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오] 예술하는 노동자, 조르주 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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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오] 예술하는 노동자, 조르주 루오
  • 한상봉
  • 승인 2018.02.1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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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인간과 연민의 하느님, 조르주 루오 -1

“나는 망망대해의 미미한 먼지, 바람에 씻기는 가련한 선원, 어두운 암흑 속에서조차 성스러운 평화와 빛을 사랑하노라.”(조르주 루오)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인천 만석동 기찻길옆 공부방. 지금도 일부 판잣집들이 남아있지만, 이십여 년 전에 내가 처음 그곳에 방문했을 때는 그 지역 자체가 ‘가난’과 ‘삶’이 얼마나 생생하게 응집되어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 비좁은 골목마다 화초를 키우고, 부스러진 담벽 사이로 풀꽃이 피어있었다. 아이들은 흙탕물을 튀기며 골목에서 골목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수녀님이 나를 호출한 것도 그 때였다. 당시만 해도 빈민사목이 활발할 때였는데, 수녀님은 동네에서 집을 하나 빌려 아기방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집은 너무 낡아서 헐어낼 곳은 헐어내고, 보수할 곳은 고쳐 쓰기로 했다.

이십대 후반이었던 나는 친구들을 불러 집수리에 몰두했다. 그 집 비좁은 이층방이 경당이 되고, 작은 소반 위에 놓여 있던 책, 그 화집이 조르주 루오의 <미제레레>(Miserere, 분도, 1978)였다. 책 제목처럼 도판에는 루오가 붙인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3)로 시작되는 화제(畵題)는 기도하는 이의 마음에 묵상의 깊이를 더해 주었다.

 

미제레레 중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신앙생활 중에 수없이 가난한 이들의 비참함, 여기에 손 내미시는 예수에 관한 소식을 듣지만, 건성건성 묵묵부답한다. 그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입장일 뿐, 그분의 고난과 발언에 나의 운명을 걸지 않는다. 이게 바로 키르케고르가 말한 “노신사의 교회”에서 살아가는 비법일지 모른다. 예수는 다만 내 기도에 응답해야 할 해결사일 뿐, 우리는 예수의 요청에 응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복음의 기쁨>에서 지적한 것처럼 “아직 우리가 그분을 (깊은 곳에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루오는 <미제레레>에 “멸시 받는 그리스도”를 그렸고, 그분은 “불쌍한 부랑자로 네 마음을 찾아드신다”고 했다. “외로이 모함과 악의로 가득한 이 삶에서” “우리 모두 죄인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도 “가끔은 여정이 아름답기도 하다”고 고백했으며, “십자가에 달린 채 잊혀진 예수”를 보면서 “가장 좋은 직업은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이라면서 “새벽에 노래하라. 하루가 다시 태어날 것이다”라고 희망을 준다.

예수의 얼굴이 배인 “부드러운 수건을 든 베로니카”처럼, 그분을 기억하면서 “서로 서로를 사랑”하자고 요청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세상에서 “의인은 향나무처럼 후려치는 도끼를 향기롭게 한다”고 했다. 그처럼 “그분의 고통 덕분에 우리는 치유되었다”고 도판을 통해 노래한 이가 조르주 루오였다. <미제레레>의 그림에 붙인 화제는 본래 프랑스 평론가 앙드레 쉬아레스(André Suarès 1868-1948)가 붙이기로 했지만, 이 책이 출간 되던 해에 그가 사망함으로써 루오가 직접 쓰게 되었고, 이 책은 결국 루오의 ‘신앙고백서’가 되었다.

조르주 루오는 렘브란트 이후 20세기 초 가장 위대한 종교화가였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소개되지 못했다. 이 글은 전적으로 조양익 선생의 ‘영혼의 자유를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 이야기’와 발터 니그의 <조르주 루오>(분도, 2012)에 기대어 정리했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 둔다.

