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원로가 말했다, “흔들리는 물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이질적인 생각들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관상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없다”.
침묵은 소리로 이루어지는 사회 속에서 잃어버린 예술이다. 라디오가 우리를 깨우고 우리가 잠에 떨어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TV는 프로그램을 계속 방영한다. 우리는 자동차에서도, 승강기와 사무실, 대기실에서도 음악을 듣는다. 우리는 집안 구석구석에서도 소리에 둘러싸여 있다. 사무실 곳곳에 거리 곳곳에 중계방송 수신기가 장치되어 있어 크고 찢어질 듯이 외쳐대는 소리를 듣는다. 테이프를 듣느라고 우리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있다. 해변가에서는 CD를 들으며 누워있다. 우리는 달가닥대는 소리에 둘러싸여 있고 그 속에 침몰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것을 방해한다.
현대사회가 잊어버린 것을 관상가가 알고 있는 것은, 영적인 발전을 돕는 참다운 자료가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적인 발전은 자아라는 주관적인 문제에 달려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들 안에, 우리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주고있는 메시지 안에, 매일 우리가 씨름하고 있는 인간 영혼의 시민 전쟁 안에 바로 영적인 발전에 관한 자료가 들어있다. 그러나 고요해지고 귀를 기울일 때까지 우리는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조차 절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자신에 관해서는 더더욱 알 수가 없다.
침묵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침묵 속에서 우리자신과 맞대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침묵은 삶에 있어 매우 위험한 부분이다. 침묵은 우리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침묵은 우리 안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을 상기시켜준다. 침묵은 우리의 이면을 보여주는데, 그곳으로부터의 출구는 아무 곳에도 없으며 어떠한 화장으로도 감추어지지 않고 돈이나 어떤 권력도 치유할 수가 없는 이면이다. 침묵은 오로지 우리 자신만을 동반자로 남겨놓을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침묵은 인생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침묵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우리 모습을 보여주며 그 모습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이 부족한지 말해준다. 마크 스트랜드라는 시인은 “어디에 있든지 나는 잃어버린 그 무엇이다”라고 쓰고 있다.
관상가는 침묵이 하느님의 소리 앞의 자리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과 내가 내 영혼의 중심에서 만나는 공간, 진공이다. 침묵은 영혼이 반드시 지나가야 할 동굴이며, 지나가면서 우리는 삶의 부조화를 깨끗이 치우고 그렇게 함으로써 기다리고 계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알아보고 우리를 채우실 수 있도록 한다.
침묵없는 날은 자아에 대한 현존감이 없는 날이다. 시끄러운 낮의 압력과 끌어당김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평안함을 거부하게 만든다. 침묵 없는 날은 주변세계와 고투한 날이며 산만스러움과 우리마음의 소음에 내맡겨진 날이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주변세계의 불협화음을 내려놓고 폭풍이 아니라 휘파람이신 하느님을 기다리기 위하여 우리자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침묵은 고요함이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줄 뿐만 아니라 그와 똑같이 중요하게 우리의 공적인 자아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가르쳐 준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행복한 성탄절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