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망상
마녀 망상은 15세기 이래, 특히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시기에, 갖가지 동기들이 결합되어 나타났다. 마녀(Hexe)는 고대 고지대 독일어인 ‘hagazuzza’(울타리에 올라탄 여자)에서 나온 말인데, 단순히 주술을 행하는 여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계의 대다수 사람들은 독하고 충동적이며 자연의 힘을 마음대로 이용하는 간악한 여자들이 악마와 결탁하여 극히 위험한 이단활동을 한다고 믿었다.
마녀를 가려내는 지침에 따르면, 마녀들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악마와 일종의 결혼계약을 맺고, 여러 번의 동침을 통해 악마가 계약을 봉인하고, 악마의 힘을 빌린 마법으로 흉작이나 짐승이나 사람의 돌연사를 일으키고, 다른 마녀들과 한밤에 군무를 추며 질탕한 잔치(마녀들의 안식일)를 벌인다고 한다.
주로 프랑스,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지역, 독일 중남부,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스코틀랜드에서 유행한 마녀 망상은 “너희는 주술쟁이 여자들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탈출 22,17)는 구약성경 구절을 빌미로 퍼져나갔으며, 마녀로 확인된 여성은 화형 장작더미에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이 여성들은 통속적이며 이교적 미신, 여성에 대한 적의, 종교재판과 고문이 없었다면 마녀재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 책임 소재를 찬찬히 살펴보자.
종교 재판과 마녀 화형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에 대규모 이단운동에 직면해 상세한 ‘악마론’을 전개했다. 그는 악마와의 계약교설을 통해 이교적 미신으로 배척되던 생각을 신학체계 안에 편입시켰다. 같은 도미니코 신학자였던 남독일과 라인란데의 종교재판관인 하인리히 인스티토리스와 야콥 슈프렝어는 마녀론에 관한 책을 지었다. 쾰른대학 신학부의 인가를 받은 것처럼 꾸민 <마녀망치>라는 책은 1487년부터 1669년까지 무려 30판을 거듭하며 엄청나게 보급되었고, 신학자와 법률가, 의사, 종교재판관, 일반 법관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여기에는 마녀의 개념, 마녀의 비행, 마녀를 기소처벌하기 위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앞서 르네상스 교황인 인노켄티우스 8세가 1484년 <마녀교서>(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 금인칙서)를 발표해 종교재판관들에게 마녀를 심문하고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 치명적인 교서는 물론 뒤이어 발간된 <마녀망치> 앞쪽에 곧장 수록되었다.
“최근 우리 귀에는 참으로 가슴아픈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마인츠, 쾰른, 트레브, 잘츠부르크, 브레멘 등 북독일 지역 교구들에서 다른 지방이나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녀 할 것 없이 자신의 구원을 잊어버리고, 가톨릭신앙에서 벗어나 몽마(夢魔, 잠자는 여자를 범한다는 귀신)와 음몽마녀(淫夢魔女, 잠자는 남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악령)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술과 마력, 푸닥거리나 미신적인 언동, 마술 따위로 여인들의 자손과 어린 짐승들이, 땅의 기운과 포도밭의 열매들이 쇠잔해지고 사멸해 가고 있습니다.”(마녀교서)
마녀색출에 앞장섰던 로렌의 종교재판관 니콜라 레미는 1595년부터 1616년까지 2,000~3,000명의 마녀 혐의자를 처형했으며, 독일의 트리어 대주교는 1587년부터 1593년까지 22개 마을에서 368명의 마녀를 화형에 처했다.
당시 교황청 종교재판소는 여자들에게 사용할 고문 기구를 생산, 조달하느라 바빴다. 밀고가 접수되면, 당국이 은밀히 심리했으며, 마침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이 뒤따랐으며, 결국엔 화형이었다.
