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민중은 하느님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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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민중은 하느님의 얼굴"
  • 마리 데니스 등
  • 승인 2017.12.2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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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메로-1]

1980년대에 엘살바도르는 국제사회에서 버려진 나라였고 미국이 지원하는 살인적인 군대의 폭탄과 총 아래 있었다. 그렇지만 중앙아메리카의 한 작은 나라로서, 엘살바도르는 그 초록지형과 짙푸른 화산들, 영양실조의 어린이들을 지니고 최악의 폭력에 휘말려 있으면서도, 결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역사의 하느님께 충실함으로써, 엘살바도르는 그 이름의 의미처럼 구세주를 생생하게 구현하였다. 그리스도교가 너무나 자주 무책임하거나 감상에 젖은 모습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에서 살바도르 사람들의 증언과 그들의 대주교의 증언은 북미의 우리 모두에게 구원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 각자에게 그리스도는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삶과 사명이 나의 삶과 사명처럼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나처럼 하십시오. 땅에 묻히기를 허용하는 씨앗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죽임을 당하도록 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통을 피하는 사람들은 홀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내가 모두를 위하여 나의 생명을 내놓은 것처럼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여러분의 생명을 내놓는다면, 여러분은 큰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깊은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가십니다.”(브록크만, <교회는 여러분 모두입니다: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의 사상>, 1984년)

 

Óscar Arnulfo Romero

메데인의 신학을 염려한 보수적 사목자 

오스카 로메로는 1917년 8월 15일, 시골의 한 가족에게 태어났는데, 엘살바도르의 동부 산미겔의 차우다드 마을에서였다. 그는 초등교육을 받고 이어 지역 목수일을 배우게 되었으나, 신학교에 들어가고 싶은 염원이 마침내 실현 되었다. 로메로는 산미겔과 산살바도르에서 공부를 마친 후 1942년 4월 4일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나, 2차 세계대전 때문에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엘살바도르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초기 사목과제는 본당사목, 산미겔 교구의 비서로서 교구일, 고교 원목, 그리고 교구 신문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훌륭한 설교가로 알려졌고 경청하는 신자들의 일상 경험 속에 메시지를 심는 데에 주력하였다.

1967년 로메로는 살바도르의 주교회의에 사무총장이라는 새 직책을 수락하였다. 곧 이어, 그는 중앙아메리카 주교회의의 상임사무처장으로 지명되었고 또한 산살바도르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 그의 매우 보수적인 사고방식은 비록 그가 언제나 교회의 충실한 아들이었지만, 2차 바티칸 공의회로 시작된 교회 안의 변화에 대하여 우려를 하게 만들었다. 그는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데인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의 사상도 똑같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메데인 회의의 메시지는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교회를 확실하게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 편에 다시 서게 하였다 – 특히 구조적 혹은 기관적 폭력의 영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편에. 그 결과는 복음의 메시지를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라고 이해 하여온 로메로 같은 사람들에게 근본으로부터 충격을 주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되었다.

1971년 로메로는 <오리엔타시온>(방향)이라는 대교구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다. 이 직책과 대교구의 기타 직책, 대교구 신학교 학장 등을 맡으면서, 그는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년 동안 그는 엘살바도르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선의에 대한 믿음에 매달려왔다. 그리고 사회, 정치, 경제적 기존 상황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그룹들의 행동에 대하여 무척 우려하였다.

 

Óscar Arnulfo Romero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을 발견하다 

1974년 로메로는 우술루탄의 산티아고 데 마리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폭력에 반대하는 발언을 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는 발언을 매우 사적으로 공손하게 했는데, 살해가 단지 이탈에 불과하고 정부의 정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부가 알기만 하면 살해가 멈출 것이라고 믿으면서 폭력 반대의 발언을 했다.

