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하느님 불꽃의 심장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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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느님 불꽃의 심장 속으로
  • 캐더린 도허티
  • 승인 2018.02.2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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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핵심으로-7

"우리의 하느님은 다 태워버리는 불이십니다."(히브 12,29)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우리는 수백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중요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전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매일 태어나고 죽는데, 누가 그들을 알고 있는가? 누가 그들을 기억하는가? 시편의 저자는 인간의 일생이란 “그들은 아침 잠과도 같고 사라져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버립니다”(시편 90,5. 6.). 그리스도의 말씀은 수백만 사람들의 숨겨지고 소리나지 않는 삶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의 아버지와 내가 너희에게 가서 함께 살 것이다.” 사는 동안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세례성사 이외에, 성체성사의 양식 이외에 고백성사 안에서 심리학적인 확신과 용서라는 영적인 실제 말고, 이 말씀들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를 알려주는가? 그리스도는 삼위일체가 우리 안에 머물고 있다고 확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과 우리 삶의 정수다. 선명하고 깨끗한 샘물처럼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하는 출발점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지니고 있으며 거기에 대하여 말을 한다. 우리는 자신들을 의심한다.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처럼 느낀다. 이 정도는 심각하지 않다. 자신이 가치 없다고 보거나, 죄책감으로 가득하고, 어떤 심리 상담가도 고칠 수 없는 열등감으로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깔개를 흔들어 터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서 죄책감을 털어버려야 한다. 비를 가져와 우리 마음속에서 거미줄을 쓸어내야 한다. 하느님은 그분의 거처를 우리 안에 마련했다. 그분의 말씀은 선명하고, 정확하고, 단순하다. “나와 나의 아버지가 너희에게 가서 머물 것이다.” 그분은 단순하게 말씀한다, “우리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선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삶의 정수는 내 안에 머무는 삼위일체와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가는 내면의 여정이다. 어떤 아름다운 생각을 하든 간에, 성령에 의하여 얼마나 영감을 받든지 간에, 그것들은 모두 우리 안의 무한한 대양에서 길어 올린 한 물동이의 방울들에 불과하다.

하느님은 움직임이다. 하느님은 창조이고, 창조는 언제나 움직임이다. 하느님은 불, 사랑의 불이다. 하느님은 바람이고, 사도들에게 내려오는 성령의 바람이다. 그분은 파괴적인 바람이 아니고, 우리를 억압적인 열기로부터 깨끗하게 해주는 바람이고, 우리를 이 자리에서 붙잡아 다른 자리로 옮겨놓는 불이다. 이 모든 것은 상징적이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불이요 바람이요 움직임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하여 그 신비 안으로, 불꽃의 심장 속으로, 회오리바람의 눈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매일 안으로의 여정을 통하여 삼위일체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내 마음속에 머무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즉시, 우리는 이 새로워진 생명으로 형제를 끌어 안기 위하여 우리의 팔을 크게 벌린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진다, 형제를 만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해야 하는 내어줌을 실천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선택하여 함께 데리고 와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위를 향하여 서게 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삼위일체로 들어올린다.

 

사진출처=pixabay.com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톨스토이는 삼위일체에게 하는 기도에 관하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한 러시아주교가 그의 교구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 교구에는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잊힌 섬이 있었다. 세 은수자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가서 그들을 보고 싶었다. 결국, 그들은 그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이었다. 섬에 도착했을 때, 이 세 남자는 계속하여 반복하고 있었다. 섬에 도착하자 주교는 세 남자가 계속 말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분들은 셋이고 우리도 셋이네,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들이 알고 있는 기도는 이것밖에 없었다.

“당신들이 은수자들입니까?” 주교가 물었다.

“우리는 은수자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라고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기 위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그분이 셋이고 우리가 셋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교는 이 말을 듣자 약간 걱정이 되어 그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했고, 하루 온 종일 노력하자 마침내 기도를 배울 수 있었다. 주교는 그들을 축복하고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라고 격려했다.

주교가 탄 배가 바다 멀리 나가자, 셋 중 어떤 사람이 외쳤다, “이봐! 그 기도가 무엇이지?”

