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 성 스테파노,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순교자(사도행전 7,52)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들을 소홀히 한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완성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도,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며 죄에 대항하고 일어섰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똑같은 명예를 우리가 받을 것이라고 아직도 어리석게 착각한다."
- 대 바실리오 성인
마지막 진복에서, 그리스도는 예언자들을 모범으로 추려낸다.
예언자들은 아마도 당신이 생일잔치에 초대하고 매 주일마다 설교를 부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다. 예언자들은 사회가 규정해 놓은 지침들을 조심스럽게 따르는 예의바른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참회와 회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닫힌 눈과 귀를 비집어 열려고 결사적으로 노력하면서, 예언자들은 소리치고, 고함지르며 때때로 기괴하게 행동한다.
랍비 아브라함 헤셀이 썼듯이: “우리에게 단 하나의 불의한 행동(사업에서 사기를 치는 것,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것)은 별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볼 때 그것은 재해이다. 우리에게 불의는 사람들의 복지에 상처를 입히는 정도이나, 예언자들에게는 실존에 대한 죽음의 일격이다; 우리에게는 에피소드이나 그들에게는 재앙이고 세계에 대한 위협이다 ...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불충했기 때문에 마치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말로 프로페테스(prophetes)는 “다른 이들 앞에서 말하는 어떤 사람”이란 뜻이고; 히브리말 나비(nahi)는 “하느님의 불림을 받은 사람”이다. 다양한 성서교재에서 예언자는 감시하는 사람, 하인, 하느님의 사자로 묘사된다. 랍비 헤셀은 “예언자의 참다운 위대함은 하느님과 사람을 하나로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예언자들은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다. 너는 그것을 죄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건 그냥 실수일 뿐이다. 하느님은 너에게서 더 이상 원하시지 않는다”라는 말들을 잘 하지 못한다. 예언자들은 직접적인 말들을 회피적인 말로 바꾸지 않는다. 그들은 변명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우리의 종교적 예식 행위가 올바른 생활로 유지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꾸중하신다고 그들의 말을 듣는 이들에게 경고한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이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1-24)
그렇다고 예언자들이 너무나 견딜 수 없이 이상한 사람들이어서 죽은 후에나 인정을 받았으며 살았을 때에 전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 그들의 지위가 높든 낮든, 얼굴 대 얼굴로 보는 사람들에게 삶을 변화시키는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말하는 방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을 무시하기 어렵게 했다. 성서의 예언서에서 우리는 예언자들의 말이 열정적일 뿐 아니라 시적이며, 그들의 절망은 염세가 아니라 사랑과 연결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사야가 말하듯이, 예언자의 입이 “날카로운 칼”이라면, 그것은 생명을 구하는 외과의사의 칼이다.
예언자들이 근본적인 주제라고 여겼던 것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그들을 희생하여 부유하게 된 상황이었다:
“[부자들은] 몸에는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술은 대접으로 퍼 마시며
요셉 가문이 망하는 것쯤
아랑곳도 하지 않는 것들.“ (아모스 6,6).
“화를 입으리라!
남의 것을 전당잡아 치부하는 것들아!
…
너희가 꾸민 것은 패가망신 할 일뿐,
뭇 백성을 망치다가 죄를 받게 되었다.
담벼락 돌이 원수 갚아 달라고 울부짖으며,
집안에선 들보가 맞장구치리라.
화를 입으리라.
죄 없는 사람의 피를 빨아
성읍을 세우는 것들아,
애써 세운 것이 허사가 되리니!“ (하바꾹 2,6. 10-12)
“옳게 살고 바르게 말하는 사람,
착취로 돈을 벌지 않는 사람,
뇌물을 마다고 뿌리치는 사람,
살인하자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먹는 사람,
악한 일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
이런 사람은 모든 시련을 이겨내리라.“ (이사야 33,15)
이 말을 들어라,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의 숨통을 뚫는 자들아,
겨우 한다는 소리가 “곡식을 팔아야겠는데
초하루 축제는 언제 지나지?
그리고 안식일은 언제 지나지? 밀을 팔아야 하겠는데
안식일은 언제 지나지?