로메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특히 그의 교구 내의 커피 농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비참한 상황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사제관과 교구 건물들을 개방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가해진 불의를 단죄하였다. 천천히, 그의 교구에서 착취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 온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더 이해하도록 로메로를 이끌었다. 연민에 의하여 움직여진 그는 영혼 속에 의분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고 기존 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권력가들로부터 자신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1977년 2월,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가 산살바도르의 대주교로 취임했을 때, 그 지역의 경작할 수 있는 땅 총 면적의 60%를 14 가족이 독점하고 있었다. 땅에 관한 투쟁은 스페인 정복 때부터 시작되었고, 커피 대기업인들이 그들의 소작지들을 통합 정리 할 수 있도록 원주민들의 공동토지 소유권을 폐지시킨 1881년 엘리트들의 결정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땅의 강탈은 1932년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원주민들은 커피 영주들의 보호자인 살바도르의 군대에 저항하며 일어섰다. 살바도르 사람들은 이 사건을 “대학살”이라고 하는데, 군대는 이 항거에 잔혹하게 대응하였다. 단지 한달 사이에 3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1961년을 보면 12%의 소작농부들에게 땅이 없었다. 1971년경에는 30%의 소작농부들에게 땅이 없었다. 그리고 1980년에는 약 65%의 농부들에게 경작할 땅이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애국자가 되려면 신부를 죽여라

로메로는 군대 소령인, 대통령 아르투로 아르만도 몰리나의 주도 아래 행해진 최소한의 토지개혁 프로그램이 시행된 지 1년 후에 교구장으로 왔다. 그러나 대농 지주들과 군대의 극우파들은 이 개혁조차 무효로 만들면서 개혁을 지지하는 모든 지역 사람들을 노리고 있었다. 준 군사조직과 군대 그룹들은 교회가 소작인들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지하자 교회에 대하여 전-방위 공격을 시작하였다. 외국인 사제들이 국외로 추방되었다. 도시의 벽에 낙서들이 붙었다: “애국자가 되라, 신부를 죽여라.”

대주교가 된 후 수주일 안에, 로메로의 친구인 예수회 회원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와 두 동료가 살해되었고 보안 부대는 산살바도르에서 일어난 두 공개 시위에 총을 발사하였다. 수개월 안에, 사목요원들과 또다른 신부, 알폰소 나바로가 죽음부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1978년과 1979년에 이르러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에르네스토 바레라 신부가 살해되었다. 옥타비오 오르티즈 신부와 네 명의 젊은이들이 피정 중에 살해되었다. 라파엘 팔라시오스 신부와 알리리오 나폴레온 마시아스 신부도 살해되었다. 마을 전체가 피난처를 찾아 도시로 숨어들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하여 엘살바도르를 떠났다.

1979년 10월, 젊은 개혁파 장교들이 대통령 카를로스 움베르토 로메로를 전복하고 자신들의 사령관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두 개의 다른 민간 정부를 수립하였는데, 과두정치에 충실한 기존의 군 사령관이 토지개혁을 지지하는 농부, 사제, 혹은 개혁 장성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 정책을 단행하면서 이 민간 정부들은 사라졌다. 후에 미국은 자기들이 지지하는 민간인을 군대가 지지하는 조건으로, 고조되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경제원조와 최정예 군대를 살바도르에 제공하였다. 미국의 노틀담 대학교 졸업생인 나폴레옹 두아르테는 임시사령관에 그리고 후에는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초기 집권 2년 동안, 3만 명이 살해되었다.

비록 군대는 그들의 전쟁이 파라분도 마르티 국가해방전선(FMLN)의 게릴라 소탕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했지만, 교묘히 피해가는 게릴라들을 “체포할”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게릴라들의 “지지”를 차단하는 방법을 취했는데, 군대는 엘살바도르 전체 인구의 90%가 게릴라의 지지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농촌지역에서는 암살대가 농업협동조합을 조직하는 농민들이나 토지없는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제압하려는 의도로 활발하게 움직였다.

1980년이 되자 준 군사조직과 국가안전처 세력은 반폭동 전략을 더욱 강화하였다. 1980년 1월, 2십만 명의 사람들이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평화롭게 시위를 하고 있을 때, 군대는 군중에 발포하여 50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시민들의 사기를 꺾고 위협을 가하여 굴복시키려고, 군대와 그 공범자들은 살인을 할뿐만 아니라 고문을 가하였다. 산채로 피부를 벗기고, 목을 베고, 참수하고, 엄마들의 자궁에서 태어나지 않은 애기들을 칼로 찔렀다. 시신들이 독수리 먹잇감으로 마을 광장에 버려졌다. 반역으로 비난받지 않기 위하여 아무도 시신에 감히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Óscar Arnulfo Romero

1980년 3월 24일,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는 거룩한 섭리 병원의 경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 살해되었고,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한 목자가 되었다.