1532년 황제 카를 5세가 새로운 <소송법>(Carolina)을 반포하면서 마녀 재판 시행을 위한 법적 조건도 갖추어졌다. 이제 마녀재판을 국가가 관장했는데, 그 재판의 증거들이 너무 막연했기 때문에 누구라도 밀고를 당하면 종교재판이라는 맷돌장치에서 갈려나갈 판이었다. 그리고 마녀들은 ‘예외적 범죄자’였기 때문에 고문이 허용되었다. 그 결과,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이른바 공범자들의 이름(마녀의 잔치에서 알게 된 이름)이 튀어나왔고, 새로운 재판이 줄줄이 이어졌다. 사형 방법은 화형이었으며, 1600년 이후엔 참수했다.
마녀로 희생된 이들의 대부분이 하층민 여성들이었다. 마을의 별것 아닌 소문, 이상한 외모, 행동거지, 미움, 질투, 불화, 돈 욕심 따위가 마녀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는 탄원서를 쓰게 했고, 그러고 나면 종교재판이 기계적으로 작동되었다.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거나 예측할 수 없던 일이라면, 모두 마법에 그 이유를 돌렸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미 죽어 있는 아기, 높이 걸린 사다리에서 추락, 욕설이 오가는 언쟁에서 무심코 뱉은 한 마디 ‘악마나 너를 데려가라’ 등이다. 기이한 성적 습성을 가지거나, 마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당황하거나 땅바닥을 멍하니 쳐다보기, 십자가 한쪽이 깨진 묵주를 가지고 다니는 일 등이다.”(<사탄과 약혼한 마녀>, 시공사, 1995)
왜 마녀 망상이 생겨났는가?
이런 마녀 망상이 발생한 원인은 다양하게 나왔다. 나왔다. 시골 하층민 여인들의 불쾌한 언행이나 저주, 악담이 마녀 의심을 불러 왔으며, 주로 산파와 치료사, 요리사 와 혼자 사는 여인들이 표적이 되었다. 또한 남자들의 성 불능, 불임, 흉작, 가축 전염병, 자연재해, 질병, 갑작스런 사망과 결부되어 여인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발두스파 등 이단을 처형하던 종교재판과 민간의 적개심이 유대인들과 여성들에게로 옮아갔다. 모든 이교도와 유대인들은 ‘마법사’로 의심받았으며, 번번이 거주지에서 추방당하거나 사유재산을 몰수당했다.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 유대인의 안식일이었던 사바스(Sabbath)는 중세기 이후 ‘마법의 집회’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또한 교회의 독신 종교재판관들은 성적으로 고착된 망상을 품었다. 그들은 성적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호색적인 여자들의 성적 도착과 음행, 그리고 심지어 악마와 함께 한다는 질탕한 잔치에 관심을 보이고, 사탄의 종자(從者)들인 마녀들을 여성의 어두운 본성의 체현자로 ‘악마화’했다.
밤이 되면 야수로 변해 괴성을 지르며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어린 아이들을 한 입에 잡아먹으러 집집마다 쳐들어간다는 ‘야행성 마녀’ 이미지는 로마시대 문학과 게르만의 ‘악마신화’와 민담에 등장한다. 교회에서는 이를 두고 ‘미신’으로 치부하지 않고 ‘악마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이용했다.
기본적으로 페스트와 잦은 전쟁, 가뭄과 흉년뿐 아니라 교황의 아비뇽 유수 등 혼란한 상황에서 마녀 망상은 극성을 부렸다.
당시 마녀로 죽임을 당한 여성만 최소한 10만 명 이상이었는데, 게르하르트 쇼르만은 “이 마녀 재판은 유대인 박해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전쟁에 기인하지 않은 가장 엄청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집단 학살을 야기했다”고 말했다.
마녀 재판은 많은 경우에 주로 여성이 여성을 밀고했지만, 밀고가 접수된 후엔 남자들이 전문가, 학자, 법률가, 재판관, 사형집행인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마녀 재판은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1600년경에, 프랑스에선 1650년 이전에 폐지된 반면에, 독일제국에서는 1680년경에야 없어졌다. 이런 마녀 망상과 재판, 화형을 근절시킨 것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계몽주의였다.
[참고서적]
<그리스도교 여성사>, 한스 큉, 분도, 2011
<여성과 그리스도교>, 메리 T, 말로운, 바오로딸, 2008
<사탄과 약혼한 마녀>, 시공사, 1995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