수면을 스치며 주교일행에게 다가오는 빛이 있었다. 그 빛이 가까이오자, 일행은 물결의 표면위로 빠르게 미끄러지고 있는 세 노인들을 보았다. 배에 가까이 가자, 노인들은 주교에게 외쳤다, “신부님, 우리는 당신이 가르쳐 준 기도를 잊어버려서, 다시 배우려고 왔습니다 – 그냥 배에서 우리에게 말해주십시오!”

주교는 성호를 긋고 말했다, “제가 여러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기도가 주님께 닿을 겁니다. 저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주교는 세 은수자 앞에서 깊은 절을 했다.

거룩한 사람들은 다시 바다를 건너 돌아갔다. 그들이 멀리 사라지자, 노래 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그분들은 셋이고 우리도 셋이네,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일어나 가라

하느님 그분 자신이 스승이다. 은총은 본성 위에 일하지만, 우리들은 물론 하느님의 직접적인 행위에 열려있고,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방법으로 그분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는 순간이 있다. 마치도 그분이 소리굽쇠에 음을 내는 것처럼, 그 소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바쁜 길 한 가운데에서나 혹은 깊은 고독 속에서, 기차 안이나 비행기에서, 혹은 붐비는 전철 안에서도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하게 그 소리를 듣는다. “지금!” 소리는 말한다. “지금! 일어나 가거라.” 이곳 혹은 저곳으로 가라. 이 사람에게 말하거나 저 사람에게 말하라. 일어나거라, 가라, 이 책이나 글을 써라. 일어나 이웃과 화해하거라. 일어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걸음을 떼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일어나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를 때, 그분은 고통을 통하여 선택한 사람들을 정화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을 따른다면, 돌을 맞거나 누군가 우리에게 침을 뱉을 것이다. “살덩어리”라는 욕설도 들을 수 있다. 1940년대 미국 남부 한 가운데 지방에서 내가 인종적 정의를 말했을 때 그런 욕설을 들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을 때, 가만있는 것이 응답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다. 그런 경우가 요나, 예레미야, 그리고 많은 예언자들의 체험이었다.

그럴 때 우리 안에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친다. 마치도 우리 존재가 산산 조각 나는 것 같다. 이것이 안으로 가는 우리 여정의 시작이다. 거룩한 삼위일체가 우리 바깥에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때가 기도의 순간이다. 긴 기도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기도가 아니다. 성찬례조차도 아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단순한 무엇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는 순간은 깨달음, 수용, 그리고 깊은 열림의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다만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것, 우리를 부르고 있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뿐이다. 우리를 부르는 것은 사랑, 우리의 연인이신 하느님이다. 그분은 우리 각자가 가장 깊이 염원하는 것에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일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기억하는가?(루카 13,6-9). 하느님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제시한다. 우리에게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열매를 맺는 삶을 준다.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데에 우리가 그분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 하느님 나라는 당신과 나, 약물을 복용하는 소녀, 그리고 길거리의 알코올중독자다. 그분의 나라는 절름발이와 소경, 외로운 사람과 실업자,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다. 모든 인종들이다. 하느님 나라는 전 세계이다.

우리는 삶에서 거대한 것을 추구하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작아지라고 요청한다. 그분 나라로 이어지는 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릎을 꿇고 가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우리 자신이 성숙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이것은 선택의 순간이다. 많은 선택들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매일 선택하라는 부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계속 밀어대는 이 힘으로부터 철저하게 돌아서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 전적인 승복을 요구하는 사랑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갖고 있다. 우리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의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기도는 단순해진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하느님은 우리의 이런 기도에 익숙하다. 자주 그 소리는 크지도 않다. 그것은 몇 마디의 외침이고, 고뇌의 부르짖음, 도움의 요청, 명료함을 구하는 말없는 외침이다. 고통이나 슬픔, 혹은 때때로 기쁨을 강하게 외치는 이 짧은 부르짖음들 뒤에는 청원이 놓여있다, “당신이 저를 데려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이든, 제가 계속 그곳을 향해 움직이도록 도와주십시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신앙은 우리가 삼위일체의 마음 안으로 내적인 여정을 감에 따라 자라난다.