로메로가 죽은 후, 엘살바도르의 전쟁은 극에 달했다. 1980년 5월, 피난민들이 온두라스에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하여 숨풀 강을 건너가고 있을 때 살바도르 군대는 그들을 학살했다. 600명이 죽었고, 대부분은 여성들과 아동들이었다. 1980년 12월에는 네 명의 미국인 교회 여성들이 살해되었다. 메리놀회 수녀들인 모라 클라크와 이타 포드, 우르술라회 수녀인 도로시 카젤, 그리고 클리브랜드의 평신도 선교사 진 도노반이 잔혹하게 강간당하고 살해되었다. 1981년 12월 거의 천 명에 가까운, 대부분은 여성들과 아동들인 사람들이 모라잔의 북부지역인 엘 모조테에서 군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리고 1989년 11월, 절망적인 80년대의 말에, 여섯 명의 예수회 사제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일했던 두 여성들이 도살당했다.

연옥영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구하라

이 시기 내내 폭력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이 모든 살해 사건들의 경우, 폭력은 미국이 자금을 대는 군대에 의하여 그리고 미국의 아메리카스 군사학교에서 훈련받은 장교들과 군인들에 의하여 자행되었다.

로메로는 그저 단순하게 사목자로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이 전쟁을 막아 보려고 하였다. 그는 하느님께 깊은 신앙을 두도록 그리고 정의를 위하여 조직하는 권리를 백성들에게 부르짖으면서, 모든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희망을 그들에게 주었다. 라디오로 중계되는 주간 강론에서, 그는 학살과 고문을 언급했으며, 시민들에게 향하는 전쟁의 끔찍함을 폭로하였다. 그는 살바도르 국민들이나 그 자신을 전복자들로 규정하는 미국이나 엘살바도르의 극우 세력을 거부함으로써 저-강도 분쟁이라는 그릇된 방식과 대면하였다.

다른 어떤 살바도르인도 저-강도 분쟁이나 폭동진압 전략을 뒤엎기 위한 도덕적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다. 로메로의 비폭력적이고 예언자적 입장은 백성들의 마음과 정신을 얻고자 하는 정부의 근본 목표에 효과적으로 손상을 가하였다.

수줍음을 타는 사목자 오스카 로메로는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의 영성을 숨기지 않는 대중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역사의 열린 공간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죽었으며, 목소리가 없는 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영성의 정수는 저격병의 총알도 자신의 소심함도 결코 막을 수 없었던 예언자적 목소리를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로메로, <사랑의 폭력>에서)

 

Óscar Arnulfo Romero

민중의 목소리가 된 로메로 대주교

로메로는 전통적인 성직자이고, 보수적인 신학자요, 관대하지만 주저하는 사목자였으며, 정기적으로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 사람이었다. 철저한 자기-비판과 금욕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으나, 그는 살바도르 백성의 일상적이지만 난장판이며, 갈등에 젖은 투쟁에 말려들은 하느님을 발견하였다.

로메로에게 사람들은 은총의 보고였다. 비록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목숨을 내놓았지만, 그는 비극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의 사랑이라는 선물을 뚜렷하게 감사하는 모습의 사람이었다. 이처럼 그는 예측하지 못했던 거룩함 속으로 “빨려들어 갔지만” 그 거룩함을 백성들의 울부짖음과 역사의 요구 속에서 발견하였다.

복음의 요구에 승복하면서 로메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에 목소리를 주었으며 해방의 역사적 차원과 초월적인 차원을 똑같이 붙잡는 믿음을 끌어안았다. 동료 주교들이 정치로 교회를 더럽힌다고 비난했을 때, 그는 결코 보복하지 않았다. 거듭거듭 그는 더럽고 낙오되었으며 짓밟힌 사람들 속에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생명의 하느님께 모두가 회심하기를 바란다고 선포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함으로써, 로메로는 부유한 이들, 정부 혹은 군대와 단절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그들을 회심으로 초대하였다. 권력가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그는 그들의 희심을 요청하였다. 국가안전처 세력이 그의 암살을 도모했을 때, 그는 사랑으로 그들을 끌어안았다. 멘토인 예수님처럼, 로메로는 그의 백성들의 십자가 처형 한 가운데에서 용서를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특히 저를 미워하고, 제가 폭력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저의 명예를 훼손하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인 여러분은 살인, 고문, 포악, 불의로 여러분의 손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 회심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깊이 사랑합니다. 여러분이 파멸의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저는 유감입니다."(로메로, <사랑의 폭력>에서)

"사랑과 헌신으로 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충실한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저를 용서해 주기를 청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저의 적들이 저에게 귀를 기울일 때에 더 많은 기쁨을 느낍니다. 저는 그들이 제 말을 경청하는 이유가 그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복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무런 해가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회심하기를, 충실한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으로 행복하게 되기를 간청합니다."(브록크만, <교회는 여러분 모두입니다>에서)

민중은 거룩함의 원천

로메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교계, 주교, 혹은 신학자들이 아니라– 거룩함의 원천이라고 가르쳤다.

