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핑계로 문을 닫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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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핑계로 문을 닫지 마라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10.30 0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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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받은 삶-16

한 제자가 70주간 단식을 하면서 한 주간에 한번씩만 먹었다. 그는 성서의 어떤 구절에 대해 하느님께 여쭈었으나 하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봐, 난 이렇게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아무런 발전도 이루지 못했어. 이제 형제나 보러가서 그에게 물어야겠어.”

문을 닫고 밖에 나가 걷기 시작했을 때 하느님의 천사가 와서 물었다: “70 주간 동안 단식을 했어도 당신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지요. 이제 당신은 형제에게 가서 물어 볼만큼 겸손해졌으니 하느님께서 말씀의 의미를 전해 주라고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천사는 그 노인이 찾고 있었던 의미를 설명해주고 나서 떠나갔다.

 

사진출처=pixabay.com

하느님을 들먹이며 우리주변의 세계가 갖고 있는 지혜에 대해 문을 닫아버리는 것은 인간의 과오사전의 내용보다 더 지나치는 영적인 횡포이며 월권 행위이다. 그것은 거룩함의 이름으로 삶을 감옥처럼 만들어 생각에 족쇄를 채우고 비전을 단죄해 버린다. 그런 폐쇄적인 태도는 우리자신을 하느님으로 만들며 영성에 관한 한 매우 유감스러운 핑계나 구차한 명색이 되어버린다.

종교가 저지르는 죄악은 모든 다른 종교가 공허한 것이고 알 수 없으며 부족하고 축복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삶과 지혜와 영적인 비전을 통하여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모른 체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들에 대해 이같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닫는 것은 하느님께 대해 우리 마음을 닫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인 의미이며 깊은 영적인 초대와 관련 있는 문제이다. 하느님의 현존에, 다른 이들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열리는 것은 관상의 정수이다.

마음을 여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삶을 열어야 한다. 저녁식사 때 유색인을 한번도 함께 하지 않은 백인들의 집은 성장할 기회를 놓친 집이다. 백인을 절대로 신뢰해보지 않은 유색인들은 인류애를 확인해 볼 기회를 잃어버린다. 동료로서 여성과 결코 일해보지 않은 남성은 아무리 유능한 간부라 해도 세계의 나머지 반의 모습을 볼 기회를 빼앗긴 셈이다.

무료 급식소에서 한번도 스프를 나누어 준 적이 없는 편안한 관상가, 혹은 부엌에서 요리사와 함께 점심을 해 본 적이 없거나 중고품 가게에서 일해 본 적이 없는 관상가, 혹은 도시빈민 프로그램에 시간을 보낸 적이 없는 관상가는 고립된 거품 속에 살고 있다. 그런 이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그들이 추구하는 대답을 거의 줄 수가 없다.

아이에게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 적이 없거나 아이의 대답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 적이 없는 어른은 삶에 진짜로 개입하지 않고 따라서 배움이 없는 삶을 사는 셈이다. “누가 문밖에 오면”, 베네딕도회의 규칙은 "그대에게 축복이 있기를"하고 말하라고 가르친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세상을 더 알라고 깨우치러 온 것이며 우리의 보잘 것 없이 작은 한 조각 우주를 넘어 존재하고 삶에 대해 또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길을 보여주기 위하여 온 것이다.

열림은 지혜가 넘나드는 문이며 관상이 시작되는 문이다. 열림은 세상이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넓으며 우리자신의 것과 다른 진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정점이다. 우리 안의 하느님의 소리는 하느님의 유일한 소리가 아니다.

열림은 사회생활을 점잖게 하는 것과 다르다. 열림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예의바르게 듣는 것도 아니다. 열림은 또한 정치적으로, 시민으로 처신하고 혹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열림은 단순한 환대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에 마음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열림의 자세가 없다면 관상은 가능하지 않다.

하느님은 모든 소리 안에서, 모든 얼굴 뒤에서 모든 기억 속에 그리고 모든 투쟁의 깊은 곳에서 오신다. 그런 모든 것들을 막는다면 우리자신이 다시 새롭게 변화되어가는 가능성을 막는 것이다.

관상가가 되어가려면 우리의 삶의 팔을 열고 매일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한가지 경험, 한 사람, 한 가지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우리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러면 궁극적인 실제이시며 생명 그 너머의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이 우리의 깊은 곳에 온통 새로운 방식으로 오실 수 있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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