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없는 사회, 우리는 야만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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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없는 사회, 우리는 야만인에 불과하다
  • 참사람되어
  • 승인 2017.06.0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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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의 사회적 의미-6

타인들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개인의 정체성을 찾는 요구는 다시 말하면 이웃과의 조화를 갈망하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공동체에 대한 갈망은 매우 강력한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연대는 긴급한 요구로 등장하고 있다.

개인들 사이에, 국가들간에 형제 자매애가 날로 사라져 가고 있다고 언론은 우리에게 말한다. 세계는 300억 달라를 군비로 쓰고 있다. 미국이 소위 ‘원조’(이중 대부부은 군사원조이며 투자원조임)라는 명목으로 일년에 세계에 내놓은 4억달러에 비교한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무기 생산에 얼마나 막대한 자원이 낭비되고 있는가를 알아 차릴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공동체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부 정보에 불과하다. 세계와 국가간에 불평등은 공동체 만들기에 큰 장애가 된다. 한 작은 본당의 여러단체들 간에도 혹은 수도 공동체에서도 사람들을 서로 진실로 이해하려는 갈망이 움트고 있다. 이웃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으며,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려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오늘날 소외와 개인주의가 성행하면 할수록 공동체에 대한 갈망도 더욱 심화되고 있다.

현대 문명은 기술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이웃과 자연에 대한 관심은 극도로 쇠퇴하고 비인간적인 되어간다. 우리는 고도로 문명화된 야만인들이다.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있다. 우리는 천체들간에 교류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산을 움직이고 비를 오게하며 수많은 질병들을 극복하였다. 오늘날처럼 인류가 기술문명을 꽃피운 적은 없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문명화되었다. 또 우리는 우리의 자세나 태도를 세련되게 하였다. 우리는 상냥하게 말하는 것도 배웠다. 타인과의 관계를 매끄럽고 외교적으로 맺을 수도 있다. 예술뿐 아니라 과학도 많이 발전시켰다.

그렇지만 역시 우리는 야만인들이다. 우리는 자연을 파괴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우리는 지구를 오염시킨다. 호수와 바다를 죽이고 있다. 산과 평원을 잠식시킨다. 우리는 초강력 살인 무기를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을 팔아 먹는다. 체계적으로 그것들을 발전시키고 인류파멸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는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개걸스럽다. 우리에게는 이 지상의 모든 남녀,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이 풍부하다. 그러나 소수의 우리들은 자신들만을 위하여, 혹은 우리의 애완동물들을 위하여 식량을 움켜쥐며 쓰레기로 내버린다. 이웃들이 이 지상에서 굶어 죽어가는데 우리는 축제를 지낸다. T.V는 매일 이러한 사실을 방영하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식량을 훔쳐낸 사람들에게 하는 애매모호한 ‘원조’에 대하여 수동적이며 맹목적인 동의를 하고 있다. 우리는 매주일날 교회에 간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배고픈 이들의 식량과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우리는 야만인들이다. 배고픈 이들로부터 식량을 훔치고 기아로 허덕이는 이들에게 강도질을 하기 때문이다. 열명중에 두 명의 아이가 나머지 여덟명의 식량을 빼앗아 배불리 먹고 나머지는 찌꺼기를 배고픈 여덟명의 아이들에게 던져주어 서로 싸우게 한다면, 우리는 이 아이들을 야만인이라고 단죄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늘날 인류가 처한 상황이다.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나라들의 부유한 우리들은 “깨달은” 사람들이지만 역시 야만인에 불과하다.

이처럼 전 세계 사회가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권력가와 피권력인들,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아에 깊게 분리되어 있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일치의 성사로서 성찬례는 함께 함을 다시 회복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쪽을 지향하는데 역할을 해야 한다. 세례받은 이들의 영적인 삶을 성장시켜주는 성사로서 성찬례는 부자와 가난한 이들, 유대인과 이방인들, 남자와 여자들 사이의 차별을 없애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가친관들을 창조해 내야 한다.

성찬례는 또한 참회와 회개의 성사이다. 불화와 차별의 현실 속에서 성찬례는 마음의 깊은 회심과 사회변혁을 위한 행동에로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성찬례는 개인과 사회적 차원에서 이기심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하며, 지상에 새로운 인간 사회를 이룩하는 싸움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의 아픔을 효과적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성찬례는 불의와 분리를 더욱 짙게 해버리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다양한 공동체들, 교회나 단체들은 제각기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서로 다른 사회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미사들이 한 도시 안에서 봉헌된다. 결혼이나 장례미사들은 사회적 분리나 소외감을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보여지도록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진행된다. 보속과 개혁, 회개를 불러 일으키기보다 이러한 미사들은 불일치, 차별 그리고 때로는 억압과 착취를 조장해 왔다.

남아프리카 같은 나라에서는 백인과 흑인들을 위한 본당이 따로 존재한다. 불평등과 차별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하여 저항해 볼 생각도 없이 이러한 본당들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같은 상황이 남아프리카 뿐 아나라(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전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는 성찬례가 식민적 착취와 잔인성과도 연결되는 불명예스러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분리와 불의는 성찬례의 참의미와 봉헌에 장애가 된다. 성찬례의 공동체로서 우리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불일치에 대하여 잘 모르기 조차 한다. 이것은 성찬례를 거행하는 공동체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거의 성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당에서 성찬례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회분석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그들은 의무나 타성에 의하여 참여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그분은 3년 동안이나 제자들을 준비시켰다. 그래서 성찬례를 거행할 때쯤 그들은 그 중요성과 사명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의미를 깨닫고 두려워하기 조차 하였다.

최후의 만찬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모두 올리브 동산으로 갑시다” 그리고 그분은 갈바리아로 가셨다. 그런데 본당 성찬례에 모인 우리들은 주일날 놀기에 바빠 될 수 있느대로 빨리 해치우려고만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성찰

- 교회 공동체(본당, 교구, 수도원 포함)가 지니고 있는 부동산의 씀씀이는 무엇인가? 자체 유지에만 쓰여지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을 위하여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에 쓰여지고 있나? 특히 수도원이 갖고 있는 부동산이 증가하는 소작농 현상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의 의미는 최저의 생존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애쓰는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들의 돈과 시간, 능력을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까지 사양해가며 내어 놓은 것을 말한다. 본당이나 교구의 여러 단체들은 대부분 자체교육이나 회원 친목 도모에 예산을 쓰고 있는데 그 내용들에 지나친 낭비나 불필요한 지출을 없는가?

- 교회(교구, 수도원 등)가 운영하는 기도, 피정의 집 사용비용은 가난한 이들, 가난한 신자들이 이용하기에는 너무 부담이 큰 형편인데, 이들에게 사용비를 저렴하게 해 줄 수는 없을까? 아니면 대형이나 호화시설보다 소규모의 시설을 마련하면 어떨까?

- 사회의 중요 지위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 특히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에 관한 정책수립이나 집행을 해야 하는 신자들에게 교회 공동체는 어떤 원칙(복음과 사회적 가르침에 나타난)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또 그러한 신자들과 가난한 신자들이 함께 교회에 모여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떨까?


[출처] 참사람되어 1996년 11월호
[원출처] <하나되어> 1988년 8월(제19호)~1989년 6월(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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