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로에게, 하느님의 마음에 따르는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심장과 함께 고동치는 교회의 건설을 의미했다. 이것이 그가 가르쳤던 기쁜 소식이었다 – 사람들의 가슴과 하나 되기를 추구하는 교회.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를 알고, 그들의 눈으로부터 세계를 보며, 그들의 고통과 희망을 나누는 사람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을 아는 사람으로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로메로는 단지 하느님 말씀의 예언자로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깊었기에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의 예언자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으로, 그들의 희망과 기쁨, 슬픔과 고뇌를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분별하도록 도울 때에 그들과 함께 걸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에 의하여 빛을 받으며, 그들의 갈망, 요구와 이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신앙으로 그들은 시대의 징표에 따라 하느님이 원하는 바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를 압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들의 갈망의 순간들 깊은 곳에서 하느님은 훨씬 더 많이 발견되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분별을 해야 합니다.”(로메로, 1979년 11월 11일 강론에서)
로메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권력가들의 가면을 벗기고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준다고 믿었다. 그는 교회가 선과 악 사이의 용기 있는 내면의 싸움을 통하여 거룩해진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교회와 세상에 주는 오스카 로메로의 선물은 그가 영성과 사명에 의하여 교회의 참다운 특색들의 의미를 변화시킨 것이다.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선포되는 기쁜 소식인 복음에 충실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을 옹호하고 정의를 증진하는 복음화의 사명에 의하여,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순교자들의 증거에 의하여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적인 교회라고 주장했다. 로메로는 이러한 참다운 특색들을 교회가 불완전하게 육화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특색들을 온전하게 구현하지 못하는 교회의 실패에 대하여 사람들의 용서를 청했다.
그는 교회 역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천천히 정화되는 교회를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도전했다. 엘살바도르의 교회는 “하나”가 아니었고, 사회처럼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심지어 민중 단체들과 기초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도 심각한 신학적 정치적 불일치가 있었다.
교회가 사명에 있어 “사도적”이라면, 누구에게 파견되는가? 교회의 “보편성”은 자주 고립되고, 편협하며 방어적인 색채를 띠었다. “거룩함”의 정의는 매우 자주 이념적 선호성을 표현하였다. 교회는 거룩하고 또한 거룩하지 않으며, 은총이고 또한 은총에 걸림돌이며, 성사이고 또한 스캔들이다. 교회는 자기가 섬기는 인간처럼 결점투성이고 또한 신성하다. 교회는 우리들처럼, 구원의 도구이지만 또한 구원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로메로는 가짜 신들의 가면이 벗겨지고 기쁜 소식이 받아들여지며 육화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가 더 깊은 회심을 하기를 요청하였다.
순교자 옥타비오 오르티즈 신부의 묘비에는 두 질문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선포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르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앞 못 보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질문들은 옥타비오 오르티즈가 다른 네 사람과 함께 국가경비대에 의하여 잔인하게 살해되었던 아침에 젊은이들과 했던 피정의 기반이었다. 마치도 신부를 충분히 죽일 수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옥타비오의 몸 위로 탱크를 몰아서 얼굴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신부의 살해는 하느님의 말씀이 엘살바도르에서 어떻게 전복적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경우였다.
"매우 슬픈 날입니다. 산 안토니오 아바드 본당의 엘 데스페르타에서 군사 작전이 있었다는 소식으로 날이 밝았습니다. 그곳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심화하기 위한 피정이 자주 열리던 집이었습니다. 옥타비오 오르테즈 신부는 그곳에서 일하는 벨지움의 체피타 수녀와 함께 약 40명의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 국가 경비대는 포격대와 함께 폭탄으로 문을 부수고 무장차로 총격을 가하면서 폭력적으로 침입했습니다.
옥타비오 신부는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일어섰고, 다른 네 명의 젊은이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나머지 그룹 사람들과 두 명의 수녀들은 국가경비대 본부로 끌려갔습니다. 우리는 오후가 되어서야 옥타비오 신부와 다른 네 명의 젊은이들의 시신이 이미 묘지의 시체 공시소로 옮겨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옥타비오 신부의 얼굴은 매우 망가져 있었습니다. 매우 무거운 어떤 것이 얼굴 위로 지나가서 납작해진 것 같이 보였습니다. …
(장례미사 때) 저의 강론에서 … 저는 옥타비오 신부와 함께 희생된 네 젊은이들에게 가해진 범죄를 분석했습니다. 저는 폭력과 힘에 의존하는 대신 이성적인 응답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존엄성에 대한 공격에 항의했습니다."(로메로, <목자의 일기>에서)
옥타비오 오르테즈 신부가 직면했던 도전은 로메로가 직면했던 것과 같은 도전이었다. 그것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다음과 같이 묘사했던 도전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실제로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은 참으로 기쁜 소식인가?”이다.
