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원로가 말했다: “나는 나에게는 유용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손실을 가져오는 일을 결코 원하지 않았소. 다만 나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나에게 풍요로움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소.”
페르메의 테오도르 원장이 말했다. “요즈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주시기도 전에 휴식을 취합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일은 우리가 돈을 만드는 방식이며,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면 참으로 우리가 더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 주변의 세계에 질적으로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가를 일보다 더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삶에 대한 접근 방식은 없을 것이다. 일 중심의 사회에서 영적인 깊이를 측량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며 왜 그 일을 하는가 이다. 혹은 반대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하지 않으려는 일과 또한 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영적인 깊이의 측량 잣대가 된다.
일은 관상적인 통찰에 대한 관상가의 응답이다. 실제로 일은 창조에 관한 그들 생각의 깊이-혹은 천박함-를 알려주는 응답이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아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나머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심각하게 함축적으로 의미한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를 결정한다. 내가 하느님의 바다를 항해할 때 거룩하지 않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을” -양동이와 식물들 그리고 가래와 땅을- “제대 위의 전례도구처럼 취급하라”는 베네딕또회의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매우 심오한 관상적인 선언문이다.
우주의 거룩함 안에서 관상가는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 그 우주를 창조한 하느님에 맞갖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모독하는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이윤, 탐욕, 여가 즐기기, 발전, 산업, “방위” -신성모독 행위이다.
가장 요구되지만 자주 간과되는 창조 이야기의 측면들 중의 하나는 창조가 끝났을 때 실제로는 창조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대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나머지 창조의 과정을 수행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지구에 하는 것은 창조를 계속시키거나 파멸시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 계속되는 세계 창조에서 우리의 역할을 생각하는 방식에 달려있다.
일은 창조에 대한 우리들의 기여이다. 일은 우리를 나머지 세계와 관계를 맺도록 해준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완수하도록 해준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손상되지 않은 세계, 모든 이에게 충분한 세계를 맡기셨다. 오늘날 관상가의 질문은 우리가 후대에게 어떠한 세계를 남길 것인가 하는 것이다. 관상가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세상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질서, 청결함, 환경에 대한 배려는 순간 순간,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작은 행성의 모습에 하느님의 영광을 가져온다.
이상적인 상태는 일을 피하는 것이 아님을 관상가는 알고 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일은 그들이 “정원을 갖고 간수하는 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 그들은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일은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볼 때 죄에 대한 벌이 아니다. 일은 성실한 인간의 특징이다. 우리는 일을 지나치게 하기 위하여 살지 않는다. 우리는 일을 잘하고 목적을 갖고 일하며 정직하게 질적으로 예술적으로 일하기 위하여 산다.
관상가들이 닦는 마루는 그보다 더 잘 닦이지 않는다. 관상가들이 키우는 감자는 그것들이 자라는 토양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손상시키지 않는다. 관상가가 고안하고 건설하는 기계들은 삶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삶이 더 가능하게 되기 위하여 존재한다. 관상가가 섬기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보살핌을 받는다.
관상가는 “정원을 가꾸고 보전하라”는 개념에 압도된다. 일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지 않는다. 일은 우리가 오기 전에 그랬던 것보다 더 가까이 하느님의 다스림을 실현한다. 일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데려가지 않는다. 우리를 통하여 일은 하느님의 역사를 계속한다. 일은 인류의 사제적 직분이다. 일상적인 것들을 하느님의 위대함으로 바꾼다.
진정한 관상가가 되고 공상적인 무당이 되지 않으려면 나는 이 세계의 보전이 내가 하는 일에 달려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삶은 무의미한 공간이 될 것이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