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 자비, 적들에 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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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 자비, 적들에 대한 사랑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9.0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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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17] 자비로운 이들은 복되도다...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기본적인 것이지만, 아직도 대중적인 덕이 되기에는 요원하다.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깊은 나라들에서도 자비는 점점 더 부식되고 있다. 미국의 형법처벌은 일반적으로 유럽에서보다 더 혹독하며, 사형제도가 많은 국가들에 다시 도입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대중으로부터 엄청난, 열정적인 지지를 받고있다. 아마 교수형이 공개된다면, 사람들은 그 장면을 안전하게 지켜보며 텔레비젼에서도 중개될 것이다.

부드러운 무자비

그러나 더 소름끼치는 살인이 낙태와 안락사에 의해 더 많이 자행되고 그 실제이유는 편리함이나 경제적 이유이지만, 자비와 부드러움이라는 주장아래 합법화되고 있다. 우리는 고통을 끝내거나 막기 위하여 죽이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작가인 플랜너리 오코너가 다음과 같이 관찰하고 있다.

"우리시대에 나타나는 경향들 중의 하나는 고통을 하느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단 그분의 선함을 의심하면 당신은 그분과의 관계를 끝낸다. 알리머스들(나타니엘 호손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을 칭함: 알리머는 추한 것을 견딜 수 없었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바쁘게 짤라내고, 순수선에 의지하여 돌진해 간다.

이반 카라마죠프는 아이가 고문을 받고 있는 한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 카뮈의 영웅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무죄한 이들의 학살 때문이다. 이러한 대중적 동정심으로 우리의 감수성은 점수를 얻지만 비전은 잃어버린다. 만일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덜 느꼈다면, 그들은 대신 더 보았다. 비록 그들이 맹목적이고 예언적이며 덜 감성적인 받아들임의 눈으로, 다시 말하자면 믿음의 눈으로 보았다 해도.

지금 이러한 믿음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부드러움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 부드러움은 그리스도의 인성으로부터 오랫동안 떨어져 나와 있으며, 이론 속에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부드러움이 부드러움의 원천으로부터 갈라져 있을 때 그 논리적인 결과는 테러이다. 그래서 결국 강요된 노동 수용소와 가스실의 연기 속에서 이런 부드러움은 끝난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러시아의 작가이며 죄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알렉산더 솔제니친처럼 악을 진지하게 아주 가까이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솔제니친은 인간들이 각각 선과 악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안에서 갈라져 있다고 주장한다:

선함과 악을 가르는 경계선은 국가들, 계급들, 정치정당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간 마음속을 ­ 따라서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을 지나고 있다. 이 경계선은 바뀌기도 한다. 우리 안에서 이 경계선은 시간이 흐르며 흔들린다. 그리고 마음속에서조차 악에 압도되어 겨우 하나의 작은 선함의 교두보가 유지된다. 그리고 가장 좋은 마음속에서도 뿌리가 뽑히지 않은 작은 악의 구석이 남아있다.

 

내 안의 폭력성

얼마 전에 나는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는 마음속에 이런 “뿌리뽑히지 않은 악의 구석”이 남아있음을 갑자기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밀워키에 사는 교사인 돈나 에디였다. 우리는 둘 다 알고 있는 한 부부의 집에서 아침식사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그는 왜 자신이 권총 소지에 반대하고 어떻게 사형제도 폐지 연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대학생이었을 때 그는 피자 배달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배달을 하고 오다가 세 명의 청년이 그에게 돈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중 두 명은 권총을 갖고 있었다.

"그때 내가 갖고 있던 돈은 피자집에 갖다 줄 20달러 밖에 없었어요. 그건 내 돈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돈은 상관없었어요. 그러나 나는 그 아이들의 행동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권총들이 장난감처럼 보였거든요. 내가 보건대 그 아이들은 그냥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차 속으로 돌아갔지요. 그런데 한 녀석이 나에게 총을 겨누더니 울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쏠 수 있어요' 하고 그 친구가 애원했어요. 나는 그에게 돈을 주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그가 나에게 그럴 여유를 주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어요. 총은 그냥 펑 하는 소리만 약간 냈어요. 영화에서 듣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어요. 나는 딱총에 맞은 것처럼 뜨거운 아픔을 느꼈어요."

