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는 우리에게 믿음의 다양한 형상을 제공한다: 홍해를 건너고, 사막으로 들어가며, 불기둥을 따라 가는 것. 그러나 믿음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다른 형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성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 형상은 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다.
돌로 만들어진 탁자와 날으는 양탄자를 그려보자. 탁자는 단단하다: 탁자 다리는 튼튼하다. 양탄자는 탁자 높이에서 날고 있지만 그 밑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을 탁자를 한 번 보고, 양탄자를 한 번 본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오너라” 하고 부르신다.
양탄자에 오르는 신앙
탁자는 아주 안전해 보인다. 당신은 무엇 위에 올라가 있는지도 알고, 모퉁이가 어딘지도 알고,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 것도 잘 안다. 당연히 당신은 탁자 쪽으로 간다. 그러나 주님은 “아니, 이 쪽으로 오너라” 하고 말씀하신다.
“그 위로요, 주님?”이라고 당신을 묻는다. “그것이 저를 받혀 줄지 어떻게 압니까?”
주님은 계속해서, “다시 말한다. 이 쪽으로 오너라.”
“그러나 주님,” 당신은 항의하며, “양탄자를 지탱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떨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안심시키시며, “내가 너를 불렀고, 내가 너를 받혀준다. 너를 받혀 주는 이는 바로 나다.”
결국, 마지못해, 당신은 포기한다. “알겠습니다, 주님,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요.”
그리고 나서 당신을 그것을 시험해본다. 당신은 그것을 눌러 보고는 양탄자가 약간 내려앉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바닥까지 내려앉지는 않는다. 당신은 있는 대로 용기를 내어 그 위로 기어올라 간다.
갑자기, 당신은 둥둥 떠 있는다! 당신은 생동감을 느낀다!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계심을 확실히 알게 된다. 당신은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른다. “와우, 주님! 당신을 왜 믿지 못했을까요? 당신의 말씀을 더 일찍 들었더라면, 저는 다시 태어났을텐데요! 저는 다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았을 겁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당신은 무슨 일인지 몰라 불안해 한다. 당신은 “주님, 멈춰 주세요”라며 애원한다. 그러나 주님은 멈추시지 않는다.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당신은 자신이 정말 안전한지 의심을 한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당신은 주님이 저쪽에서 양탄자의 실을 푸시는 것을 보게 된다!
당신은 즉시 돌탁자 위로 뛰어 내리고,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잠시 후 주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는다. “거기서 무엇하고 있느냐? 나는 네가 나를 믿는 줄 알았다. 너는 모든 걸 버리고 날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예, 그렇지만....”
“좋다, 그러면, 나를 믿어라. 네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모두 가져가겠다. 나는 너에게 자유를 주겠다. 나는 너를 새로 창조하겠다. 그러나 너는 나를 믿어야 한다. 너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주님,” 당신은 주저하면서 말한다. “그렇지만 제발 실을 뽑는 것은 그만 둬 주십시오!”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은?
당신은 양탄자 위에 머뭇거리며 올라탄다. 당신은 다시 한번 환희를 느낀다.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한다. 당신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본다. 주님께서 또 실을 뽑고 계신 것이 보인다. 양탄자는 점점 엉성해져 간다. 당신이 처한 상황을 보자. 양탄자는 거의 다 엉성해졌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진다. 그리고 저만치 있는 돌탁자는 너무나 안전해 보인다. 당신은 흥정을 하기 시작한다. “주님, 왜 제가 탁자 위로 올라가면 안되는 겁니까? 그 곳에서도 전 여전히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계명을 어기지 않을 겁니다. 일요일마다 꼬박 꼬박 미사에 참석할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더 많이 베풀겠습니다. 여긴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을 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 분은 “나만 믿어라,” 하고 당신을 안심시킨다. “그 곳은 의미가 없다. 여기에 삶이 있다. 내가 너의 즐거움이 되겠다. 내가 너의 희망이다. 내가 너를 충만케 하리라.”
“알겠습니다, 주님,” 당신은 대답한다. 시간은 흐르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실을 뽑으시는 것을 본다.
주님이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시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을 지탱해 주고 있었던 힘은 양탄자가 아니라 주님이셨던 것이다.
결국, 당신은 당신이 잃을 것이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이 더욱 풍부하게, 복음에서 말했듯이 30배, 60배, 100배만큼 당신의 품에 부어져 넘쳐흐르게 되었음을 (루가 6,38) 알게 된다.
모세의 순례는 출애굽이 끝나기 전에 이미 완성되었다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것은 항상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하느님의 너그러움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베푼 것은 몇 배로 늘어나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그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믿음의 순례길에 첫 발을 디뎠을 때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출애굽의 마지막 부분은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백성들을 역사 속에서 이끌고 계시다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모세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요르단 건너편에서 그 곳을 볼 수는 있었지만 가나안에 발을 디디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았다.
후세의 신앙인들은 이것에 관해 어떤 신학적 설명이 곁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사막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지 않은데 대한 벌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겪은 하느님에 걸맞는 해석을 내렸는데 그것은 벌을 주고 복수하는 하느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겪은 하느님이 아니었으며, 성서에서 내가 볼 수 있는 하느님의 모습도 아니었다. 내 생각으로는 모세는 이미 약속한 땅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굳이 그 곳에 발을 디딜 필요가 없었다. 그는 믿음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느님 나라 안에 살고 있었다. 그는 시나이 산에서 주님을 만났고, 그래서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어딘가로 다시 갈 필요가 없었다. 그의 순례는 출애굽이 끝나기 전에 이미 완성되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요르단강의 서쪽이나 동쪽이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여정 자체가 모세에게는 목적지였던 것이다.
하느님은 계속해서 그들을 약속한 땅을 부르셨으나 그들 역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됨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이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굳건하고 지속적으로 믿었더라면 그들의 여행은 훨씬 빨리 끝났을 것이다. 그들은 사막을 곧장 건너 가나안 땅으로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의심을 했다. 그들은 주저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길로 가려고 했다. 당신이나 나처럼 그들도 유혹을 받았다. 당신은 믿고 싶지만 그 좋은 소식은 믿기에는 너무 근사하게 들렸다. 당신은 믿고 싶어하나 당신이 타고 있는 날으는 양탄자를 하느님이 정말 잡아 주실지 의심한다. 그리하여 당신의 여정은 -어떤 여행을 하고 있건 간에-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 다른 도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구심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당신에 대한 주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에게 하신 약속과 다를 것이 없다.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하면 그 분께서 당신을 지탱해 주실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을 먹이실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에게 삶을 주실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의 가슴을 사랑으로 채우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당신도 사막이 전혀 사막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약속한 땅으로 가는 길은 사막 한가운데서도 생명으로 이끈다. 당신이 전혀 기대 하지 않을 때, 오아시스가 나타난다. 성서에서 말씀하시듯, 하느님은 메마른 땅과 사막에 기쁨을 꽃피울 것이다 (이사야 35,1).
아니면 모세처럼, 당신도 도착한다는 목적 자체를 이루기 위해 거기에 도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하느님은 당신이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당신에게 약속한 땅을 주실 수 있다. 당신은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 살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은 따라 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