매주일 복음에 대하여 로메로가 선포한 탁월한 점은 –그 말을 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자주 받았던– 그가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간단한 대답은 이렇다.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이 그들의 삶과 투쟁의 맥락 속에서 그들에게 선포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로메로의 선포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말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실제로 들었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해방을 위한 그들의 고귀한 투쟁에 희망과 지지의 원천을 보는 것은 백성들 사이에 새로운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격려하는 희망은 유약하지도 않고 수동적이지도 않습니다. 그 희망은 대다수의 백성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권고이며 호소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적절한 책임을 알고 있으며, 법적으로 실제적으로 금지된 그들 자신의 의식화를 이해하고 있고 … 그들 자신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는 호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지이고, 때로는 비판적인 지지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한 명분과 요구에 대한 지지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희망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존엄성을 되돌려주고, 그들 자신의 미래를 책임지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로메로, <목소리 없는 이들을 위한 목소리>에서)
물론 박해받는 사람들의 명분을 지지하는 복음을 가르치는 일은 박해자들 자신과 그러한 불의 앞에서 중립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적인” 해석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복음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된다. 로메로는 하느님 말씀의 전령인 쫓겨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복음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없다면 복음은 화평의 공작이고 개량에 불과하고, 거짓이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은 신앙인들이 그것을 육화시킬 때에만 – 살아진다고 로메로는 말했다. 하느님은 복음의 정신을 “살해하고” 불의를 지지하는데 복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강요하는 죽음의 고통 한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살아있게 하기 위하여 인간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성서를 읽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분석하고 기념하며, 우리의 실제 안에 육화하면서, 성서를 우리의 삶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이것이 강론의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백성들 안에 육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강론 안에서 우리가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죄악을 지적할 때에, 그것은 자주 하느님의 주권을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반영하는 우리의 실제 속에 하느님의 말씀을 육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리키기 위하여 복음을 선포합니다."(로메로, 1979년 11월 11일 강론에서)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백성들의 말이었다. 로메로는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저의 말은 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빛, 위로, 기쁨, 희망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이 말이 도달한다면, 그것은 저의 공로가 아닙니다. 저의 강론이라는 도구를 하느님이 사용하셔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로메로, 1978년 5월 21일 강론에서)
마찬가지 확신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간의 권리에 대한 모든 모욕에 대항하여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외치기 위하여, 목소리가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고자 합니다."(로메로, 1977년 8월 28일 강론에서)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6)고,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선포한 것을 기억하면서 로메로는 말했다:
"지금까지 선포된 메시지 중 가장 장엄한 메시지로, 그리스도는 두루마리를 덮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과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이며, 여기에서 지금 성취되고 있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로메로, 1980년 1월 27일 강론에서)
로메로는 그의 백성들처럼 되었다 - 매일 더욱 가혹해지는 상황을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대학살 한 가운데에서 본질적으로, 창의적으로 힘껏 백성과 하나 되었다. 대교구청에 대한 압박이 숨 막힐 듯이 짓눌러도, 로메로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기로 약속하는 복음의 닻에 매달렸다.
그의 사명은 단순했다: 그의 목소리가 쓰러질 때까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로메로는 하느님의 말씀과 백성들의 말을, 하느님의 부르심과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연결시키는 사람이었다. 이 역할 속에 그는 자신의 영성의 기반을 놓았으며, 이런 방식으로 사목자로서 예언자로서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오직 나쁜 소식만 받게 되는 사람들에게, 권력가들의 모욕만 느끼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부가 자신들을 그냥 지나치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오고 계십니다."(로메로, 1980년 1월 17일 강론에서)
"교회는 단지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 속에 자신을 육화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보호하는 데에 단호한 투신을 감행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 정치적 구조에 의하여 매일 억압받고 탄압을 겪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두려운 말씀들은 우리들 가운데 계속하여 살아나고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에는 다른 사람들을 돈에 팔아넘기고, 샌들 한 벌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넘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로메로,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원출처] <오스카 로메로-삶과 글에 관한 성찰(1917~1980)>, 마리 데니스, 레니 골든, 스코트 라이트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7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