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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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
  • 한상봉
  • 승인 2017.06.0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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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과 은총 4강: 가톨릭교회의 ‘교회성’에 관하여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지금까지 가톨릭교회의 신경(信經)에 영향을 주고 있는 에피파니우스(315-403)와 치릴루스(313-386) 등이 제시한 교회의 특성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우리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 13세기에 발두스 파 등과 논란이 벌어지면서 나중에 “로마적”인 교회가 추가되었다.

유일성

교회의 유일성(Unity)은 하나의 교리, 하나의 주장, 하나의 전례, 하나의 교회질서(교회법), 하나의 도덕, 여기에 언어의 획일성(라틴어)도 포함된다. 이러한 상징적 질서의 통일은 교회권력의 지배력이 일시분란하게 작동하도록 만들며, 교회의 내부적 갈등을 은폐시키거나 변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안에도 문제는 많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잖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와 행동에서 일치를 강조하며, 교회 상층에서 결정한 사항에 다른 의견을 가로막는다. 아울러 교회의 유일성에 대한 호소가 하느님과 우주적 질서의 요청이므로, 여기에 저항하는 모든 해방적 노력을 불법화 시킨다. 그러나 교회 내 계급 간의 일치는 ‘상징적’일뿐 현실은 교회 위계질서 안에서 엄격히 구별되는 차별적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사진출처=adaltaredei.tumblr.com

교회의 거룩함

교회의 거룩함(Holiness)은 교회 지체들로 하여금 교계제도가 설정한 가르침에 순응하도록 촉구한다. 신자들의 가장 큰 미덕은 교회(사실상 교계)와 교회 장상에게 순명하고 복종하며 겸손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공적인 성인(聖人)들은 교황, 주교, 사제, 수도자 등 체제 안에서 선별된 사람들이다. 교계 밖에 있는 평신도 성인은 거의 없으며, 이들 마저도 중심적인 지배 권력에 복속된 사람들이었다.

신앙의 가치를 내걸고 비판하거나 교회 내부의 권력 변동을 제안한 예언자들과 개혁자들은 갖가지 상징적 폭력(교회법에 의한 재판, 파문)을 감수해야 하며, 교회 안에서 결코 ‘거룩한 자’로 불리지 않는다.

보프는 거룩함의 개념을 ‘성인’에게서만 찾지 말고 ‘투사’(鬪士)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투사는 통상의 성인들처럼 정욕과의 싸움을 넘어서 공동체적이고 균형 잡힌 사회구조를 건설하기 위해 착취와 부의 독점에 대항해 싸운다. 예언자와 같은 투사는 계급사회에서 새로운 미덕인 연대성과 공감능력에 탁월하며, 사회적 불의와 권력남용, 과도한 사적 소유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행동한다. 이에 신앙공동체는 ‘사회적 복음’을 위해 일하다 고통받거나 죽은 이들을 ‘순교자’로 기억하며 공동체적으로 기념하며, 그를 표양으로 삼는다.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사람을 ‘열사’로 추념하고 있다.

교회의 보편성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은 유일성 개념과 결합되어 있으며, 각 지역교회들은 전 세계에 걸쳐 동일한 교계제도, 동일한 성사, 동일한 신학 등을 통해 일치한다.

그러나 보편성이란 이런 형식적 차원의 동질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라면, 당연히 복음이 지닌 보편적 가치 안에서만 교회의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교회기초공동체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사회정의와 인권신장을 위해 투신하라는 보편적 요청을 받고 있다. 만인의 권리는 먼저 가난한 이들의 권리 회복을 통해 시작된다. 빼앗기고 억눌린 자들은 고통에서 해방되고, 권력자들과 부자들은 권세와 탐욕에서 해방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당파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요청이다.

교회 안에서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영성체를 하지만, 같은 가톨릭신자라 해서 기업주와 노동자가 공장에서는 영성체를 할 때처럼 똑같이 이윤을 나눠 갖지 않는다. 만일 공장에도 영성체가 있다면 모두가 고르게 나누어야 한다. 교회의 보편성은 ‘두루 만족할만한’ 이런 방식으로 현실이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차지하는 사랑은 보편적 가치이지만, 전례와 기도 가운데 읊조리기는 쉬워도 실천되기는 어렵다. 실천 없는 사랑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실천 과정에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사랑은 보편적으로 ‘들리지만’ 구체적으로 ‘거부되는’ 사랑이다.

교회의 사도성

교회의 사도성(Apostolicity)은 교회의 단일계급인 주교들이 사도들의 후계자라는 뜻이다. 사도적 계승은 사도적 ‘권한’의 계승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본래의 의미인 사도적 ‘가르침’은 분명하게 전승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적 책무보다, 주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차원에서 ‘사도적 계승’이라는 개념이 강조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란 ‘파견된 자’이다. 히브리 서간에서는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3,1)이라고 신자 공동체를 부른다. 본래 ‘사도’라는 말은 12제자에게만 쓰인 말이 아니었다. 그들이 복음선포를 위해 세상에 ‘파견’되었을 때 비로소 ‘사도’가 되었다. ‘12’라는 상징적인 숫자 역시 예수님이 소집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제자로 불리웠지만, 집단적으로 사도로 파견되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할 사명을 받아서 사도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과 신앙공동체의 생생한 기억(전승과 경험)을 통하여 이러한 사도적 신앙과 그 가르침에 결합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평신도사도직’이라는 말이 강조된 이유도 그러하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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