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루오는 1889년에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을 그만두고 미술공부를 더 하기 위해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재능을 인정받아 이듬해인 1901년부터는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의 아틀리에에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1875-1947)와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훌륭한 제자에게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
스승 모로는 제자들에게 ‘예술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었고, 일정한 도식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내면적 통찰력을 믿으라고 가르쳤다. 루오를 잘 이해했고 “자네는 우울하고 지극히 검소한 예술, 그 본질상 종교적인 예술을 사랑하는군!” 하며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골고다 언덕 가는 길>(1891)은 초기 작품으로 몇 개 안 되는 성경 이야기이다. 처음엔 모로의 그림을 따라 그렸는데, <율법학자와 열 두 살 예수>(1894)가 대표적이다.
당시 루오는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하였지만 아카데미파의 견해와 달라 낙선되었고, 1893년과 1895년 이어서 로마상(Prix de Rome) 수상도 무산되었다. 이때 스승은 루오에게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도록 충고했으며, 루오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랐다. 루오는 모로와 다른 화풍을 지녔으나, 평생 모로를 “좋으신 모로 아버지”라고 부르며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이런 점에서 루오가 훗날 역작인 <미제레레>를 스승에게 헌정한 것은 당연하다.
“나는 이 작품을 스승이신 귀스타프 모로 선생과 나의 용감하고 사랑하는 어머니께 바친다. 어머니는 예술의 젊은 길손으로 갈림길을 빈손으로 헤매던 나의 첫 노력을 돕느라 밤을 새우곤 했다. 두 분은 서로 달랐으나 이제는 우리 삶의 몫을 이루는 비통과 수모의 이 시대와는 달리 한결같은 미소 띤 어지심으로 용기를 주었다.”(루오)
정신적 지주였던 모로가 사망한 것은 1898년이었다. 이때 루오는 자기 삶이 시끄러운 연극이며, 몸을 찌르는 가시 같은 비극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수도원에 입회할 생각까지 품었다. 이처럼 깊은 충격에 빠진 루오는 에비앙(Evian)에서 요양하면서 자신을 치유했다. 당시 자신이 겪은 고난에 대해 루오는 이렇게 적었다.
“많은 미술관에서 그림과 사랑에 빠졌던 것을 잊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나는 서서히 객관적인 시각에 압도되었다. 화창한 봄날이면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센 강변 투르넬 근처에 있는 다리 아래로 갔다. 거기서는 윗옷을 벗은 부두 노동자들이 화물선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극심한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내 마음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루오)
그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루오는 하늘에서 내리는 섬광, 은총의 빛줄기가 내리는 체험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루오는 관습적인 신앙을 거부했다. 당시 프랑스 시민계급에게 그리스도교는 ‘그저 이름뿐인 부패한 그리스도교’였으며, 신자들에게 미사 참례는 습관일 뿐이었다. 루오에게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의미했다. 그는 바로크적 화려한 그리스도교보다는 잔혹한 ‘지하 납골당 그리스도교’를 선호하였다.
그는 약동하는 파리의 풍경보다 노동자들과 초라한 여인들이 어스름한 저녁에 쓰레기통을 뒤지는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음울한 도시의 밤과 가난, 두려움을 동반한 가혹한 인간의 슬픈 실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비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피조물이 겪는 고통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제 그는 <율법학자와 열 두 살 예수> 같은 안이한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었다.
비판적 종교 이해, 레옹 블루아를 만나다
루오는 작고한 스승의 서재에서 유품을 정리하면서 몇 권의 책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것은 프랑스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레옹 블루아(Léon Bloy, 1846-1917)와 소설가이자 미술 평론가인 위스망스(Joris Karl Huysmans, 1848-1907)의 책이었다. 이 책을 숙독하고, 이들과 교류하면서 루오는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다. 레옹 블루아는 원래 무신론자였다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 ‘그리스도의 가난과 고통’을 통한 인간의 구원에 주목했다. 블루아는 목공 도제 같은 인상을 풍기며 거친 우단으로 만든 2루이짜리 옷을 걸치고 다녔는데, 프랑스 부르주아의 천박함과 교황지상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오늘의 가톨릭교회에 동요의 물결이 이는 것 같다. 이는 잔잔한 바람처럼 일어났으나 큰 폭풍이 될 것이다.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의 위선이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 하느님께서 명망 있는 자들의 가톨릭교회에 침을 뱉으신다는 사실, 그리고 맨발 수도사들들의 가톨릭교회를 부활시키고 건강하게 만들 시간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다. 현세의 쾌락을 모르는 가톨릭교회, 고통 속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울부짖는 가톨릭교회가 부활하는 것이다. 정복당하고 피 흘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원망하고 절망하는 사람들,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는 사람들, 즉 위대한 영혼을 지닌 이들의 가톨릭교회가 부활할 시간이 다가 왔다.”
블루아는 예언자적 초조감 속에서 카자흐스탄 기병들의 침략처럼 성령을 기다렸다. 루오는 블로아의 과격한 비판 뒤에는 기묘한 부드러움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블로아는 가구를 부숴 난로에 불을 지펴야 할 정도로 궁핍했고, 두 아들은 영양실조로 죽었다. 루오는 특히 블루아의 <가난한 여인>(La Femme Pauvre, 1897)을 읽고서 동요했다.
블루아는 <가난한 여인>에서 미술에 대해 글을 쓰면서 “화가가 가진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영혼, 숭고하고 당당한 영혼뿐”이라 했다. 이어 ‘화가는 자신의 영혼을 붙잡아 목욕시킨 후 이 영혼만큼의 가치가 있는 한 대상 안에 영혼을 깊이 담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화폭에 내던진다“고도 했다. 루오가 블루아의 예술관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그를 평생 친구로 삼았고, 이렇게 화답하며 편지를 썼다.
“(그대와 나,) 그리스도교적 측면에서는 하나의 심장과 하나의 정신이 내쉬는 숨결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를 받쳐 주는 이 숨결은 힘이 넘치고 위쪽으로 올라가며 따듯하다. 이 심장과 이 정신의 영광스러운 과거가 우리 가까이 있으며 우리를 위로해 주고 풍요롭게 한다.”(루오)
블로아에게 영향을 받은 루오의 그림은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거룩함을 향한 부단한 노력을 낳았다. 그리고 루오는 파리의 거리여성, 매춘부들과 서커스에 관심을 가지고 그리기 시작했다. 가톨릭신앙과 ‘가난한 사람들’에 눈뜬 것이다.
[참고]
<영혼의 자유를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 이야기>, 조양익
<조르주 루오>, 발터 니그, 분도, 2012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