삶의 일부가 되어 주시오 나는 당신에게 내 자신을 주고 싶소.”
성찬례에서 예수는 모든 것을 준다. 빵은 단순히 우리의 먹을꺼리가 되려는 그분의 갈망을 말해주는 표지가 아니다. 포도주는 단순히 우리의 음료가 되려는 그분의 의지를 말해주는 표지가 아니다. 빵과 포도주는 내어줌으로써 그분의 몸과 피로 변한다. 참으로 빵은 우리를 위하여 주어지는 그분의 몸이고 포도주는 우리에게 부어지는 그분의 피다.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온전히 현존하므로, 예수도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 안에서 우리에게 온전히 현존하게 된다. 하느님은 수 천년 전 멀리 떨어진 한 나라에서 우리를 위하여 살이 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식탁 주변에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성찬례를 기념하는 이 순간에 우리를 위한 음식과 음료가 되고 있다.
하느님은 보류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준다. 그것이 바로 육화의 신비이다. 그것은 또한 성찬례의 신비이기도 하다. 육화와 성찬례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두 가지 표현들이다. 그러므로 십자기의 희생과 식탁의 희생은 하나의 희생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모든 인간에게 이르는 하나의 완전하고 거룩하며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이다.
「뜨거운 감동의 마음으로」에서
[원출처] <Henri Nouwen>(Robert A. Jonas, Orbis, 1998)
[출처] <참사람되어> 2004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