로메오의 삶은 역사를 통하여 모범적이거나, 거룩한 삶에 질적으로 공통적인 특색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충실하고, 자아에 죽으며, 죽을 때까지 혹은 일생 내내 정의, 평화, 그리고 사랑에 투신하는 모습; 자기의 적들을 용서하는 모습; 한계를 넘어 하느님을 따르려는 의지, 교회와 국가가 요구하는 확실성에 비추어 자주 받게 되는 중상 비방을 평화롭게 견디는 모습이다. 로메로는 이러한 고전적 거룩함의 범주들을 표현하였다. 또한 그는 이러한 범주들의 의미를 깨뜨리고 열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내었다.

로메로의 영성–그의 삶, 그의 예언자적 명료함, 그의 혼란까지도–은 우리에게 영성이란 노력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 우리의 개인과 사회 삶에서 은총을 발견하는 것이며 개별적인 성취가 아니라는 것, 하느님의 신비가 우리를 앞으로 끌어당기는 곳에 우리의 취약함과 진실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성인”이 되려고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바오로 성인은 가장 위대한 덕으로서의 사랑이 거룩함을 관계적이고 역사적으로 만든다고 확신하였다. 거룩함은 홀로 연마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키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콘서트 피아노 주자들이나 발레리나들이 홀로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방식처럼 훈련하여 성인들이 되지 않는다. 거룩함은 투신이고 은총이며, 우리가 추구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선물인 어떤 것이다 – 로메로에게 거룩함은 그가 사랑했던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이 준 선물이었다.

로메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의 마음을 바꾸도록 허용한 관대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로메로의 메시지였다 – 가난한 사람들은 만일 우리가 기꺼이 그들에게 우리 자신을 열고 그들과 함께 한다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성사라는 메시지.

 민중, 희망을 발견하는 출구

오스카 로메로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사회현실에 대한 진실을 아는 능력을 믿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대안의 길을 만들어내는 상상적 역량이 있다고 신뢰하였다. 그는 결코 이론가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여정에 합류하였다. 로메로의 중요성은 가난한 사람들을 뒤처지게 하는 정책들의 영향을 예언자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는 사실에서 온다.

매일 아침 길거리에서 주검과 마주치면서, 살바도르 사람들은 어둠을 말하지 않고, 작은 “열림들”을 비쳐주는 한 줄기 빛을 말했다. 로메로의 삶은 우리에게 권력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도록 열어준다. 그리고 계속하여 그들을 억압하는 구조들과 정책에도 불구하고 존엄성을 간직하기 위하여 애쓰는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절망보다 희망을 발견하는 출구를 우리에게 열어준다.

로메로의 위대한 신앙의 행위는 그가 가난한 이들을 믿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운명을 다져가고 흔들리는 공동체들을 다시 건설해가는 주인공이요 조직가들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확신에 자기의 전 생애를 기꺼이 걸었다. 그는 자신의 교회적인 명성을 무릅썼으며, 기꺼이 대중조직의 앞잡이요 진보적 예수회원들의 꼭두각시라는 평가를 받아들였다.

농민들과 보통의 노동자들이 로메로 대주교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교회와 국가의 권력가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단지 로메로가 보았던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는 민중들에게서 공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엄성과 유머 감각을, 그들을 보호할 모든 문이 닫혀 있을 때에도 발휘되는 그들의 창의력을 보았다. 그는 그들의 고뇌와 그들의 희망을 보았다. 한 마디로 그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Óscar Arnulfo Romero

로메로, 20세기의 예언자

신학교 시절의 훈련, 로마에서의 공부, 수년 동안의 기도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것처럼 하느님과 함께 걸어본 적이 결코 없었다. 그는 대교구의 법률보조사무실로 실종된 아들 소식을 문의하기 위하여 왔지만, 결국 아들의 고문 받은 몸이 개들의 먹이로 버려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한 어머니의 손을 잡을 때까지 결코 하느님의 손을 만져본 적이 없었다. 로메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가질 때에, 금전적 자본도, 정치적 영향력도, 그리고 권력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 때에, 그리고 하느님 없이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신앙과 회심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로메로, <사랑의 폭력>에서)

