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전통 "모든 것은 '선물'이고, 아무것도 ‘재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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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전통 "모든 것은 '선물'이고, 아무것도 ‘재산’이 아니다"
  • 월리암 J. 쇼트
  • 승인 2018.01.2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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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은 사람들에게 프란치스코나 클라라의 경험을 재창조 하도록 가르쳐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그런 시도는 쓸모없고 두려움만 일으킬 뿐이다. 전통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때와 새로운 장소에서, 그들 자신의 말과 모범으로 전통을 이어가기 때문에 오늘날 살아있는 전통이 계속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감동적이고 영감이 풍부한 한 가지 표양을 우리에게 주고 있지만, 전통은 그에게서 정지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나는 나의 몫을 다한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몫을 지금 보여주시기를’이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전체 삶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에서 정지하는 것은 그가 추종자들에게 가졌던 의도를 위협하는 것이다.

클라라도 그 자신으로부터 멀리 가리켰으며 그리스도이신 거울을 들고 프란치스코를 자기에게 그 거울을 보여준 사람이라고 암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말과 행동으로 때로는 분명하게, 때로는 모호하게 아직도 심오한 도전을 하고 있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에 관한 직관을 보여준다. 이 책도 그러한 직관들을 오늘날의 성실한 그리스도인과 종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중세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가 오늘날 무슨 의미를 줄 수 있는가? 그리고 오늘날 이토록 오래된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이 관심을 끌만한 장점이 있는가?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은 오늘날 영성에 대한 관심을 ‘구박’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고 또한 시작해야 한다.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넓게 정의되는 영성의 형태들은 때때로 우리 자신을 삶의 일상행위로부터, 세계로부터, 현세로부터 떼어놓는 종교적 체험의 추구일 수 있다. 그리하여 어떤 집중 기술이나 예식들은 실습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순수하고 다른 세상, 영적인 실재를 향하도록 이끄는데, 여기에는 느낌, 이미지나 실체가 극단적으로 부족하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와 우리의 삶은 불가피하게 열등한 것이 되거나, 비실제적이 된다. ‘영혼’이나 황홀경, 혹은 영적인 실존 같은 다른 영역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삶과 영성을 통합하기보다 분리시킨다.

이런 유형의 영성에게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은 우리의 발을 중요시하도록 지적함으로써 가혹한 처사를 취한다. 이것은 육화한 말씀의 ‘더러운 발들’이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모범을,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을 따르는 것은 대신 오늘날 하느님을 ‘현실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느님은 육화하기 위하여 변경할 수 없는 결정을 하신 존재이다.

이것은 또한 사람들을 현대사회의 긴박한 요구로부터 분리시키는 영성에 깊은 우려를 갖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이다. 육화한 그리스도, 물질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드러나는 하느님을 한결같이 강조하는 영성은 현대의 종교적 갈구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소수의 개인들과 사회가 누리는 풍요와 대다수의 타인들이 겪는 비참 사이의 극심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한 세계에서 프란치스코회 전통의 핵심인 가난은 무슨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가난 그 자체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고 가르치는 것은 13세기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의미가 없으며, 가난한 이들을 계속 괴롭히고 있는 악을 정당화시키는데 이용될 수 있다.

가난 그 자체는 결코 가치가 될 수 없다. 가난은 부, 지위 그리고 다른 이들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것으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가 예수님의 ‘거룩한 가난’을 추구할 때 육화가 가르치는 것이다. 이 모범을 따르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사는 것은 오늘날 모든 것이 창조주에게 속하므로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선물이고, 아무것도 ‘재산’이 아니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가 따랐던 복음의 명령,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대처럼 우리시대에도 긴급한 명령이다.

환경파괴가 전 지구상에 미치는 영향을 자각하는 창조 영성의 재발견은 현대의 관심사와 과거의 이 지혜사이에 가교를 놓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모든 종교의 사람들에게, 세계는 문제가 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지구를 횡령한 결과가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다. ‘형제’와 ‘자매’인 물, 공기, 불, 그리고 ‘우리의 자매 어머니인 지구’를 부드럽고도 소유하지 않는 존경을 하면서, 생태계의 후견인인 프란치스코는 인간들이 ‘더 작은자들’의 역할과 ‘하느님으로 인해 모든 피조물에 종속되는’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창조의 공동체를 향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화해의 영성은 프란치스코의 삶에서 너무나 뚜렷하며, 이것이 ‘앗씨시의 정신’이고, 다른 종교 전통의 구성원들을 존경하고, 서로 주의 깊은 대화를 나누라는 초대이다. 국가들 사이의 전쟁과 위협, 하느님을 그들의 정당화의 수단으로 내세우는 것은 ‘좋으시고, 모두 좋으시며, 가장 최고의 선이신’ 하느님으로 이해하는 프란치스코의 전통과 대립된다. 국가들과 개인들 사이의 화해를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난한 사람의 모습에서 희망의 징표를 찾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사람들, 새들, 늑대들에게 말할 때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이라고 시작한다. 나도 그렇게 끝낸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월리암 J. 쇼트

[원출처] <가난과 즐거움-프란치스코회의 전통>, 월리암 J. 쇼트(프란치스코회)
[출처] <참사람되어> 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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