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의 이시도르 원장이 말했다: “말하지 않고 사는 것은 살지 않고 말하는 것보다 더 낫다. 올바르게 사는 사람은 침묵으로 우리를 돕지만,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우리를 성가시게 한다. 그러나 말과 삶이 나란히 간다면, 그것은 모든 철학의 완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분주하고 시끄러운 세계이다. 그건 3세기의 이집트 사막이 아니다. 산꼭대기 위에 있는 은둔소도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언제나 일정과 마감, 빽빽하고 요구가 많은 사회의 산만함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밖으로 향하는 사회 속에 있으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우리자신으로부터 끄집어 내진다. 기관들은 심지어 가족사까지 우리를 위해 계획을 짜준다. 그들은 우리에게 시민축제들을 조직해준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재정적인 계획을 고안해준다. 우리는 삶에서 점점 더 많은 부분을 기관들의 사회적 요구들을 대면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이 기관들은 역설적이게도 본래 개인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끝에는 우리를 소진시키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 하는 영적인 응답마저도 대부분이 종교적 기관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기관들은 이미 그 안에 자신들이 출발했던 계열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관상가들은 예식과 의식이 안으로부터의 거룩한 삶을 살찌우기에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의식들은 잘해야 종교의 부속물일 뿐이다. 영성이란 우리가 따르는 어떤 체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안에 계시는 거룩한 존재에 대한 개인적인 추구이다.
하느님의 생명이 배양되는 내적인 자리를 만드는 작업인 내면화는 관상의 정수요 본질이다. 내면화는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자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의 내적인 삶은 세상을 자유롭게 항해하는 거룩한 생명의 배가 되기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고 자아로부터 이끌어 내 주시면서,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암흑을 뚫고 걸어가는 삶이다.
자아로 들어가서 우리를 이끄는 동기들을 발견하고 우리를 가로막는 느낌들, 우리를 이리저리 향하도록 하는 욕구들, 영혼을 더럽히는 독약들을 마주치면서 우리는 하느님이신 어떤 명쾌함에 이른다. 우리는 자아의 여러 겹들을 보게된다. 우리는 우리자신과 하느님께 대한 투신 사이에 버티고 있는 두려움, 자기 중심성, 야망, 중독과 탐닉 등의 상황을 직면한다. 우리는 너무나 지치고, 무관심하며 산만하고 그래서 영적 삶을 키워가는 노력이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성찰의 공간을 마련한다. 삶이 진정으로 무엇인지에 관해 다시 상기한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알맹이로 향한다.
그 어떤 삶도 정기적으로 혼돈의 문을 닫으려면 지나치게 바쁜 생활을 감당할 수가 없다. 하루에 20분, 일주일에 두 시간, 한 달에 하루아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길고도 외로운 밤에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고 갈팡질팡 하는 것 같을 때, 어느새 우리는 자아를 잃고 사회의 체바퀴에 먹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며 마침내 심리적으로 암흑에 압도될 때까지 이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관상가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자아도 살피는데, 그렇게 하여 하느님이 삶의 모든 측면에 침투하실 수 있다. 우리는 고립된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소리에 둘러싸여 있고 이야기의 파도에 밀리고 있다. 우리는 무력감으로 숨이 막힌다. 관상가는 우리 자신의 영광에 눈이 멀기 위하여 소리들이 우리를 삼켜버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면화는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시는 하느님과의 대화를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충만함이 우리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도록 고요하게 기다리는 연습이다. 하느님은 매일 소모되는 모든 작은 죽음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생명을 우리가 추구하도록 우리의 내면에서 기다리신다. 내면화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하느님의 생명에 대한 자각을 가져다 준다.
내적인 삶을 양성시키는 일은 종교를 '실재'로 만든다. 관상은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는 것이 확실하게 관상의 삶을 키워줘야 한다. 관상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찾는 것이며, 광고와 승진 그리고 시기 질투와 야망에 빠져있는 마음 속에 거룩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숨쉬고 있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온전하게 생명으로 오실 수 있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고갈시키는 격노의 내적 목소리를 조용하게 만드는 시간을 가져야한다. 가슴이 매 순간을 채우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자유롭게 귀 기울일 때에 굴레는 떨어져 나가고 영혼은 우주 안에서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그러면 정신도 건강해지고 삶도 하나의 전체가 되어간다.
하느님은 우리를 넘어서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우리의 영을 지탱시켜주는 그분의 숨결로 양성되기 위하여 자신 안으로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