"고맙게도 아이들은 빨리 도망갔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이들에게 엄청난 해를 끼쳤을 겁니다. 난 차의 엔진을 걸고 차를 무기처럼 이용해서 그들을 쫓았어요. 약 90초가 지나자 나는 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내 자신에게 물었어요, 도대체 넌 어떻게 하려고 하니? 그들을 따라 잡으려고 하니?”

“그래서 나는 경찰서로 차를 몰았지요. 그러나 경찰들이 나에게 한 것은 그저 피자를 그런 지역에 배달한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한 것뿐이었어요.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경찰에게 그냥 딱총 같은 것이라고 말했고요. 그러나 그들은 의사에게 보여야 한다고 말했어요. 병원에서 난 비로소 내가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돈나는 운이 좋았다. 총알이 그의 허리벨트 장식을 치고 옆으로 빗나가 피부를 뚫고 다시 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큰 상처가 아니었지만 삶을 바꾸는 중대한 체험이었다. “그날 난 이런 폭력을 행할 가능성이 내게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 삶에서 90초 동안 원초적인 본능이 나를 지배한 셈이지요. 그때 총이 있었다면 적어도 한 아이는 아마 그날 죽었을 겁니다.”

아토스산의 실루안

돈나 에디의 이야기는 나에게 최근에 시성된 정교회의 성인, 아토스산의 실루안에게 일어났던 삶의 어떤 전환점을 기억나게 해 주었다. 1866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실루안은 교육을 받지 못한 농부로서 강한 체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젊었을 때에는 뜨거운 혈기를 지니고 있었다. 마을의 주보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에 그는 아코디온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마을의 구두장이들인 두 형제들이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큰형이 실루안에게서 악기를 빼앗으려고 하여 싸움이 터졌다.

“처음에 나는 악기를 양보하려고 했었다”고 실루안은 후에 회상하였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이 그런 나를 보고 웃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부끄럽게 느껴져서 형의 가슴에 일격을 날렸다. 그러자 형의 몸뚱이가 날라가서 길 한가운데에 쿵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거품과 피가 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구경꾼들은 공포에 질렸다. 나도 무서워졌다. 나는 ‘내가 그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반시간이 지난 후 그가 제발로 일어났다. 사람들이 힘들게 그를 집으로 옮겼고, 수개월 동안 그는 침대에 누워지내야 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실루안은 자신과 살인자 사이에 아주 조그마한 차이밖에 없다고 느꼈다.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그가 이웃을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그가 기도와 속죄의 생활에 끌렸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의 아토스 산에서 수도승이 된 후 그는 폭력과 그 원인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고 기도했다. 하느님이 그에게 준 선물들 가운데 하나는 인류의 하나됨에 대한 깊은 자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모든 사람은 우리자신 그리고 영원한 실존의 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자신 안에 온 인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실루안의 영적인 투쟁 대부분은 적들에 대한 사랑에 집중되었는데, 이것은 열심한 기도 없이 달성될 수 없는 목표였다: “우리가 적들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리고 우리가 사랑 없이 존재한다면, 주님께, 그분의 가장 순결한 어머니께, 그리고 모든 성인들께 열심한 기도로 돌아서자. 그러면 주님은 모든 것으로 우리를 도우실 것이고, 우리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그분은 알고 계신다.”

자비는, 부드러운 자질처럼 보여도 어려운 덕이다. 우리는 자신들에 대해서는 자비를 원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자비를 확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조금 알고 있거나 한쪽 측면에서만 보는 것들에 대해서 판단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우리는 자신들을 좋게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들이 꽤 선한 의도들을 갖고있으며,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라고 칭할만 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다수를 살해하거나 마약 거래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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