스테인드글라스 견습공, 예술 하는 노동자

조르주 루오

조르주 루오(Georges-Henri Rouault, 1871-1958)는 예수를 ‘고독한 심연’에서 만났다. 그의 그림은 몇 가지 소재에 집중되어 있다. 매춘부와 광대, 그리고 그리스도였다. 그는 거친 질감과 짙은 윤곽선, 화려한 색채로 인간과 사회의 어둡고 숨겨진 이면을 그려냈다. 그러나 고유한 종교적 성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투박한 그림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는다. 끝내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길어 올리는 힘이 그곳에 있다. 그는 마티스(Henri Matisse)와 피카소(Picasso)에 버금가는 당대 화가였지만, 세속화된 세계에 ‘종교화’를 복원시킨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프랑스의 화가이며 판화가, 도예가,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였다.

루오는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 1871년 3월 18일-5월 28일) 막바지에 프랑스 정부군의 포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5월 27일 파리의 북동부 벨빌(Belleville)에서 태어났다. 벨빌의 가난한 목공 알렉산드르 루오(Alexandre Rouault)와 옷 수선 재봉사 마리-루이즈(Marie-Louise) 부부는 이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만삭의 부인이 첫 산통을 시작하는 순간 그 집 담벼락에도 포탄이 떨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산모는 지하로 대피해 아이를 출산했다. 이 아이가 조르주 앙리(Georges-Henri), 나중에 ‘조르주 루오’라고 불린 사람이다.

루오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통해 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느껴왔다. 특히 가구 세공사(목공)였던 아버지의 손에서 온전한 탁자가 만들어졌는데, 그에게 목재는 거칠고 난폭하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살아있는 재료였다. 루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상의 평범한 사물도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세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에게 예술가의 미술작업 역시 거룩한 손노동의 연장이었다.

라므네 신부

한편 루오의 아버지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임을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휴고 펠리시테 로베르 드 라므네 신부(Hugues-FeliciteRobert de Lamennais)의 신봉자였다. 자유주의자였던 라므네 신부는 1830년 파리에서 <라브니르>라는 일간지를 창간해 가톨릭교회의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흐름에 반대하여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국가와 분리된 교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16세 교황은 1832년 회칙을 발표해 라므네 신부와 <라브니르>를 비난하였다.

교황은 언론과 양심의 자유를 비난하며 “누구에게나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조리하고도 그릇된 원칙이다. 아니, 차라리 객담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라므네 신부는 소책자 <어느 신자의 말>을 펴내 부자들의 대저택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가난한 이들의 오두막에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기를 간구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교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라므네 신부는 파문당했다.

라므네 신부의 파문은 루오 아버지의 정의감과 신앙심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더 이상의 교회 이야기를 거부하며, 아들 조르주를 위그노파가 운영하는 개신교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여기서 교사가 아들에게 심한 체벌을 가하자 이 학교마저 보내지 않고 조르주는 그날부터 종교 없이 성장했다.

조르주 루오는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에게 도미에(Honoré Daumier)와 마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을 못하고, 1885년 루오는 14살이 되어서야 파리 장식미술학교(’Ecole des Arts décoratifs) 야간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낮에는 마리우스 타모니(Marius Tamoni)와 에밀 이르쉬(Emile Hisrsch)의 공방에서 스테인드글라스 복원작업 견습공으로 일했다.

 

견습공과 꿈꾸는 사람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

공방에서 루오는 밑그림을 그리고 납으로 유리를 조합하는 일을 배웠다. 루오의 그림에 나타나는 청색, 적색과 녹색의 조화라든가 굵은 선은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자의 경험이 엿보인다. 그래서 루오의 작품은 판화라 해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느껴진다.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작품이 <견습공>과 <꿈꾸는 사람> 등인데, 루오는 스테인드글라스 견습공으로 일하던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자신을 당당한 ‘예술 하는 노동자’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루오는 화가가 된 뒤에 3점의 스테인드글라스 밑그림만을 그렸다.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가 대표적이다. 루오가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장인 장 에베르-스테븐(Jean Hébert-Stevens)이 제작하였고, 다시 루오가 유화물감으로 덧칠하였다. 이 작품은 인간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던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두 제자의 모습이다. 루오가 그린 그리스도는 민중의 아픔을 담은 고난의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에 심취했던 것은 아니었다.

[참고]
<영혼의 자유를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 이야기>, 조양익
<조르주 루오>, 발터 니그, 분도, 2012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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