되는 작게, 추는 크게 만들고 가짜 저울로 속이며
등겨까지 팔아먹어야지.
힘없는 자 빚돈에 종으로 삼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자 종으로 부려먹어야지“ 하는 자들아.(아모스 8,4-6)
예언자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저지르는 죄를 하느님께 대한 불복종으로 분류하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은 참으로 우리들이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난 후 그는 하느님께 말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이 이야기의 함축된 의미는 한 사람이 죽음의 일격을 가하는 것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므로, 다른 사람의 죽음에 기여하는 행동을 하거나 그것을 막지 못한 행동은 나를 살인의 공범자로 만든다. 이사야 예언자가 다음과 같이 경고한 것처럼:
“어쩌다가 성실하던 마을이 창녀가 되었는가!
법이 살아 있고 정의가 깃들이던 곳이 살인자들의 천지가 되었는가“ (이사야 1,21)
개인적으로 악한 짓을 한 사람들은 사회의 죄악에 연루된다. 예레미야는 죄를 도발하는 예언자들조차 죄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며, 너희 눈으로 찾아보아라!
장마당 마다 찾아 다녀 보아라,
바르게 살며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
예언자, 사제 할 것 없이 속임수 밖에 모르는 것들“(예레미야 5,1; 8,10)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예언자들에게서 경고를 받는다. 아합왕 시기에 엘리야는 바알 숭배를 조장하는 이세벨 왕후에 반대하였다. 그것은 그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반대였다. 그리고 숨어있을 때 엘리야는 하느님의 속삭임을 듣게 되었다. 후에 한 이웃이 갖고 있었던 포도밭을 갖고 싶어서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아합을 비난하면서, 엘리야는 아합의 자손들이 멸망할 것이고 이세벨은 개들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예언을 듣고 아합은 떨면서 참회하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세벨은 참회하지 않았다. 결국 이세벨은 행복한 죽음을 맞지 못했다.
예언자들은 아무도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을 자주 전했으므로, 많은 경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의 이스라엘 공격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였다. 그의 무시무시한 경고는 극단적인 적의를 불러 일으켰다.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 후 왕의 명령에 따라 그는 채찍으로 맞고 가축떼 속에 던져진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몰락을 지리 정치적인 측면에서 본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들이 불복종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벌로 보았다.
예레미야가 여호야킴왕에게 말했던 것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전혀 없었다. 그는 왕에게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죽은 나귀를 치우듯이 끌어내다 묻으리라. 예루살렘 문 밖 멀리 끌어내다 던지리라”(예레미야 22,19)고 하였다. 예레미야는 숨었기 때문에 체포와 처형까지 피할 수 있었다. 후에 그는 한 저수지에 갇혔는데, 그곳에서 굶어 죽게 될 것이었지만 마지막에 왕이 그를 풀어주라고 하였다. 예루살렘의 함락 후에 예레미야는 에집트로 추방되어 가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곳에서 다른 유대 피난민들의 우상숭배에 항의한 후 돌로 맞아 죽었다고 한다.
예언자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기대하였다. 이사야는 다윗 가문의 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고 선언하였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전해준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혹사하는 자의 채찍을 꺽으실 것입니다...
마구 짓밟던 군화, 피투성이 된 군복은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사야 9,2. 4. 5-7 또한 11,1-9참조)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으며, 동료 유대인들에게 속죄의 세례를 받으라고 청했고 “그러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루가 3,4. 6)이라고 약속한다. 요한 세자는 하느님의 뜻에 너무나 순종하고 곧장 응답하였기 때문에 이콘에서 그는 자주 천사의 날개를 단 모습으로 나타난다(그리스 말로 안젤로스(angelos)는 “사자(使者)”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세리들의 악명 높은 탐욕을 책망하면서 정해진 금액이상을 받지 말라고 하였고, 군인들에게는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쓰지 말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하였다. 요한은 예수가 세례 받을 때 그에게 내려오는 비둘기를 보았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전의 예언자들처럼, 요한은 지배자들을 탓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헤로데가 ”했던 모든 악“을 비난했기 때문에 요한은 감옥에 갇혔고 마침내 목이 잘렸다.
짐 포레스트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