로메로는 그의 삶으로 새로운 천년기로 가는 영적 여정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단지 상징일 뿐만 아니라, 선물이 되는 20세기의 예언자다. 그는 우리가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위험을 무릅쓴다고 자주 말했다. 모든 강론에서, 로메로는 세계가 모든 인간 생명의 가치와 모든 죽음 뒤에 있는 고통을 볼 수 있도록 애썼다. 죽기 닷새 전, 그는 외국인 언론인들에게 그들의 중요한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우리 백성들의 사진을 세계에 가져갈 사람들입니다. ⵈ 세상이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에게 그들의 연대를 제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ⵈ 우리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가 죽어가고 도망가고 있으며 산속에 피난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로메로, 1980년 3월 19일 인터뷰에서)

그들의 죽음을 잊지 마라

살바도르 사람들의 고통을 잊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수많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살바도르의 가족들, 7만 5천 명의 목숨들을 앗아가고 5백만 명 이상의 삶에 깊은 상처를 입힌 10년 이상 계속되는 전쟁 때문에 죽어가고 있고, 도망가고 있으며 산속에 피난처를 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이 우리가 묻고 있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배신과 악의 신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신앙의 신비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하여 성찰할 때에 언제나 대답보다는 질문들이 더 많다.

오늘날 엘살바도르의 상황은 12년간의 전쟁, 7만 5천명의 죽음, 그리고 취약한 평화협정 조인 후에도 여전히 어둡다. 그리고 그렇게 엄청난 유혈사태 이후, 살바도르 아이들 4명 중 1명이 여전히 5살이 되기 전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죽어가고 보통 가족의 연수입은 400달러에 불과하다. 과거에도 그런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을 억압하고 배제시키는 경제구조와 체제 그리고 그들이 항거하는 체제의 비참한 희생자임을 알고 있다.

지옥 같은 무게에 직면하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생명의 하느님께 매달려 있는, 훌륭하고 심지어 기적적이기까지 한 인간의 유산을 상속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초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그들이 단지 복음의 수혜자들일 뿐만 아니라, 기쁜 소식, 세상에 빛과 구원의 선포자들임을 이해하고 있다. 오스카 로메로와 그의 백성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도 기쁜 소식이다.

선함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잔인한 전쟁과 투쟁의 고안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었던 살바도르 사람들의 용기 있고 억누를 수 없는 열정 속에서,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명분을 위하여 그들의 목숨을 바친 사람들, 특히 백성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쳐서 쓰러졌고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유산을 남겨준 사목자에 대한 기억 속에서 선함은 이어진다.

예수처럼, 정치적 사랑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로메로의 마니피캇이었다. 그들은 그가 기도했던 시편이었다. 그의 예언자적 상상과 연민이 넘치는 가슴은 백성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드러났으며 그는 백성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였다. 그의 신학, 영성은 움직임에서 형성된 것이었고, 고통과 희망의 시련 속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아마도 영성이 만들어진 역사적 상황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만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또한 그가 했던 말들을 살펴보면서 그의 영성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설교가였고 신학자였다. 그의 말은 엘살바도르의 교회에 썼던 사목서한에 담겨있다. 조심스럽게 작성된 강론들, 일기들과 서신, 그리고 벨지움의 루벵 대학교에서 했던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치적 차원”같은 강연에도 담겨 있다. 그는 이런 글을 사목자로서 분쟁과 잔인함, 대학살, 교회점령자들에게 사목자로서 응답하고 아이들이 살해된 어머니들과 만나며, 끝없는 모임들로 긴 나날을 지낸 후 밤에 작은 방에서 늦게까지 작성하였다.

"저는 여러분에게 단지 사목자로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 사목자는 백성들과 함께 아름답지만 가혹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우리를 세상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잠기도록 한다는 것이고, 교회는 도시로부터 분리된 요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도시 한 가운데에서, 국가 속에서 살았고, 노동했고, 투쟁했고 죽었던 예수를 따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치적 차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영향과 또한 세상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로메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의 관점에서 신앙의 정치적 차원,”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원출처] <오스카 로메로-삶과 글에 관한 성찰(1917~1980)>, 마리 데니스, 레니 골든, 스코트 라이트
[출처] <참사람되어>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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