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예언자적 실재를 압도하는 왕정의 승리
열왕기 상하권으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와 제도 사이의 정교한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다윗의 아들은 솔로몬으로, 지혜롭기로 유명하다. 다윗이 시편의 대부분의 작가로 알려져 있듯, 솔로몬은 잠언과 지혜서 대부분의 저자로 알려지고 있다. 솔로몬의 재위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조직이 정비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주변국과 무역을 시작했으며; 광업, 해양운송업과 제조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군대를 강화하였고, 하느님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신전을 예루살렘에 세운다.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모든 것이 좋아 보였지만, 제도화된 관행이 서서히 팽배하기 시작한다. 왕정의 승리주의가 예언자들의 실재론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업적 위주로 변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과를 거두고 일이 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능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건설하고 일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성전의 전례 역시 장엄하고 화려해졌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그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현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는 사이, 정교한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건설 활동과 무역은 남쪽에 집중되었고 예루살렘으로 돈이 몰렸다. 그러나 북쪽 사람들은 세금에 짓눌렸다. 북쪽의 청년들은 군대와 건설현장으로 끌려 다녔다. 그들은 성전의 예배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불균형으로 초래되는 불의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결국, 솔로몬이 죽은 뒤 북쪽의 부족들은 남쪽의 승리주의에 맞서 반란을 일으켜 국가가 분열되었다. 북쪽의 10개 부족들은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독자적인 왕과 성전을 세웠다. 남쪽의 두개 부족들은 유다 왕국을 세웠다. 마구잡이로 이루어진 제도화가 그 대가를 치렀다. 군에 돈을 쏟아 붓고 영적인 식견을 잃음으로써 솔로몬은 나라 전체를 망쳐버렸다.
우리는 교회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져 왔던 것을 보아왔다. 중세에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남쪽”, 곧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쪽에서 승리주의가 난무하게 되었다. 거대한 성당들과 바실리카 (그 장엄한 성 베드로 성당을 포함해서)가 지어졌고, 교황과 주교들은 왕궁에서 살았으며, 전례는 화려해졌다. 그런 제도화 과정에서 성령의 정신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모습은 모호해졌다. 결국 “북쪽”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성령의 정신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제도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것이 개신교의 시작이었다.
제도와 카리스마의 충돌
가톨릭에서 한때 신교개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던 때가 있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그러한 흑백논리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공의회를 통해 성서의 지혜를 재발견하게 되어, 북쪽의 부족은 모두 잘못했고 남쪽의 부족이 항상 옳았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북쪽의 부족은 사실상 “교회를 떠났으며” 유다는 전통적인 제도를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그 제도에 유일하게 생명을 불어넣었던 카리스마적인 하느님의 정신은 잃었다.
남쪽의 형제, 자매들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북쪽의 부족들 역시 야훼의 정신을 상실했다. 그들은 스스로 만든 제도와 승리주의에 굴복하고 말았다. 많은 개신교 신자들 역시 자신들의 교회에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점들이며, 성서 역사를 묵상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최대의 제도화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그 장벽으로 인해), 하느님의 카리스마적인 정신은 균형을 복원하기 위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우리 세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소집되기 이전부터 교회 안에서 들려오는 예언자적인 소리들을 통해 보고 있다.
뿌리로 돌아가라
성서에서 이스라엘이 갈라진 왕국으로 기록된 기간 동안, 그들은 엘리야 예언자를 통해 그 소리를 들었다. 열왕기 상권 제19장에서 야훼는, 오래 전에 이스라엘인들이 통과했던, 시나이 사막으로 그를 이끌어 가시고, 하느님이 그들과 계약을 맺고 계명을 주셨던 산으로 부르신다. 거기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전통의 핵심, 하느님의 사랑에 찬 주도와 이스라엘의 신뢰에 찬 응답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난 후 그는 백성들을 가르치러 돌아간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뿌리로 돌아갈 것을, 계약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한다. 그는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보잘것없는 자신들의 왕국을 여전히 그들의 힘으로 지켜나가려고 한다면, 적들에 의해 파멸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메시지는 단순히 종교적이지만은 않았다; 거기엔 모든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그러하듯, 사회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열왕기 하권에 나와 있듯이, 엘리야의 뒤를 엘리사가 잇는다. 그의 메시지 역시 동일했다: 주님께 돌아가고, 계약에 충실하라. 너희는 미신과 외국과의 동맹에 의탁하지 말라. 너희를 구하시는 분은 야훼지, 너희 자신의 힘이나 자신의 똑똑함이 아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왕들 역시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엘리야와 엘리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왕국은 계약에 불충실한 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잊었다. 그들은 야훼가 그들을 노예 상태로부터 구해 주셨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들은 야훼가 사막에서부터 그들을 이끌어 주셨다는 것을 잊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잊었다. 그리하여, 북쪽의 왕국인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에 앗시리아에 의해 함락되었다. 10개 부족민들은 추방되어 중동 지방 곳곳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그 후 아무도 그들에 대해 듣지 못했다. 그들은 종종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부족들이라고 불린다.