때때로 이 불과 움직임과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게을러진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다. 기도는 우리에게 의미를 주기를 그친다. 나날은 회색이 되고 지루하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상관이야?” 이런 종류의 고통은 속죄이고, 용서에 대한 청원이며, 빚을 갚겠다는 청원이기도 하다. 이런 고통은 우리를 황폐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를 해방시킨다. 이런 고통은 하느님이 허락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산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은 우리 기도의 한 부분이고, 내적인 여정의 일부다.

 

우상을 깨부셔라

기도는 하느님과의 접촉이다. 그 접촉을 하기 위하여, 우리는 자신 안의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을 깨 부셔야 한다. 내적인 여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상들을 우리가 갖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삼위일체의 불과 바람과 움직임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큰 망치를 들고 하나씩 하나씩 그 우상들을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이 우상들에 매달리고 있는데, 그것들이 우리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두려워하므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온전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들을 숭배한다. 우상들은 깨 부셔야 한다. 우상들은 기도라는 연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돌과 같아서 거룩한 성령조차도 기도의 연을 떠오르게 할 수 없다.

기도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얼굴을 숨기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팔을 넓게 펼쳐 십자모형이 된다. 이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드러나고, 그들의 시선에 노출된다. 자아를 벗는 시작은 그리스도의 자아-벗음과 일치한다. 그분의 자아-벗음은 아기로 육화되었을 때 시작되었고 점차 커져서 우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표징인 십자가 위에 벌거벗은 몸으로 매달려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깊은 자아의 문을 열고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초대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한테 기꺼이 우리 자신을 이렇게 말하면서 드러내지 않으면 초대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당신이 겪고 있는 지옥 같은 상황을 안다. 나도 그런 상황을 경험했다. 나는 당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당신처럼 깊은 경험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와 타인 사이에는 일치가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벌거벗고, 우리의 영혼을 드러내는 일은 매우 매우 어렵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의 문을 여는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열쇠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계가 없는 나라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타인에게 넘기고 이렇게 말한다, “들어오세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동료 인간을 전적으로, 완전하게, 무방어적으로,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조작하거나 행사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소리굽쇠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은가? 우리는 하느님과 사랑하도록 불림을 받은 피조물의 기도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가 정직하다면,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한다, “주님, 저는 당신 없이 그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제가 신앙 속에 어떻게 성장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어떻게 사랑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어떻게 기도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의 종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정수는 신앙이다. “저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제 믿음이 약하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사랑, 온유함,평화, 정의 그리고 진리의 열매를 세상과 제 자신을 위하여 맺을 수 있도록 더 믿음을 주십시오. 주님, 저의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주십시오. 믿음은 이 모든 것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경청이다

기도는 항상 경청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하느님께 귀 기울인다면, 어느 날 우리는 그분을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모험이 된다. 아침에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귀를 기울여보자. 그렇게 하면, 엄청난 평화가 우리에게 찾아온다. 때때로 사람들은 보통 상태가 아니다. 분노와 짜증이 나타난다. 소리들은 불협화음이 되고 때로는 천둥소리처럼 커진다. 그러나 웃으며 귀를 기울이면, 대답이 나온다. 왜냐하면 우리의 깊고 깊은 내면에 하느님의 평화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위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 우리도 돌아가는 상황에 미칠 지경이 되겠지만, 그건 바다 위의 폭풍과 같다. 바다 깊숙이 들어가면, 모든 것이 평온하다. 사람도 이와 같다. 폭풍은 날 뛸 수 있으나, 그 밑에 평화가 있는 한, 모든 것이 괜찮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 모든 것 안에는 어마어마한 기쁨이 있다. 어떤 주어진 순간에 –일순간– 이 바람은 지금까지 말해왔던 그 불의 내적인 중심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불은 우리를 태우지 않으며, 상처도 내지 않는다. 불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어루만진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불로 정화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적절함과 취약함에 대하여 잊는다. 그런 것들이 하느님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단순히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 불속에 들어가고, 우리 자신이 그 불에 한 부분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이 그 불꽃에 의하여 타오를 때까지 그분의 사랑에 우리의 사랑이 녹아들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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