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독신과 결혼 사이, 가부장제는 그대로
상태바
종교개혁: 독신과 결혼 사이, 가부장제는 그대로
  • 한상봉
  • 승인 2017.07.16 1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톨릭일꾼 강의: 그리스도교 여성사-5

루터의 종교개혁 "복음으로 돌아가자"

한스 큉은 중세 로마가톨릭 패러다임과 대조하며 16세기 이후 종교개혁 개신교 패러다임에 주목했다. 루터는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미 교회전통과 법률, 권위들이 있었지만, 루터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일한 척도는 ‘성경’이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성인들과 공식적 중재자들이 많고 많았지만,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믿었다. 영혼 구원을 위해 교회가 규정한 온갖 경건한 종교적 선행급부와 노력이 요구되었지만, 루터는 인간에게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루터의 비판적 견해는 혁명적 결과를 낳았다.

종교개혁 이후 희생제사로서의 미사와 사적 미사가 상대화 되었다. 미사 대신에 모국어로 집전되는 공동성찬례가 이뤄졌는데, 여기서는 면병 대신에 보통 빵을 사용했고, 평신도들도 성혈을 배령했다. 성찬례 집전시에 사목자는 검은 제의를 입고, 신자들과 얼굴을 마주보았다. 또한 매일 미사 대신에 매일 설교가 행해졌다.

자칫 예수를 뒷전으로 밀어낼 수 있는 교회 직무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사제의 개념과 교권제도, 교회법의 신적 요소가 폐기되었다. 수도원 제도와 종교적으로 허용된 구걸(탁발)을 문제 삼으면서, 세속 직업을 하느님의 소명으로 여기고, 직업생활을 예배처럼 여겼다.

성경에 근거가 없는 교회전통과 경건행위들이 폐기되었다. 그 결과 대사(大赦), 성인 공경, 단식 규정, 성지 순례, 축제 행렬,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성유물 숭배, 성수, 부적들이 배척되었다. 성체성혈대축일 등 많은 축일들도 폐기되었다.

끝으로 성, 여성, 결혼, 가정의 가치를 무시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모독한다고 여겨 ‘사제독신제’를 폐기했다. 결혼 역시 ‘성사’가 아니라 ‘세속적이지만 거룩한 일’로 교회 안에서 경축되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결혼의 의무'만 부각된 종교개혁

종교개혁 이후 결혼생활의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중세적 독신의 우월성이 폐기되었다. 사제서품의 우위는 일상적 가정생활의 우위에 의해, 수녀의 이상은 아내와 어머니의 이상에 의해, 성의 악마화는 결혼생활을 통해 충족될 수 있는 인간의 자연적 본능에 대한 긍정으로 대체되었다. 결국 성생활을 자녀출산 목적에 제한하지 않게 되었다.

수도원과 사제독신법이 폐기되면서, 목사와 결혼한 여성에게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활동영역이 제공되었다. 동정녀 어머니 마리아의 이상이 밀려나면서, 마리아 공경은 빛을 잃었다. 특히 성직자들의 독신제 폐지는 성직자 신비주의와 독신남성들에 대한 여성들의 의식, 무의식적 집착에서 벗어나는 효과를 가져 왔으며, 남성 신자들 역시 미혼 성직자에 대한 의식, 무의식적 거리두기에서 놓여났다.

수녀원 폐쇄, 여성의 해방구 사라져

마르틴 루터는 남편과 아내의 공동체와 남편과 자녀에 대한 아내/어머니의 관계가 인간 실존의 기본사실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신교 여성신학자인 게르타 샤르펜노르트는 루터의 입장을 이렇게 요약한다.

“하느님은 조물인 남자와 여자는 함께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 육체성과 성은 그들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루터는 남편과 아내의 특별한 관계에 주목한다. 그래서 “세례 받은 아내는 세례 받은 남편의 영적 누이로서, 동일한 성례전, 성령, 신앙, 영적 은사와 재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피상적인 대부, 대모 관계보다 훨씬 가까운 벗이 된다”고 했다. 특히 당대 개혁가였던 에라스무스와 토머스 모어와 마찬가지로 소녀들의 훈육과 학교 교육에 대한 옹호를 통해 여성 가치의 존중에 실제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사회구조 자체는 철저히 가부장적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요 벗이라는 루터의 사상 가운데 실제로 적용된 것은 ‘결혼의 의무’뿐이었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적 역할은 그대로 유지되고, ‘남편-아내, 부모-자식, 주인-하인’의 복종적 위계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결혼도 부모가 결정하였고, 아내는 정치, 법률,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매어 있었다. 여성들은 국가, 교육기관, 교회에서도 결정구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여성들은 교회직무에서 배제되고, 교리교사와 교회 고용인으로만 일할 수 있었다. 성례전 집전은 물론이고 설교에서도 여성들은 배제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수도원이 사라지면서 여성들이 안전하고 의미 있는 실존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 역시 사라졌다. 여성들을 결혼과 가정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여성들의 자주적 삶이 가능한 ‘해방구’는 없었다.

칼뱅파와 영국교회의 여성

종교개혁자, 칼뱅

종교개혁자인 칼뱅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아리스텔레스의 생리학적 여성관을 배척했다. 여성은 태아 생성 단계에서부터 능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여성은 ‘실패한 남성’일뿐이라는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칼뱅은 여성의 목회직 안수를 거부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생물학과 신법에 근거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과 교회 또는 국가의 법질서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과는 같았지만, 준거가 달라졌기 때문에 교회-사회적 법질서의 변화에 따라서 여성 임직은 유동적일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종교개혁기에 영국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이다. 그녀는 개신교 성향의 주교들과 개혁 지향적 성직자들, 그리고 개신교 저술가의 옹호자였다. 그녀는 수도원 폐쇄 등 교회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토마스 모어의 출가한 딸 마거릿 로퍼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종교서적들을 영어로 번역했고,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주님의 기도’ 주석서도 번역 출간했다. 


[참고서적]
<그리스도교 여성사>, 한스 큉, 분도, 2011
<여성과 그리스도교>, 메리 T, 말로운, 바오로딸, 2008
<교황의 죄>, 게리 윌스, 중심, 2005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