겁에 질린 남쪽 왕국의 왕은 개혁을 단행하여 우상을 없애고 성전에서 야훼께 대한 제사를 복원했다. 그러나 그 개혁은 형식적이었을 뿐이었다. 587년 유다는 바빌론에 의해 함락된다. 예루살렘은 점령당하고, 성전은 파괴되었다.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 것인가? 야훼가 약속을 지키시지 않은 것인가? 그분은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시지 않았던 것일까? 유다 사람들은 60년간 귀양을 갔으며 대부분은 바빌론 귀양살이 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서 돌아온 이들은 유다로 (혹은 후에 로마인들이 유대아라고 부른) 돌아갔으며, 오늘날 그들의 후손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거기서 유래된 것이다. 원래 있던 12부족 중 그들만이 남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대인들은 갈릴래아라고 불리우는 북부 지역을 되찾게 되었는데, 바로 그 곳에서 예수가 성장했으며 공생활의 대부분을 보내시게 된다. 유대아와 갈릴래아 사이는 사마리아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이스라엘과 이교도의 것을 혼합시킨 종교적 전통을 가진 비유태계인들이 살고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을 옛 북부 왕국의 후손이라고 여겼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을 혼혈아, 이방인으로 여겼으며, 바로 그 때문에 예수 시대에 유대인들이 그들을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백년 후의 이야기로 아직도 먼 이야기다. 이 무렵 유대인은 귀양살이 중이었으며, 하느님의 길을 헤아리기 위해 애쓰며,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현재 명백하게 보게 된 것을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깨닫게 된다. 분열된 왕국, 몰락과 귀양살이는 그들이 야훼와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는 것. 왕과 왕국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들 자신이 곧 자신들의 목적이 된 것이다.
교회의 목적은 교회가 아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교회조차도,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목적이 되실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하느님만이 구원하신다;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법도 할 수 없고, 성서도 할 수 없고, 교황도 할 수 없고, 성사도 할 수 없으며 교회 역시 할 수 없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신 선물로,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도록 하는 것이다. 수단을 목적으로 잘못 오인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잊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을 맨 첫 자리에 놓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우리 자신을 맨 윗자리에 놓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계셨다. 우리가 교회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옛 이스라엘, 본래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성장하였음을 기억하자. 하지만 예수님을 단 한번도 이스라엘을 첫째 자리에 놓으신 적이 없다; 그 분은 하느님을 제일 첫 자리에 두신다. 그 분은 야훼,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충실함에 대해 가르치셨다. 그분은 이스라엘에 대해 가르치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내리깎지 않으셨다; 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 똑같이, 우리도 교회를 첫째로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나라와 그 분의 정의를 먼저 구해야” 하며 교회가 그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일이 생기기 않는 한, 교회에 맞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듯 오늘의 교회도 사랑하신다.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넘어서
교회를 사랑 할 때는 하느님이 그러셨듯이 교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50년 전의 교회를 사랑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50년 후의 교회의 모습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존재하는 유일한 교회는 오늘날의 교회이며,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현재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도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잘못을 저질렀었다. 우리는 제도들-혹은 법률, 관행, 신조, 성사조차도-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많은 경우, 우리와 달리 행동하거나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곤 하지만,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들까지도 선하게 보셨다.
성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리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성서의 진리는 바로 사람이며,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다. 그것은 거룩한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의 사랑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런 사랑의 관계 속에서 진리가 발생한다. 그것은 하느님에 관한 진리이자 우리 자신에 관련된 진리이다. 그런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제도와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 진리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