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안토니 블룸 대주교는 “기도의 체험이란 공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면으로부터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기도를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기도는 너무나 흥미롭고 떨리는 일이라서 하느님을 만나고 영적인 삶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의 함축된 의미는 그것보다 훨씬 더 원대하다. 기도는 모험이고, 그것도 위험한 모험이다. 위험, 모험을 무릅쓰지 않고서 우리는 기도로 들어갈 수 없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히브 10,31).
하루 온종일 홀로 단식하고 24시간 기도하는 광야 체험과, 사람들이 묻는 질문들을 보면, 기도를 마치도 모든 사람이 시도해야 하는 새로운 유행처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도는 우리를 전적인 내어줌으로 이끌어야 한다. 아니면 기도는 그저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밖에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전적인 내어줌을 우리는 두려워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분은 우리를 혁명의 길로 부른다. 무슨 러시아 혁명이나 쿠바 혁명 같은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끝없이 강력한 혁명에로 초대한다. 이 혁명은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 자신에게는 폭력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말자. 일단 하느님을 만나면,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에게 가고 있는가? 대답은 마태오 복음 시작에 나타난다. 동방 박사들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별을 보았다. 먼저, 그들은 믿었다. 두 번째로,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출발했다. 그들은 상황에 대하여 토론하며 앉아있지 않았다. 세 번째, 그들은 왕을 발견했고, 외양간에 도착했을 때 무릎을 꿇었고 경배했으며 예물을 바쳤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그분을 경배했다. 이것이 기도의 핵심이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