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적 독서는 날마다 조금씩 읽는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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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적 독서는 날마다 조금씩 읽는 연습이다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10.0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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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몇몇 제자들이 안토니 원장을 만나러 왔다. 그들 중에 죠셉이 있었다. 그들을 시험해 보려고 이 원장은 성서에서 한 구절을 내놓으며 제일 젊은 제자에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묻기 시작했다. 각자는 할 수 있는 껏 자신들의 소견을 말했다. 그러나 안토니 원장은 그들 모두에게 “당신들은 아직 이해를 못했군요”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죠셉이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안토니 원장은 이 말을 듣고 말햇다, “참으로 죠셉은 길을 찾았군요. 왜냐하면 ‘모르겠다’고 말했으니까요.”

관상은 사적인 신심이 아니다. 그것은 한가지 삶의 방식이다. 관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놓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형성한다. 우리가 말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가는 곳, 하는 것에 도전을 제기한다. 우리는 “관상한다”라거나 “관상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관상적 삶을 살아 갈 뿐이다.

또한 동시에 관상적 삶에는 한가지 도구가 있는데 이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정신을 새로운 깊이로 이끌어간다. 영혼이 새롭게 기지개를 펴도록 만든다. 이 도구는 또한 다른 모든 것들을 넘어 비전을 확장시킨다. 베네딕도회의 규칙은 공식적인 기도말고는 그 어떤 다른 행위보다도 이 실천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사려 깊고 성찰적인 독서, 성서의 교훈에 몰입하고 베네딕도회가 말하는 “다른 거룩한 책들”의 가르침에 몰입하는 것은 나머지 전 삶이 그것에 따라 살아지는 배경을 마련해준다. 독서안에서 수도적 정신은 자신을 점차 알게되는 것이다.

 

사진출처=dunyadinleri.com

성서를 신중하게 읽는 것은 두가지 이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게 가져가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매일같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과 대면하도록 해준다.

수도적 독서는 날마다 조금씩 읽는 연습이다. 한 쪽, 한 문단, 한 문장, 그리고 나의 흥미를 돋우고 자극시키는 어떤 말이나 구절의 의미를 추출해 낸다. 그러면 영혼의 씨름도 시작된다. 질문은 다음과 같이 되어간다: 왜 이 말이나 구절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오는가? 왜 이런 말이나 상황이 나를 성가시게 하는가? 그것은 나에게 무슨 의미이며,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 구절은 내 안에서 어떤 느낌을 끄집어내는가?

거룩한 말씀을 읽는 것은 천천히, 성찰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 순간의 선입견과 그 날의 산만함 밑으로 내려가게 하여 영혼이 삶의 잔재를 붙들고 있는 곳에 다다르게 한다.

그 때에 어렵고도 비틀거리는 양상이 시작된다. 이제야말로 나는 내 안에서 이 말씀, 이 구절과 이 상황이 나에게 묻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이때에 발견해야 한다. 지금이다. 이 깨달음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들은 모든 곳으로부터 온다: 모든 옛 기억들이 솟구치고 모든 현재의 투쟁들은 날을 세운다. 분명히 내 안에는 빈 구석이 있어 채워져야 한다. 형성되어야 할 비젼이 있다. 새롭게 다듬어야 할 영혼의 용기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갑자기, 아마도 혹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나는 내 안에서 보기 시작한다. 거룩한 생명이 내 안에서 충만해지기 위하여 되어져야 할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있는 심연이 열린다. 이제 더 이상 그 심연으로부터 나 자신을 숨길 수도 없고 더 이상 그것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제 갈 곳이라곤 팔을 올리고 손을 벌린 채 하느님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 뿐이다. 그 때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열게 된다. 그 분은 모든 부서짐을 한데 싸매어 우리의 가장 황량하고 굳어있는 부분에 활력을 불어넣는 생명에로 이끌어간다.

매일, 매년 관상가는 성서 안으로 들어가며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거룩한 지혜들을 되돌아 살펴보고 시대의 진리 안에 몰입할 때마다 자기 안의 투쟁, 거룩함과 삶에 관한 투쟁에 대하여 새로운 어떤 것을 배운다. 죠셉처럼 관상가들은 실제로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대로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매일 읽는 구절을 통하여 그들의 심연에서 부르고 계시는 거룩한 존재에 대하여 조금씩 알게 될 뿐이다.

관상가가 되기 위해서는 매일 자신을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가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그렇게 하여 마지막에 내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끌리게 된다. 그러면 어느날 어떻게 해서든 두 마음은 내 안에서 하나처럼 고동칠 것이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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