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숨겨진 하느님이다. 그분은 작고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아래에서 인간존재가 되었다. 그분은 태어난 나라의 권력가들로부터 모욕을 받았고 두 범죄자 사이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해졌다.
예수의 삶에는 대단한 것이 없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의 기적을 보아도, 그분은 인기를 얻기 위하여 사람들을 치유하거나 다시 살리지 않았다. 그분은 자주 기적을 입은 사람들에게 입을 다물라고 요구했다. 그분의 부활도 숨겨진 사건이었다. 오직 그분이 죽기 전부터 그분을 친숙하게 알아왔던 제자들과 몇몇 여인들과 남자들만이 그분을 부활한 주님으로 알아보았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세계 주요 종교들 중의 하나가 되었고 수백만 사람들이 매일 예수의 이름을 말하므로 예수가 숨어 있는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다고 믿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삶도 죽음도 부활까지도 하느님의 위대한 권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비천하고 숨겨져 있고 거의 보일 수 없는 하느님이 되었다.
나는 복음의 예수가 결실을 맺는 어느 곳에서나 이 숨겨짐이라는 특징과 마주치게 되는 것을 보고 끊임없이 충격을 받는다.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숨겨져 있기를 추구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었다. 베네딕도는 수비아코 골짜기에, 프란치스꼬는 앗씨시 외곽 카르체리에, 이냐시우스는 만레사 동굴에, 소화 데레사는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 자신들을 숨겼다. 거룩한 사람들에 대해 들을 때마다, 당신은 그들에게서 숨겨짐, 은둔에 대한 깊은 갈망을 느낀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것을 잊지만, 바오로 사도 역시 설교의 사명을 시작하기 전 이년 동안 광야에 머물렀다.
수많은 위대한 정신과 영의 소유자들이 너무 쉽게 혹은 너무 빠르게 대중에 노출됨으로써 그들의 창조적인 힘을 잃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느끼지만, 우리의 세계가 끈질기게 “알려지지 않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큰 거짓말을 선포하고 있기에 쉽사리 잊어버린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직관을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래서 작금의 선전에 대해 건강한 회의를 간직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숨겨진 현존을 더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온 예수를 바라보자. 당신은 온갖 형태의 인기를 그분이 일관되게 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는 항상 하느님이 비밀스럽게 그분 자신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만일 이것을 받아들이고 그 역설 속으로 들어간다면 당신은 영적인 삶으로 가는 길에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마르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출처] <Henri Nouwen>(Robert A. Jonas, Orbis, 1998)
[출처] <참사람되어> 2004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